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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恩人 릿지웨이 장군의 軍人정신

풍월 사선암 2010. 12. 3. 10:42

6·25의 恩人 릿지웨이 장군의 軍人정신

 

인간애와 교양, 그리고 애국심

 

6·25 熱戰이 한창이던 1950년 겨울은 추웠다. 참전 미군들의 회고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cold'이다. 미군이 싸운 전투중 가장 온도가 낮았던 것이 6·25였다.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참전을 결단했던' 트루먼 대통령, 군사전문가들의 거의 일치된 반대를 꺾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戰勢를 역전시켰던 맥아더 장군, 낙동강 방어선과 부산교두보를 확보하여 반격의 힘을 축적했던 워커 미8군 사령관. 워커는 1950년 12월에 한국군 트럭에 받혀 사망하였다.

 

중공군 대공세시기에 워커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유엔군의 총붕괴를 막고 서울을 재탈환했던 릿지웨이, 조종사 아들을 북한상공에서 잃은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 대하여 고마워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나는 릿지웨이 장군의 한국전 회고록을 읽었을 때 여러 번 감동했다. 文明국가의 장교들이 가진 紳士道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戰死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부인한테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도쿄를 거쳐 대구로 날아온다.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李承晩 대통령 예방이었다. 李 대통령은 미군이 중공군의 총공세에 굴복하여 한국을 포기하고 철군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이 완강한 戰士를 만나 내가 8군을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싶었다. 그는 약간 수동적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악수를 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을 했다. 말을 돌려서 할 시간도 없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대통령 각하, 여기 오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여기 머물려고 온 것입니다"

이 말을 그는 기다렸던 것 같았다. 그는 태양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는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았다>

 

일단 서울을 포기한 직후 릿지웨이 장군은 한국군의 丁一權 참모총장에게 보낸 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직 하나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귀하의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내는 일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릿지웨이 장군은 1951년 1월21일 苦戰中인 미8군을 향해서 '우리는 왜 여기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란 제목의 글을 내려보낸다. 이 글에서 그는 "우리는 한국의 마을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만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는 것만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지는 글의 요지는 이러했다.

 

<핵심적 문제는 서방문명이 공산주의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포로들을 사살하고, 시민들을 노예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지배층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視하는 정부를 무너뜨릴 것인가이다.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의 자유, 우리의 自主독립과 생존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산주의와 개인의 자유 중 兩者擇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나 동시에 최선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군인이란 직업의 명예를 드높여, 우리를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할 기회가 왔다>

 

1951년 1월1일 그는 서울 북방으로 가서 후퇴하는 한국군을 보았다. 회고록에서 그는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무기도 버리고 지휘계통도 무너진 채 퇴각하는 모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릿지웨이 장군이 차에서 내려 한국군의 潰走(궤주)를 정지시켜려고 해도 공포에 질린 한국군은 미군 사령관의 말도 듣지 않더란 것이다. 그는 한국인들의 참혹한 피난행렬에 대해서 이런 요지의 묘사를 했다.

 

<그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수염을 기른 노인들, 아들의 등에 어린아이처럼 업힌 할머니들, 그들은 말 없이 한강을 건너갈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공산주의의 폭력을 피해 잠시 맛보았던 그 자유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미군은 후퇴하고 있었고 릿지웨이는 병사들과 함께 막사에서 생활하면서 미군의 士氣를 회복시켜 반격의 찬스를 만들기 위하여 苦鬪하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기에도 그는 한국인에 대한 예의와 동정심과 배려를 유지했다. 그의 회고록엔 고생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紳士란 어려운 조건하에 처했을 때 품위를 유지하는 言行의 소유자이다.

 

같은 시기 毛澤東은 人命손실에 대해서는 일체의 고려 없이 작전을 짜고 수행했다. 중공군이나 북한군측의 기록에선 인간적 배려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戰場에서도 인간의 생명, 그것도 他國民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 릿지웨이 장군. 그는 1951년 봄의 반격작전을 통해서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한국포기를 검토하던 미국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을 안심시키고 한국을 지켜냈다.

 

그때 미국 정부 일각에선 '한국 포기'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유엔군의 主力인 8군 장병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한국의 겨울 추위는 미군들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릿지웨이 장군은 이들의 士氣를 회복시키지 않고서는 반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50代의 이 猛將은 텐트를 치고 장병들과 행동을 함께 했다.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전선을 누비면서 장병들의 軍心을 파악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발끝에서 입술까지 얼어붙은 몸을 녹인 커피 한 잔의 추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릿지웨이가 미8군 소속원들에게 내린 훈령 全文이다. 미군 장교들의 생각과 筆力을 잘 보여준다. 진짜 군인은 모두가 知性人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내가 한국에 온 지난 數週 동안 제8군 장병들의 마음속에 두 개의 절실한 의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이다. 8군 사령관으로서 나는 모든 장병들이 나의 응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1951년 1월21일자로 8軍에 소속되거나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나의 응답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첫번째 질문, "왜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고 단호하다. 우리가 존중하는 정부의 合憲的으로 구성된 당무자들이 내린 결정에 의해서 우리는 여기에 와 있다. 유엔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말했다: "유엔 회원국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에 따라서 우리 사령부는 한국에서 군사적 布陣을 유지할 것이다"

 

더 이상의 논평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바치고 기대하는 충성심은 이상의 명령에 대한 아무리 사소한 의문이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단호한 것이다.

 

두번째 의문은 아주 심각한 것이므로 우리 사령부 소속원들은 논리적이고 완전한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나의 답변은 이렇다.

 

나로선 문제가 명쾌하다. 한국의 이런 저런 도시와 농촌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그런 不動産 문제는 부수적인 것이다. 문제는 동맹국 한국의 자유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한국인들의 지조와 용기가 전쟁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꺾이지 않았음을 우리가 높게 평가하지만, 한국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것은 더 큰 명분의 한 상징이며 이 大義명분 속에 포함되는 셈이다.

 

문제의 본질은 서구 문명의 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에서 꽃피도록 하신 그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패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고, 포로들을 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는 독재세력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하게 보는 민주세력을 뒤집어엎을 것인가이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가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시체처럼 사라질 것인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싸움은 동맹국 한국의 국가적 생존과 자유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백해진다. 이 전쟁은, 우리의 조국이 독립과 명예를 누리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가 바친 희생과 도움은 他人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기 위한 직접적 自衛행동이었다.

 

결론적 분석: 여기 한국에서 제기된 문제의 핵심은 공산주의냐, 개인의 자유냐의 투쟁이며, 무리가 목격한 그 겁에 질린 사람들의 대탈주를 중단시킬 것인가, 아니면 머지 않는 장래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절망적이고 비참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 것인가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싸우는 이유들이다. 일찍이 그 어떤 軍 사령부의 소속원들도 우리가 직면한 이런 도전을 감당한 적이 없다. 이는 挑戰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 국민들 앞에서 최선의 노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리하여 군인이란 직업과 우리를 키워준 용감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자.

 

 

밴 플리트 8군 사령관 아들의 戰死

 

사령관은 실종된 아들에 대한 과도한 수색을 중단시켰다. 

 

6·25 남침 전쟁 때 유엔군의 主力이던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그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本國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海外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射手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微力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 승무원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3월19일 밴 플리트가 만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4월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승무원은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정찰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다와 접촉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戰線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벗은 미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고, 남침을 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밴 플리트의 아들은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동포가 아닌 他國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 젊은이에게 살아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美 CIA 부장의 외아들, 한국에 참전, 머리에 총 맞아

 

프린스턴 대학교에선 이름 딴 賞 제정

 

알렌 덜레스와 존 포스터 덜레스 형제는 장로교 목사를 아버지로 하여 태어났다. 兄인 알렌 덜레스는 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에 머물면서 정보工作을 지휘하였다. 그는 1947년 미국 CIA가 창설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1953년부터 9년간 CIA 부장직을 맡았다. 그의 동생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서 國務장관으로 일하였다.

 

알렌 덜레스는 獨子를 가졌는데 이름이 알렌 메시 덜레스 2세였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를 공부하면서 公職者의 길을 준비하고 있던 중 6.25 남침전쟁이 터지자 해병대에 지원하여 장교로서 한국戰線에 배치되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싸웠다. 아버지는 아들을 후방에서 근무하도록 해달라는 따위의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머리에 총상을 맞고 영구적인 정신장애자가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은 1997년에 '알렌 메시 덜레스 51년 賞'을 제정하여 국가를 위하여 봉사한 학생들에게 주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셀던 도드 아이젠하워도 장교로 참전하였다. 아이젠하워가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아들은 한국戰線의 미군 전투 대대에 배속된 소령이었다. 대통령 당선자는 한국戰線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휘관에게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탁한다"고 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敵軍의 포로가 되어 이용당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사단본부 근무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