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김정일에게 8억달러 갖다바치도록 만든 박지원, 그는 누구인가? (7)

풍월 사선암 2010. 9. 15. 19:19

"국회의원 시켜주면 X도 하겠다" 전두환에게 충성‥훈장까지 받아

 

[주말연재] [박지원x-파일] 김정일에게 8억달러 갖다바치도록 만든 박지원, 그는 누구인가? (7)

 

 박지원 씨에 대한 기사를 호외로 인쇄한 부천신문(왼쪽)- 박지원이 청와대 대변인으로 입성한 후 정치보복 세무사찰과 별도조사 등에 나선 사실을 보도한 부천신문 기사(오른쪽)

 

미국으로 간 박지원은 가발 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다 임기를 마치고 개인 가발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상당한 재력을 모았다. 그때부터 정치 지망생이 되어 서울에서 뉴욕에 오는 한국 정치인들을 따라다니며 얼굴 익히기에 분주했다.

 

그러면서 호남 이민자들이 많은 이점을 이용 뉴욕 한인회 회장에 출마 당선이 됐다. 그런 시기에 1980년 5.17 광주 사태가 발생하고 전두환이 새로운 한국의 강자로 등장하자 KBS-TV 인터뷰를 통해 “한국에는 전두환 장군 같은 결단의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12.12와 5.18은 영웅적인 결단 이었다. 광주 진압 작전은 정당한 행사였다”고 극구 찬양 발언을 했다고 유인물은 기록했다.

 

그러다가 1981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키 위해 LA에 도착했는데 호남 향우회 사람들이 관을 메고 전두환 미국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 전두환 일행은 무척 당황했다.

 

다음 방문지는 뉴욕 이었다. 류병현 한국대사와 전경환이 무척 걱정해 칼럼자가 전경환에게 “박지원 한인회장을 설득하라”는 아이디어를 주었으며 당시 뉴욕 총영사 김세원의 소개로 전경환이 박지원을 만났다.

 

전두환 대통령 뉴욕 방문 환영 위원장을 맡은 박지원의 협조로 전두환 대통령의 뉴욕 방문은 큰 반대 데모 없이 잘 치러졌으며 그 공로로 박지원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국민 훈장 동백장을 받는다.

 

또 민정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하고자 노력 하다가 집안 식구 4명이 극력한 공산주의자들 이라는 기록 때문에 좌절당했다. 1981년 12월 김대중의 미국 망명 후 김경재의 소개로 워싱턴을 방문 김대중을 만나 매월 생활비를 제공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김대중이 한국으로 귀국 할 때 함께 귀국 평민당에 입당하며 야당의 대변인이 됐다.

 

봉투에 큰 액수 5개 넣어 2번째 매수하려는 것 뿌리쳐

 

1996년부터 칼럼자가 발행하는 INSIDE THE WORLD 주간지에 ‘김대중 X-파일’을 연재하기 시작하자 97년 5월 봉투에 ‘큰 것 5장’을 넣어 어느 날 밤 편집국을 방문 편집부장에게 맡겨 놓고 간 것을 새벽에 돌려보냈다.

 

 미주 선테이타임스에 본 기사가 연재되자 기사 중지를 요구하는 협박편지가 배달됐다.

 

그 다음날 고종사촌 형인 조우승 박사 병원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현장에 갔더니 박지원이 ‘큰 것 다섯장’이 든 봉투를 다시 꺼냈다. 그래서 그 자리에 화를 내며 물리쳤다. 그는 몹시 서운해 하면서 헤어졌다.

 

20여분 후 조박사가 “주간지 경영이 어려운데 받아쓰지 그랬어 특별히 큰 것 다섯장이라는 거금이라고 했는데....” 하면서 몹시 아쉬워했다. 칼럼자는 그 봉투에 얼마나 큰 액수가 들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박지원이 형에게 “큰 것 다섯장 인데 이런 촌지는 준적이 없다. 총재께서 손사장에게는 큰 호감을 갖고 전해 달라고 했는데”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98년 2월 청와대 대변인으로 입성한 박지원이 형에게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조박사는 “잘 해야 한다. 정권이 끝난 후에라도 감옥에 가지 않고 청문회에 불려 나가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하라”고 충고 했다.

 

그때 박지원이 “형님 요즈음도 손충무 사장을 자주 만납니까? 하고 물으며 ”이제 만나지 마십시오. 우리가 손을 봐 줄 것입니다. 이번에는 빠져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야당 대변인5년 하면서 한국 언론계에 내 돈 안 먹은 놈 없는데 손충무 한테 만 무시를 당했습니다“하고 말 하더라는 것이다.

 

박지원으로 부터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박사가 평소 골프를 함께 치는 A박사 J대사와 본사 취재부 차장이 함께 있는 장소에서 들려 준 이야기다.

 

98년 4월 초 박지원이 조박사의 한의원에 찾아와서 정력제 보약을 제조해 달라고 하면서 “지금도 손충무 치료 받으러 옵니까? 며칠 내에 언론에 크게 보도 될 것입니다”하고 말해 주었다.

 

98년 5월 중순 김대중 이희호 여사가 선거 때 마다 많은 도움을 받은 김해김씨 종친회 간부 K회장 일행이 D.J 부부의 점심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 했을 때 평소 K회장과 칼럼자의 관계를 알고 있는 박지원이 K회장에게 “각하께 손충무사장 이야기는 꺼내지 마십시오. 단단히 손을 봐주기로 결정됐습니다” 하고 말했음을 K회장이 3명의 증언들이 있는 가운데 들려 주었다.

 

그 말이 있은 2주후인 6월 1일 긴급 구속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이 문명자를 내세워 모의하고 꾸민 음모는 증인들의 증언으로 허위로 밝혀져 무죄가 선고 됐는데도 대한민국 밖에 없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2년간 징역살이를 시켰다.

 

2년만에 감옥에서 나와 조박사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조박사는 “박지원이 저놈 분명히 감옥에 갈 것이며 청문회에 불려 나갈 것이다”하면서 몇 개월에 걸쳐 박지원의 부정부패 사실과 그의 행동에 대해 증언 해 주어 지금 칼럼자의 취재 노트 2권이 빽빽하게 차있다.

 

박지원의 고종 사촌 형 조우승박사의 예언대로 박지원은 청와대 대변인 시절 친지의 은행 부정 대출 사건에 압력을 넣어 거액의 대출을 받도록 해준 사건 때문에 청문회에 불려 나갔다.

 

은행 부정 대출 사건의 압력 사건 수사는 전라도 검사들이 알아서 적당히 수사하였기 때문에 박지원은 무사히 빠져 나갔다. 그러나 판사는 다른 관련자들의 판결을 통해 “박지원의 부당 압력 사실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런데도 검찰 수사에서 제외된 것은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한국 재판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판사는 판결로써만 이야기 하도록 되어있다. 그런데도 재판관이 검찰이 기소 조차 하지 않은 사람을 향해 판결문 속에 “검찰이 박지원을 기소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며 기소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결문 속에 남겼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 후부터 박지원은 김대중에게 매월 생활비를 제공 했으며 오늘날의 박지원을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김경재 의원은 누구 보다 앞장서 박지원을 비난하며 퇴진 운동에 열심 이었다.

 

 박지원 씨

 

김의원은 “내 평생 가장 큰 실수는 박지원을 DJ에게 추천 한 것이다. 박지원이 때문에 김대중 정권이 궁지에 빠졌으며 국민들이 민주당에 등을 돌리게 됐다”고 후회 하고 있다.

 

지난 2000년 가을 조우승 박사가 서울중앙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운명 3일전 박지원부부가 병실을 방문 했는데 그때 조 박사가 박지원에게 “동생이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정권이 끝나면 반드시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서운하게 만든 사람들을 찾아서 사과를 하고 정치 사건은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 과거의 전경환이 장세동이 김현철이를 봐라..............지금은 자네들 세상이어서 앞에서 절절 매는 것처럼 하지만 끝나면 언제 보았느냐 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조박사는 박지원 부부 뿐만 아니라 부인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손충무 사장 지금 미국 병원에서 치료 받고 있다. 그 사람은 역대 정권이 건드리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동생이 들어서 사건을 조작하고 검찰에 지시한 것 손사장이 모두 알고 있더라. 손사장이 아우 비밀을 몰라서 가만히 있은 것이 아니라 나하고 (조박사는 기자의 과거 15년 동안 담당 주치 의사였다)관계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하고 말해 주었다.

 

그런 사실은 조박사가 워싱턴 병원으로 국제 전화를 걸어서 직접 들려준 이야기였다. 이 말을 알려 준 조박사는 3일 후에 운명했으며 급히 달려갔으나 이미 장례식이 끝난 후였다. (끝)

 

손충무 –국제저널리스트.www.usinsideworld.com- 편집인 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