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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에게 8억달러 갖다바치도록 만든 박지원, 그는 누구인가? (6)

풍월 사선암 2010. 9. 15. 19:11

박지원 삼촌·고모, 마을사람들에게 맞아 죽어

 

[박지원x-파일] 6.25 전쟁때 붉은 완장 차고 북한에 협력, 주민들 분노..

[주말연재] 김정일에게 8억달러 갖다바치도록 만든 박지원, 그는 누구인가? (6)

 

항일 애국 독립 운동가였던 아버지가 공산당으로 변신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아버지 큰 아버지까지 경찰의 추격 끝에 총격전을 벌이다가 사살당함으로써 박지원 집안은 하루 밤 사이에 커다란 비극을 맞게됐으며 마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남해 바다의 끝 섬, 인구 1만 명 내외의 작은 진도라는 섬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비극과 충격의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진도 섬에는 밀양 박씨 집안과 창녕 조씨 집안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어내기도 했다고 한다.

 

박지원 씨 집안과 창녕 조씨 집안은 고종사촌 간 이었으며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박씨 집안이 활개를 펴고 살았으나 해방과 함께 박씨 집안이 공산당에 연좌되고 박지원 아버지 큰아버지가 다른 공산당 관련자들과 총살당하자 섬마을 사람들로부터 박씨 집안이 기피당하는 집안으로 변했다.

 

그대신 창녕 조씨 집안이 지주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힘으로 발전해 나가는 사이 6.25라는 민족 비극의 전쟁을 김일성이 일으킨다. 그로인해 박지원 집안은 또한번 사상의 혼란을 겪으며 박지원의 삼촌과 고모가 마을주민들에게 맞아 죽는 참담한 비극을 되풀이한다.

 

‘국민회의 대변인 박지원의 정체’ 유인물에는 4번째 항목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 1950. 9. 28 수복 후 박지원의 삼촌, 고모 등이 인민군 치하 때 공산주의자로 변신하여 활동하며 면민(마을사람들)들을 돕는 의용군으로 가혹하게 징용한 사실에 분개한 군민들에 의해 맞아 죽음.

 

♦ 이런 모든 사실을 숨기기 위해 호적 등 관계서류를 파기, 변조하고 1992년 2월 20일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음.

 

이런 사실에 대해 진도 섬에서 오래동안 살면서 박지원의 집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진도군 국가무공수훈자(국가로부터 각종 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 단체) 회장 최기남 씨는 “그것은 사실이다”고 증언했다.

 

한편 취재기자들이 확인한 사실에 의하면 박지원 집안의 호적은 상당히 복잡하게 되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삼촌과 큰아버지 집안의 호적은 ‘멸실우려 복제’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 말은 한동안 호적이 없어졌거나 분실되어 새로 제작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최기남 씨와 박지원의 고종사촌 형인 조우승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유인물 속의 내용이 거의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박지원 집안 6.25때 북한에 협조, 마을사람들 북한 의용군에 차출

 

박지원의 아버지 박종식, 큰아버지 박종극 씨가 공산당에 가입, 활동하다가 미 군정청과 대한민국 정부가 남로당(남쪽 공산당)을 불법 정치단체로 규정, 전국적인 색출 작업에 나서자 북한 김일성은 남쪽 공산당 지도부인 박헌영에게 전국적인 파업을 하도록 지시해 1948년 10월 3일 대구 폭동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인 박상희는(김종필 자민련 총재 장인) 남로당 경북도당 구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박상희는 남로당 조직 부장인 황태성, 자금부장인 김성곤(쌍용 창립자)등과 대구폭동 사건을 지휘하다가 경찰에 쫓겨 구미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총살당됐다.

 

황태성은 북한으로 탈출, 북한에서 상공부 차관까지 지내다가 1960년 박정희 김종필이 주도한 5.16 군사 쿠테타가 성공하자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서울에 잠입, 박정희 김종필을 만나려고 했으나 가짜 김종필만 만난 후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대구 폭동 사건 이후 북한은 군부에 있는 친 북한 스파이들을 통해 내부 반란을 일으키도록 지시해 당시 한국군 안에서 공산당 군부 책임자로 있었던 박정희 소령과 공산당 세포 조직들이 전남 여수 - 순천에서 군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 박지원을 어릴때 부터 키운 고종사촌 조우승 박사가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

 

여수 - 순천에서 발생한 반란 사건이라고 하여서 역사 속에는 ‘여순 반란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반란 사건의 주모자였던 박정희는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군 선배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전향하였으며 공산당 세포조직 명단을 대한민국에 넘겨주고 살아남는다.

 

그러다가 6.25 전쟁 때 소령으로 복귀하여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하며 전선에 나가 북한 인민군과 싸우며 국민으로서 임무를 다한다. 그런데 박지원이에게 장관자리까지 만들어 주고 박지원의 정치 대부인 김대중 씨는 해방 후 공산당에 가입하여 김일성을 찬양하다가 몇 차례 체포당하는 일까지 있었는데도 이날 현재까지 공산당을 탈퇴, 전향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는 김대중을 “전향하지 않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여수 - 순천 반란 사건이 국군과 경찰의 반격 작전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반란에 참가했던 공산주의자들은 국군과 경찰에 쫓겨 전남 백운산과 전남과 경남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 지리산으로 도망, 6.25 전쟁이 날 때까지 투쟁하며 버틴다.

 

한편 여수 순천 인근지역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소탕작전이 벌어지자 박지원의 아버지 큰 아버지도 진도 섬을 떠나 백운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생활을 하다가 굶주림에 못이겨 진도 고향으로 숨어들다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그로부터 2년 후 6.25 민족 비극의 전쟁이 발생, 3일 만에 서울이 북한 인민군의 손에 함락당하고 이승만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한다. 그런데 서울을 점령한 북한 군대가 대전 광주를 거쳐 목포까지 가는 데는 10일 이상의 시간이 걸렸는데도 이미 호남 지방과 경남의 하동 남해 거창 함안 등지에는 지리산과 백운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이 먼저 산을 내려와 6월 28일부터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며 북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국군과 경찰 공무원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총살하는 살인 광란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시기 박지원의 삼촌과 고모는 오랫동안 참았던 대한민국에 대한 적개심이 부풀어 올랐던 것은 인간이므로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어찌됐던 두 사람은 북한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팔목에 붉은 완장을 찼다.

 

그리고 두 형님과 오빠가 죽은 원한이 복수심으로 변해 불타고 있었으며 원수를 갚아야 하는 일념으로 변한다. 진도를 점령한 인민군의 앞에 서서 진도 면민들을 찾아다니며 북한 의용군으로 징발할 수 있도록 많은 정보를 북한군과 내무서(북한 경찰서)에 넘겨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상당한 원성을 사고 있었는데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한이 패망 도망하자 박지원의 삼촌과 고모도 인민군을 따라 섬을 빠져 도망가다가 진도 마을사람들 추적에 잡히고 만다.

 

흥분한 마을사람들은 두 사람을 잡아 2일 동안 돌로 때리고 몽둥이로 쳐 죽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박지원 아버지 형제들 4명이 비극의 전쟁 소용돌이 속에 희생당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된 것이다.

 

고종사촌 형 도움 받으며 성장, 미국 갈 때 연좌죄에 걸려 고통받아

 

중학생 시절 고종사촌 집안의 불행을 목격한 사촌형 조우승 씨는 뭍으로 나가 목포와 광주에서 공부하다 한의사가 되겠다고 결심, 절에 들어가 유명한 고승들로부터 한의학 처방과 침을 놓는 침술을 배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유명한 사찰을 돌면서 훌륭한 스님들로부터 배운 한방치료법과 침술을 배운 조우승은 광주에서 조우승 한방 의원을 차린다. 그의 한방 의술과 침술이 호남 일대에 알려지면서 크게 성공하자 당시 목포에서 중학생이던 박지원 형제에게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면서 돕는다.

 

광주 한방 의원을 경영하던 그는 정부 고위층 인사들과 자주 어울리는 기회가 있어 서울로 기반을 옮긴다. 그리고 당시 실력자들인 권오병 문교부장관, 김용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정보부장, 이후락 비서실장과 가까이 지내면서 박정의 대통령에게 필요한 한약도 제조해 청와대로 보냈다.

 

그래서 조우승 씨는 한의사 협회 회장 직을 지내기도 하며 경희대학교 한방의과 대학 창설 멤버가 되기도 한다. 박지원이 군대를 마치고 가발회사에 취직하여 미국 지사에 지사원으로 나가도록 되었으나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다. 아버지, 큰아버지, 삼촌, 고모가 공산당 활동가로 총살당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신원조회에서 연좌제 문제가 등장한 까닭이다.

 

그런 사실을 전해들은 조 박사가 김용순 장군(전 정보부장) 권오병 장관, 김보근 정보부 감찰실장 등에게 부탁하여 보증인 서류를 받아 미국에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당시 연좌제에 걸린 사람은 공무원 이사관급 3명 혹은 국회의원 3명, 군인의 경우 대령급 이상3명이 보증을 서면 여권발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박지원 아버지 독립유공자 표창 YS 정권이 박지원 입 막으려고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빨치산이 되어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던 공비가 독립유공자로 둔갑, 정부가 지난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자 당시 여당과 언론들이 문제를 삼고 나왔다.

 

여당 의원들과 언론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박지원 당시 국민회의 대변인은 “우리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다”고만 말했을 뿐 아버지 큰아버지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공산주의자였으며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총살당했다는 소리는 빼 먹었다.

 

 박지원 씨 아버지가 훈장 받은 사실을 비판한 한국논단 기사

 

그러자 월간잡지 한국논단은 96년 3월호를 통해 “공비 박종식에게도 독립유공자 표창”이라고 신랄하게 김영삼 문민정부의 독립유공자 선정기준을 비판했다.

 

“어떠한 나라, 어떤 국가이던 간에 그 나라가 존재한 이상 그 나라를 세운 공로가 있는 분들에게 서훈하는 것은 국가로 존재하기 위해 정당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유공자 표창은 ‘국가유공자에 대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수여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한 남로당 공산주의자 공비에게까지 독립유공 표창을 한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박종식은 1929년 광주 학생사건 때 목포에서 시위에 가담 6개월 징역을 살고나와 일제 말기에 고향 진도에서 면화수집 책임자로 친일부역을 하다가 해방 후 남로당에 가입, 진도 군책으로 활동하다 48년 경찰 토벌대에 사살되었다. 이런 자들을 독립유공자로 선정 건국 표창을 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으며 문민정부의 사상적 배경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한 때 정부에서는 박종식에 대한 건국 표창을 취소하려 했었다. 그러나 YS가 말려서 그대로 넘어갔는데 당시 청와대의 YS 측근들은 야당 대변인인 박지원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뜻에서 덮어두기로 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