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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에게 8억달러 갖다바치도록 만든 박지원, 그는 누구인가? (3)

풍월 사선암 2010. 9. 15. 18:54

박지원 부인, 최정민씨 관계 알고 자살 기도

 

[박지원x-파일] YS 정권때 안기부 박지원-최정민 관계 비밀조사..

[주말연재] 김정일에게 8억달러 갖다바치도록 만든 박지원, 그는 누구인가? (3)

 

김대중 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하다 결국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도록 만들어 김대중 정권과 민주당을 궁지에 빠지도록 만든 원인제공자 3명 가운데 한명인 박지원 씨(전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비서관)의 숨겨놓은 애인 영화배우 최정민 씨는 박지원 씨에게 두 번 배신을 당한 후 샌프란시스코에 살다가 마음을 정리 88년 뉴욕으로 다시 옮겼다.

 

최 여인은 뉴욕에서 스타까페라는 술집을 차렸다. 최 여인이 쓴 진정서 끝부분을 다시 한번 보자.

 

“못난 저는 그가(박지원) 매일매일 찾아 올 것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며 차 사고를 내는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그를 기다렸지만 매정하게 버림을 받고 저는 세월이 흘러 88년 경에 뉴욕으로 가서 까페를 경영했을 때 그가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하고 끝을 맺고 있다.

 

그러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가? 박지원과 최 여인의 만남은 다시 시작됐던 것이다. 그리고 1992년 한국 대통령선거 때 박지원은 서울에 머물고 있는 최정민 씨를 밤에 찾아가서 밖으로 불러내어 자동차 안에서 car sex를 즐긴 후 한참동안 만남이 반복됐다고 한다.

 

그 당시 박지원 씨는 국민회의 대변인이며 비례대표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고 있었다. 최 여인이 자동차 안에서 박지원에게 저항하다가 반강제로 sex를 당한 후 울먹이며 “금배지를 달고 이게 무슨 짓이에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하고 거칠게 항의하자 박지원 의원님(?)께서는 “So What...." 하면서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박지원이 꿈속에서 그리던 금배지를 가슴에 달게 되었고 야당 대변인으로 매일 한 두 번씩 TV에 그의 얼굴이 나오고 신문에 사진이 자주 등장할 때였다.

 

거기다가 야당총재인 김대중이 박지원을 가리켜 “갯벌에서 흙진주를 건진 것이다”라고 박지원을 칭찬하고 있을 때였다. 이 말은 김대중 총재가 당시 기자에게 직접 들려준 말이다.

 

또 박지원은 그 소리를 자랑삼아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한국 언론인 치고 박지원이 돈 안 먹은 놈 있으면 손들어 보라고 해” 할 정도로 박지원은 언론계에 소위 촌지라는 돈봉투를 돌리고 다녔다.

 

박지원이 야당 대변인 시절 김대중 총재는 매월 언론 대책비로 3000만원을 별도로 지급하고 있었다. 이 액수도 DJ가 직접 기자에게 해준 이야기며 박지원도 칼럼자와 사이가 좋을 때 “총재께서 매월 별도 언론 대책비를 3천만원씩 주는데 부족하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얻어쓰기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밝히고 넘어 가야 하겠다. 한국 언론계에 박지원이 돈 안 먹은 놈 있으면 손 들어보라고 해... 하는 말이 있는데 불행히도 기자는 박지원의 돈을 받은 적이 없다. 지난 97년 김대중 x-파일을 연재할 때 박지원이 큰 것 5개가 든 봉투를 한 밤중에 편집국 부장에게 맡겨 놓은 것을 새벽에 돌려보냈으며 다음날 박지원의 형님 병원에서 만났을 때 다시 주는 것을 뿌리쳤던 일이 있다. 후에 당시의 스토리가 나옴)

 

그러니까 아직도 한국 언론계에 박지원의 돈을 안 먹은 언론인 몇 명은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런데 선데이타임스 2001년 11월 9일자 특파원리포트 “퇴근길 한잔하는 술집에 택시 노-소리가 들리고” 하는 기사는 박지원과 한국 언론계의 관계 내막을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기사여서 눈길을 끌었다.

 

한국 언론들 박지원 씨에게 불리한 기사 보도 못하는 배경

 

이 기사는 선데이타임스 최초 발행인 서울지사장 김순복, 사이먼-최 특파원 등 3명이 서울에서 공동 이름으로 송고해온 기사로 오늘의 한국 언론이 어떤 상황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한국 언론들 가운데 조선, 동아, 중앙일보 등 3개 신문을 제외한 다른 신문 TV 방송들은 박지원 김홍일 권노갑 씨 이름을 보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박지원 수석을 비판하는 기사는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인들은 한국 언론계에서 박지원이 돈을 안 먹은 언론인들은 드물 것이다. 박지원의 돈을 받지 않고 비판한 언론인들은 언론계를 떠나거나 또다른 올가미 죄 혐의로 감옥에 갔다”고 보도했다.

 

최정민 여인을 자동차 안에서 마음껏 야욕을 채우고 즐길 때 박지원은 당시 YS의 재정담당인 청와대 홍인길 총무수석 비서관으로부터 매월 2천만원 정도의 돈을 받고 있었다.

 

이 증언은 홍인길 씨가 기자에게 박지원에 대한 부정사실을 들려주면서 한 증언이다. 야당총재인 DJ로부터 “갯벌에서 찾아낸 흙진주”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애를 받고 언론인들로부터는 촌지를 주는 유능한 사람으로 청와대 총무수석으로부터 매월 자금을 공급 받는 정도이니 박지원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을 것이며 하늘이 높은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10여년 이상 동거하다가 헤어진 여인을 다시 찾아내 몇 번 정도 즐기는 것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최 여인이 그날 밤 자동차 안 sex사건으로 정신적인 쇼크를 받아 병원에 입원하게 됐으며 오랫동안 병원에 있어도 차도가 없어 퇴원한 그녀는 가족들의 권유로 신앙생활에 몰두하여 서울 강남 모 교회에서 착실한 기독교 교인으로 변신한다.

 

교회에서 집사 안수까지 받았는데, 교회 중요 직분을 가진 간부 가운데 어떤 사람이 최 여인의 정신적인 고통의 불행이 박지원으로부터 생긴 사실을 들고 그 사실을 당시 안기부(현재 국가 정보원)간부직에 있는 친척에게 이야기함으로써 비밀조사가 진행됐다.

 

박지원이 그런 사실을 알았는지? 알지 못했는지는 알수 없다. 어찌됐든 4년 후인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소사 선거구에 뿌려진 3종류의 유인물 가운데 최 여인이 보낸 것 외에 또 다른 두 가지 유인물이 있는데 두 유인물 속에 최 여인과의 관계가 자세하게 폭로되어 있다.

 

국민회의 대변인 박지원의 정체 여성 편력2, 여성 편력3 스토리

 

5.18 광주민주의거동지회, 재미 한인교포연합회 이름으로 인쇄된 여성편력 2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스토리가 인쇄되어 있다.

 

 박지원의 정체를 파헤친 진정서 형식의 투서(선거 때 박지원의 지역구 경기도 부천에 수만장이 뿌려져 선거에 졌다.(왼쪽)/ 뉴욕 교포들이 증언서를 만들어 박지원 지역구에 뿌리기도 했다.

 

- 1971년 결혼한 현부인 이 모 씨와의(1943년 10월 생) 사이에는 1983년에 첫딸을 광주 제일 병원에서 출산하였다고 하고 이어서 1986년에 둘째딸 역시 광주 제일병원에서 출산하였다고 호적에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 아래 부분은 딸들의 장래를 위해 밝히지 않음)

 

- 미국 이민 중 TV 탤런트 최정민과 동거하다가 헤어질 것을 요구하였으나 최정민이 불응하자 박지원은 깡패를 동원하여 의식불명이 되도록 폭행한 사실이 교포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음.

 

-탤런트 최정민은 박지원이 국회의원이 되어 여론에 민감한 것을 감지하고 1995년 입국하여 동거사실과 폭행사건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여 3억원을 받은 후 타협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함.

 

- 뉴욕의 교포 야채 도매상인인 모 여인과 동거하면서 많은 금품을 가로채 전국구 공천 헌금으로 유용하여 현재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음. 한편 “박지원에 대한 재미 한인교포의 증언”이라는 유인물 여성편력 3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글이 폭로 되어 있다.

 

- 최정민과는 78년부터 동거를 시작해 88년까지 동거함. 박지원 부인 이모 여인이 전남여고 동문회에서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는 말을 자주 하고 다녔다고 함.

 

- 79년 최정민에게 뉴욕 중심 59, 1st Avenue에 <최정민 꽃집을 내 주었음> (이 꽃집은 최정민과 헤어진 후 박지원의 친형 박상원 꽃집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되었음) 또한 이 유인물에는 “매춘업의 포주가 장수 제 1 야당 대변인” 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