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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학생들의 박정희 예찬(禮讚)

풍월 사선암 2010. 8. 26. 09:15

일본 대학생들의 박정희 예찬(禮讚)


그들은 박정희의 가장 큰 장점을 청렴함이라고 했다.

日학생들 "박정희를 부정하면 마치 민주화 세대인 것처럼 자부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도 민주주의를 모르는 나라"

장진성 

 

도쿄 신주쿠에 있는 대한민국 음식점에서 어제 밤 일본 대학생들과 장시간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물론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말을 잘하는 그들 때문에 우리는 서로 교감할 수 있었다. 국제외교정치를 전공하는 그들은 연세대와 고려대 유학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이 해안포를 발사하면 그 소리가 대한민국에서보다 더 크게 들리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그만큼 안정된 질서와 기나긴 평화에 체질화 된 일본인들이어선지 분단 상황이면서도 드라마틱한 이웃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컸다.

 

나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랍게도 일제히 박정희! 라고 합창했다. 대한민국 대학생들에게서도 잘 듣지 못한 말을 일본 대학생들에게 듣는 순간 전율 같은 감동이 솟구쳤다. 아니 그들은 나보다도 박정희 대통령을 더 존경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우선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장점을 청렴함이라고 했다. 미리 준비하고 서거한 것도 아닌데, 총에 맞아 급사했는데도 자기와 가족을 위한 비자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에 일본이 3억 달러를 원조했을 때도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 대통령들 같은 경우 그 돈을 횡령하여 혼자만 부자가 된 반면, 박대통령은 고스란히 국민을 위한 경제개발에 돌렸다는 것이다.

 

나는 어설픈 상식으로 김일성은 세습권력을 위한 독재를 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위한 독재를 했다며 분단시대의 두 長期(장기) 체제를 비교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선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일본 대학생들은 개발독선(獨善)이라고 했다. 박대통령이 비록 밀어붙였지만 결국은 옳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그때 고속도로를 반대했던 이른바 민주투사들이란 사람들이 과연 역사 앞에 진실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전기를 아끼느라 청와대 에어컨을 끄고 파리채를 들었던 사실이며 서거 당시 착용했던 낡은 벨트와 구두, 화장실 변기에 사용했던 벽돌까지 그들은 박대통령 일화를 참으로 많이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는가 물었더니 박대통령을 연구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조갑제닷컴'에서 출판한 박정희전기를 모두 읽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우리 대한민국 대학생들 중 13권에 이르는 그 방대한 전기를 끝까지 읽은 학생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 하고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 덕에 살면서도 그 위업을 경시하는 한국의 현대사를 편향된 일방적 민주주의라고 규정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솔직! 한 역사인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국은 민주화의 역사만을 정당화한다고 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한강에는 그 상징물이 없는 나라이다.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이 바! 역사정립이고 후대의 예의가 아니겠냐며 대한민국은 일본의 과거를 자꾸 문제 삼는데 우선 저들의 현재부터 바로 세우라고 비판했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 같은 인물이 먼 옛날이 아니라 우리 부모세대에 일! 본을 구원했다면 자기들은 우리의 가까운 역사로 자부심을 가지겠지만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며 매우 이상해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에 있을 당시 대한민국 대학생들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논쟁했던 이야기를 했다.

 

대한민국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일 뿐이고 왜 독재를 하게 됐는지, 그 결과가 과연 비참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분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치 그들의 주장은 논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고의 형식과 틀에 의존한 교과서 같았다. 박정희를 부정하면 마치 민주화 세대인 것처럼 자부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도 민주주의를 모르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광우병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웃음으로 비판했다. 이념이나 국민건강문제에 대한 우려를 떠나 시위자들의 사회적응 심리부터가 잘 못됐다는 것이다. 일본은 어디 가나 스미마셍으로 통한다. 남에게 불편을 줄 때는 물론 부를 때도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 그래서 미안하지 않기 위해 거리에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공동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며 자기 집 앞은 깨끗이 청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잦은 시위들을 보면 남들에게 불편을 끼쳐서라도 자기들의 뜻을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잘못된 국민정서의 결정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용인되는 사회. 아니 법치에 도전해도 된다는 시민의식이 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후진성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일본의 한류열풍에 대한 이야기로 즐겁게 술잔을 나누었다.

 

나는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할 줄 아는 일본 대학생들을 위해 오늘 밥값은 내가 내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더치페이가 민주주의라며 각자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감사함을 무엇으로든 표현하고 싶어 2차 노래방 값은 그들 몰래 내가 계산했다.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평가

 

박정희(朴正熙)는 祖國近代化에 확고한 哲學과 遠大한 비전을 바탕으로 時宜適切한 制度的 改革을 단행했다. 매우 創意的이며 能率的이었다. - 카터 에커트 / 하버드대학 교수 -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중국의 덩 샤오핑,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  - 리 콴유 / 싱가포르 수상 -

 

세계 最貧國의 하나였던 한국이 박정희의『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불과 20년 만에 世界的인 貿易國家가 되었음을 경이롭게 본다.  - 폴 케네디 / 예일대학 교수 -

 

박정희의 역사적 큰 공헌은 그의 뛰어난 指導力하에 한국을 低開發의 農業國家에서 高度로 成長한 工業國家로 변모시킨 것이다.  - 앰스덴 / MIT정치경제학 교수 -

 

박정희 政權 18년 동안의 目標는 自立經濟力을 갖춘 現代國家의 建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目標를 成功的으로 達成했다.

- 맨스로프 / 러시아 안보연구소 교수 -

 

중국의 덩 샤오핑 등은 세계 유례없는 한국의 연 10% 急成長, 經濟浮上에 놀라며『박정희식 經濟開發』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 마홍 / 중화인민공화국 정책과학연구회장 -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部)를 증진시킨 훌륭한 지도자이다"

- 말레이시아 전 총리 마하티르 -

 

중국의 덩 샤오핑의 개혁은 박정희 모델 모방

- 美, RAND 연구소 -

 

"每 會議마다 우리 農村과 國土에 가졌던 뜨거운 愛情, 貧困했던 우리 歷史에 대한 恨에 가까운 처절(凄切)한 心情, 그리고 貧困을 극복(克服)하여 經濟大國을 이룩하려는 치열(熾烈)한 執念에 숙연(肅然)해지곤 했다"

- 고건(高建), 2006년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 - 

 

"그는 진정으로 국력을 키웠다. 그는 다른 후진국 지도자와 달리 부패하지도 않았다.1970년대는 박정희가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국가 기간산업을 이뤄냈다. 1980년대도 박정희의 성공이 이어지는 시기였다."  - 美, 브루스 커밍스 교수 -

 

요즘은 박정희 대통령이 좋게 인식되는 것 같은데, 옛날에는 유신이니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초기 새마을 운동을 한 덕택에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었던 점은 훌륭한 점입니다. 나도 영화를 통해 서울을 보았는데, 서울은 일본의 도쿄보다 훌륭한 도시로 조선이 자랑할 만한 세계의 도시입니다. 서울에 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도 참배하고 싶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 김정일, 1999년, 현대 고 정주영 회장과의 대화중 - 

 

대통령 박정희(1961∼79)는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국가에서 산업 능력을 가진 국가로 형성했다."

- 독일, 국정 교과서 -

 

" 한국경제의 건축가! "

- 美, 뉴욕타임스 -

 

"어렵던 시절, 한국을 이끌어 고도로 공업화된 민주국가로 변화시킨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후임 대통령들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유산을 남긴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

 

"박정희 같은 지도자는 내가 일찌기 본 적이 없었다"

- 린든 존슨 미 대통령 -

 

"박정희가 있었기에 한국은 공산권의 마지노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 아이젠 하워 미 대통령 -

 

"박정희는 적어도 한국에서 가장 작으며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 허버트 험프리 미 부통령 -

 

"박정희의 經濟開發 政策은 中國 經濟開發의 훌륭한 모델이었다"

- 원자바오 중국 총리 -

 

"박정희의 죽음은 한국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다"

- 다나카 일본 수상 -

 

"박정희는 필리핀에 충분한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다"

-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

 

"박정희로 인해서 소련의 남한 공산통일의 기틀이 좌절되었다"

- 제임스 캘러핸 영국 수상 -

 

"동남아국가들은 70년대 한국을 거울로 삼아 경제개발을 해야할 것이다"

- 리 콴유 싱가포르 총리 -

 

"박정희의 업적은 동남아와 전세계 빈곤국들에게 한가지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오히라 일본 총리 -

 

한국의 박정희는 번영(prosperity)의 기초를 놓았지만 베트남의 호치민은 빈곤(poverty)의 기초를 쌓았다."

- 껑투웬(Cuong Tu Nguyen),베트남출신 美 조지 메이슨 대학교 종교학 교수 -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책을 모두 가져와라"

- 푸틴, 러시아 대통령 -

   


 

나는 "朴正熙" 란 이름 석자로 족하다 號도, 명예박사도 거부했던 그는 권력을 빙자한 군림(君臨)을 증오한 이였다.

趙甲濟

 

朴正熙 정부의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金聖鎭씨에 따르면 故박 전 대통령은 號(호)가 없었다고 한다.

 

고령 朴씨 문중에서 호를 지어 올린 적이 있는데, 이 보고를 받은 朴 대통령은 "박정희란 이름 석 자로 충분! 하다"고 金 당시 대변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朴 대통령은 호를 쓴 적이 없다.

 

한 보좌관이 모 외국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니 朴 대통령은 "박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18년간 재임했으나, 그 흔한 명예박사 학위가 하나도 없다.

朴 대통령은 私信을 쓸 때는 절대로 '大統領 朴正熙'라고 하지 않았다.'朴正熙 拜'라고만 했다.

 

朴 대통령은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도 무심했다. 그의 생일은 호적에 잘못 적힌대로 알려져 한동안 생일이 아닌 날에 장관들이 축하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한동안 이를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호, 명예박사, 생일, 직함 등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던 朴 대통령은 권위적인 것들을 생리적으로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도한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로 불린다. 그는 특히 권력을 빙자한 군림을 증오했다. 그는 허례허식도 싫어했다.

 

항상 淸貧한 마음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한 분이었다. 그가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벗겨진 넥타이핀을 꽂고, 헤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屍身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 박정희의 자연스런 眞面目이었다.

 

돈을 드리고 노벨평화상을 탄 김대중. 1억원이 넘는 시계를 선물로 받고 수사대상이 되니 집 근처에 버렸다는 노무현,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경부고속도로 40년 - 미래로 가는 네트워크

 

멀리 길게 본 박정희 리더십 … 산업화 20~30년 앞당겼다.

 

박정희 “경제 핏줄 만들어야" "부자 도로" 반대 뚫고 강행한국 넘어 일본~유럽을 잇는 아시안 하이웨이로 도약

"FTA . 녹색성장도 미래 경부고속도로 될 것" 

'아시안 하이웨이 AH1일본, 한국, 중국, 인도, 터키’.

 

◀ 산업화의 동맥이었던 경부고속도로가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뻗어 나가 21세기형 세계 네트워크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1970년 개통 당시의 서울 톨게이트. 8차로는 현재 32차로가 됐고 주변 논밭은 분당신도시와 수지지구로 변했다. [중앙포토]

 

경부고속도로 서울 영업소(상행선)를 나서면 이런 이정표가 나온다. 일본 도쿄에서 시작해 부산~서울~신의주~중국~인도~이란~터키로 이어지는 1번 아시안 하이웨이(AH)를 가리킨다. AH는 2004년 28개국이 무역과 관광 촉진을 위해 건설에 합의했고 올해 2월 도쿄에서 세부 사항을 논의한다. 한국교통연구원 권영인 선임연구원은 “경부고속도로는 아시안 하이웨이의 한국 출발점으로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올해로 개통 40주년(1970년 7월 7일 개통)을 맞는다. 당시 자본·기술·장비·경험 등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건설돼 산업화를 20, 30년 앞당겼다. 미래를 보는 지도자의 혜안과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내놓자 “차도 없는데 웬 고속도로냐” “일부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 등등 반대가 극심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전무는 “경부고속도로는 그 당시 상황으로는 안 되는 사업이었지만 경제 핏줄을 만들려는 지도자의 결단으로 탄생했다”며 “국가 중대사를 현재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며 50, 100년 후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창의성과 기업가 정신의 결정체였다. 가장 힘든 구간은 충북 옥천의 당재터널. 500여m를 뚫는 데 13차례 낙반사고가 났고 7명이 숨졌다. 지층이 암반이 아니라 절암토사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온 아이디어가 조강시멘트(High Strength Cement). 일반시멘트보다 20배 빨리 굳고 2~3배 강한 고급제품이다.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은 단양 시멘트 공장 라인을 일주일 만에 개조해 조강시멘트를 만들었다. 공영호 전 현대건설 토목담당 부사장(당시 포장과장)은 “정 사장이 ‘주판을 엎어라(손해를 감수하라는 의미)’고 지시해 공기를 맞췄다”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는 미래의 네트워크로 도약을 시작했다. 한국국토연구원 이백진 연구원은 “아시안 하이웨이는 아시아와 유럽 32개국으로 연결돼 세계로 뻗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김호기(사회학과) 교수는 “경부고속도로가 70년대 오프라인 고속도로였다면 21세기에는 유·무선 초고속 인프라, 즉 온라인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득갑 글로벌연구실장은 자유무역협정(FTA)이 ‘미래의 경부고속도로’이며 이의 확대에 전력하자고 제안한다. 김 실장은 “FTA는 세계를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소통하는 인프라”라며 “경부고속도로를 뚫어 놓고 자동차가 늘어났듯이 FTA에 선제적으로 투자하면 무역·서비스·문화 등의 교류가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가 화석연료를 이용한 성장이었다면 앞으로는 녹색성장의 인프라로 변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기후변화학회 김인환 회장은 “정부가 풍력·태양열 등의 신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2030년까지 11%(지금은 2.4%)로 높이기로 목표를 잡았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고속도로(인프라)가 없다”며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제품 가격을 올리고 국민들이 고통을 분담하며 산업구조를 재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식·장정훈 기자

 


 

“박 대통령, 집무실에 지도 붙여놓고 노선 그려

 

”경부고속도로 건설 주역들 모임 ‘77회’ 방동식 회장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경부고속도로 예정지를 순찰하고 있다. [도로공사 제공]

 

경부고속도로 건설 주역들의 모임인 ‘77회’ 회장 방동식(79) 전 도로공사 기술본부장은 “경부고속도로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국민이 하면 된다는 의지 하나만 갖고 이뤄 낸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말했다. ‘77회’는 건설 과정에서 희생된 77명을 기리고 개통일(7월 7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 당시 어떤 일을 했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12월 말 나를 포함한 공병대 장교와 건설부 공무원 등 다섯 명을 청와대로 불러 파견단을 꾸렸다. 박 대통령은 집무실에 75만 분의 1 지도를 붙여 놓고 연필로 노선을 그리고 색칠을 했다. 현지 답사를 해서 공사비를 엄격히 책정하는 게 주 임무였다. 군대에서 산길을 몇 번 깐 경험으로 공사비를 책정하라니 말이 되나. 그만큼 대통령 의지가 강했다.”

 

- 건설 당시 사회적 상황과 관심은.

 

“박 대통령은 ‘공산당을 이기려면 경제 건설밖에 없다. 그러려면 경제의 핏줄인 고속도로가 필요하다’며 독려했다. 국민이 동참해 논 밭을 내놓고 도시 건물을 허물었다. 야당 등 일부에서 반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의미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불굴의 의지가 있어 가능했다. 또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모든 국민이 똘똘 뭉칠 수 있었다. 나라의 동맥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산다. ”

장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