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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 대한민국 대통령의 宗親 그리고 친인척 大解剖

풍월 사선암 2010. 8. 25. 17:55

歷代 대한민국 대통령의 宗親 그리고 친인척 大解剖

 

친인척 관리 스타일 전혀 다른 3인의 군 출신 대통령

 

글·오민수 월간중앙 기자;자료 도움·김두봉 역사연구가(simu@joongang.co.kr;)

 

■ 박정희의 엄격성 : “청와대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

■ 전두환의 의리 : 전씨 一家 비리에 멍든 5공화국

■ 노태우의 계산 : 권력을 공유한 ‘청와대 가족회의’

 

“전라도 고집이 이렇게 센 줄은 몰랐습니다.”(김정일 위원장)

김대중 대통령이 집념을 보인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타결 짓고 난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농담을 툭 던졌다.

 

정상회담 내내 격의 없는 대화로 파격을 선보였던 그다.

“김위원장은 어디 김씨입니까?”(김대중 대통령)

 

김위원장이 “전주 김씨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김대통령 역시 농담으로 맞받아쳤다.

“나는 김해 김씨이니 김위원장이 진짜 전라도 아닌가요.”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이번에는 이희호 여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제가 전주 이씨입니다.”

“아이고, 이거 우리 일가를 만났습니다.”(김위원장). 또 다시 좌중은 웃음바다.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져 있지만, 지금 돌이켜보아도 정겨운 장면이다. 정상들이 만나 성씨(姓氏)를 갖고 이렇게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을 터이다.

 

한민족 현대사 내내 남북이, 동서가 깊은 감정의 골을 쌓아왔지만 ‘성씨’(姓氏)라는 울타리 안에서 남북간·동서간 지역감정의 갈등은 아무 장애 없이 뒤섞였다. 적을 일거에 한식구로 만드는 저력이 성씨에는 있다. 물론 종친끼리 똘똘 뭉쳐 ‘타성’(他姓)을 배척할 때 성씨는 악마의 모습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특히 권력을 종친이나 친인척이 배타적으로 소유할 때 나라 전체에 심각한 후유증을 유발한 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를 간다.’ 집안의 어느 한 사람이 잘 되면 일족이 그 덕을 본다는 뜻이다. 정치권력을 잡았을 때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조선왕조는 왕권(친족)과 처족·외척의 길항(拮抗)작용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비는 모두 44명(27명의 왕에서 왕비 39명이 나왔고,5명은 추존 왕비). 이 중에서 국구(임금의 장인)가 정승이 된 경우는 모두 12명. 약 30%가 정승을 차지했고, 왕비의 오빠와 동생 또는 조카가 정승이 된 경우는 허다하다. 성씨(姓氏)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어떠한가.

 

대통령의 친인척과 종친. 지연과 학연으로 얽힌 현대 정치사에서 혈연은 정치권력의 내밀한 풍향을 읽어내는 ‘숨겨진 암호(暗號)’다. “월간중앙”은 김대중 현 대통령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5명의 친인척과 종친이 우리 현대사에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추적했다.

 

 

朴正熙·고령(高靈) 박씨(朴氏), 1,000년만에 나온 임금

 

“집안 어느 누구도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를 기억할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고 고령(高靈) 박씨(朴氏) 문중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박정희의 17대조와 박문수의 11대조가 동일인물이다.

 

1961년 5·16으로 권력을 잡고 18년만인 1979년 10월26일 궁정동에서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쓰러질 때까지 친인척이 권력 주변에 얼씬거리는 것을 극도로 꺼린 탓에 박정희 주변에서 득세한 고령 박씨 문중의 인사는 ‘전무’(全無)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령 박씨는 조선조에서 56명의 문과 급제자와 1명의 정승을 배출했지만, 광복 이후에는 대중들이 기억할 만한 명사(名士)를 배출하지 못했다. 굳이 찾자면 문민정부때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부·통산산업부 장관을 역임한 박재윤(현 부산대학교 총장)씨 정도다. 대한민국 최장수 대통령을 배출한 문중치고는 초라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가 친족을 가까이 두고 쓰기 시작했다면 사태는 달라졌겠지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령 박씨 인구가 워낙 적은 탓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은 인구센서스를 실시하면서 한국의 성씨와 본관을 함께 조사해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 조사에 따르면 고령 박씨 인구는 3만5,527명이었다. 그 이후 정부차원에서 성씨와 본관에 관한 센서스를 발표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시 발표는 아직도 성씨별 인구순위를 정하는 준거가 되고 있다. 고령 박씨의 시조는 신라 54대 경명왕(박혁거세의 29세손)의 둘째 아들 박언성(朴彦成·고양대군)이다.

 

본관 고령은 고양과 영천 두 지명을 합쳐 만들어졌다. 고령 박씨는 박씨 가운데 큰 집인 밀양을 비롯해 ‘8朴’으로 꼽힌다. 고령 박씨는박섬(사인공파·舍人公派)·박환(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박연을 중시조로 하는 3파가 있다. 시조 고양대군의 29세손인 박정희는 사인공파 중 경파(京派)인 직강공파(直講公派)의 후손이다.

 

박정희의 직계 선조 중에서 벼슬길에 나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2∼3명의 참봉 벼슬이 고작이었다.

박정희의 부친 박성빈(朴成彬·1870년생)이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영변에 군수 자리를 얻었지만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박정희의 직계선조 중에서 정상적인 벼슬 코스인 문과급제자는 부친으로부터 17대조까지 한사람도 없다.

조상 대대로 ‘학생부군신위’ 신세를 면치 못한 한미한 집안이었던 것이다.

고령 박씨 문중에서는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이 되자 “신라 55대 경애왕조 이래 1,000년만에 돌아온 대경사”로 받아들였다.

 

朴正熙의 親家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있을 때 종친의 청와대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장조카인 박재홍만 겨우 청와대 출입을 허용했는데, 종친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다.

 

3공 때 청와대에 근무했던 박종규 경호실장, 박종홍 교육문화담당 특보, 박승규 민정수석, 박진환 경제특보, 경제비서관을 지낸 박성용·박숙현, 박명근 정무비서관, 박상길 공보비서관(대변인)이 모두 고령 박씨의 큰집 격인 밀양 박씨 문중이다. 정부쪽에서도 박충훈 상공장관, 박경원 내무장관, 박주명 보사장관이 밀양 박씨 출신이다.

 

엄격했던 친족 배제 원칙

 

박정희는 부친 박성빈과 모친 백남의 사이의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맏이인 박동희는 막내동생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10여마지기의 땅을 일구면서 고향을 지키며 살아간 전형적인 농사꾼이었다. 박재홍 전 의원의 아버지인 동희씨는 대통령의 친인척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교훈적인 일화를 남겨 놓았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됐을 당시 66세였던 동희씨는 “대통령은 내 동생이지 내가 아니며, 그럴수록 형인 나 자신은 근신하는 것이 동생을 돕는 일”이라며 동생의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고향인 경북 구미면 상모리를 지키다 1972년 사망했다. 1965년 9월 추석,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했다. 그런데 맏형 집에 호롱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박정희가 답답하고 미안했던지 전기를 넣어주겠다고 했는데 동희는 “야야, 그만두거라. 또 신문에 나면 우짤라고” 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박동희씨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박정희의 장조카)은 5·16이 났을 때 고대 법대에 재학중이었다. 재홍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이렇다할 직장을 갖지 못하다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을 지낸 박태준 포철 사장이 비서실에 취직을 시켜 주었다. 박재홍이 정계에 진입한 것은 박정희 사후였다. 포철에 있다가 동양철관을 설립해 사장을 지냈고, 5공이 들어선 뒤인 11대때 민정당 소속으로 국회에 진입해 내리 4선을 지냈다.

 

14대 때는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13대 총선 때는 사촌동생인 박준홍과 맞붙어 박정희 일가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박동희의 딸 재선씨는 1971년에 남편을 따라 도미(渡美)했다. 남편 정동하(鄭東河)는 경북대 의대를 나와 미국으로 유학해 그곳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박정희는 형제 중에서 특히 셋째형 상희씨 가족에 애틋한 감정을 가졌다. 해방후 구미에서 “동아일보” 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하던 박상희는 집안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박정희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형제이기도 했다. 구미의 박정희가에서 “우리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상희”라고 할 정도로 집안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박상희는 일제 때부터 신간회 간부로 항일투쟁을 벌여 구미 좌익계에서 영향력과 신망이 대단했는데, 구미폭동을 지휘하다 경찰에 사살됐다. 당시 나이 39세였다.

 

박정희는 박상희가 남겨두고 간 유족에게 유달리 애착을 가졌다. 군인 시절에도 틈틈이 셋째형 일가를 도왔다. 그중에서도 박준홍은 외아들이자 유복자였다. 준홍은 경희대를 나오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에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박정희의 배려로 국토통일원과 무임소장관실 정무조정실장으로 근무하다 유신 말기에는 대한축구협회장까지 지냈다. 현재 한국정경문화아카데미 회장 겸 자민련 당무위원으로 있다.

 

3공 때부터 ‘영원한 2인자’로 살아온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박상희의 큰사위다. 어릴 때부터 셋째 형님의 큰딸 박영옥을 귀여워했던 박정희는 군에서 만난 핸섬한 장교 김종필을 배필로 주선했다. 이후 김종필은 박정희사단의 2인자로서 5·16 쿠데타를 기획해 성공시키고 3공화국을 출범시키는 데 주역이 됐다. 박정희 집권 시절 JP가 권력의 단맛, 쓴맛을 보면서도 2인자 자리를 놓지 않았던 것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하는 사나이들의 세계와 달리 조카 박영옥과 숙모 육영수 여사의 항상적인 인간관계가 주효했다는 지적도 있다.

 

박상희의 둘째딸 계옥(桂玉)씨는 김용태(金龍泰)씨(민간인 신분으로 5·16에 참여해 후에 국회의원과 무임소장관을 역임한 金龍泰와는 동명이인)에게 출가시켰는데, 박정희는 생전에 ‘조카사위 김용태’를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도록 했다. 김용태는 1984년 처남인 박준홍과 함께 사업을 하기도 했다. 셋째딸 금자(金子)씨는 총리실에 근무한 적이 있는 반기언(瀋琪彦)씨에게 출가시켰고, 막내딸 설자(雪子)씨는 벽산그룹 창업주인 고(故) 김인득(金仁得)씨의 차남 김희용(金熙湧) 현 동양물산 회장과 결혼했다.

 

박정희의 둘째형 무희(武熙)씨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동희씨와 마찬가지로 경북 선산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살다 박정희가 권좌에 오르기 1년 전인 1960년에 사망했다. 무희씨는 2남1녀를 두었다. 무희씨 일가는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웠다. 무희씨의 장남 재석(在錫)은 한때 구미에서 연필장사를 했고, 차남 재호(在浩)는 벽돌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의 등극으로 신세가 폈다. 재석씨는 박정희 재임 시절 국제전기기업 회장을 지냈고, 재호씨는 동양육운 회장을 지냈다.

 

박정희에게는 누이가 두명 있었다(바로 위 형인 4남 박한희는 박정희가 여덟살 때 죽었다). 큰 누이 귀희(貴熙)씨는 박정희가 태어나기 전 칠곡군 석적면의 은(殷)씨 집안으로 출가해 그곳에서 살다 생을 마쳤다. 귀희씨는 3남2녀를 두었는데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한 3남 은희만씨를 제외하고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대통령 누나는 서울에 살지 말라는 법 있느냐!”

 

또 다른 누이는 박정희의 누이 재희(在熙)씨다. 재희씨는 갓난아기 박정희를 업어 키운 바로 위 누나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에 다닐 때는 재희씨 남편 한정봉(韓正鳳)씨가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박정희가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친근감을 나눈 사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상주의 모 국회의원이 재희씨 부부를 서울 성북동으로 모셔왔다.

 

‘대통령 누님’ 집에 청탁꾼들이 몰려들고 정치인들도 기웃거렸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경찰을 배치하고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집권 초기 친인척 관리를 맡았던 대구사범 동기동창 권상하(權尙河) 비서를 보내 상주로 내려가라고 압박했지만, 재희씨는 “대통령 누나는 서울에서 살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느냐”며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버텼다. 은인자중하는 맏형 동희씨의 처신과는 딴판이었지만 박정희도 누나를 어쩌지는 못했다.

 

박정희는 육영수와는 재혼이었다. 육영수와 사이에 근혜(槿惠·현 한나라당 부총재)·서영(書暎·현 육영재단 이사장)·지만(志晩·사업) 3남매를 두었고, 이혼한 첫부인 김호남과의 사이에서는 큰딸 재옥(在玉)을 두었다. 재옥씨의 남편 즉, 박정희의 사위가 한병기(韓丙起). 박정희 준장이 5사단장일 때 전속부관이었다. 부하 김종필을 조카와 인연을 맺어준 것처럼 박정희는 한병기를 첫 딸과 맺어 주었다. 그러나 한병기는 과거 상관이자 장인인 박정희 통치 아래서 권력의 핵심에 진입하지 못했다.

 

1971년 8대 국회의원을 지낸 것 말고는 칠레·유엔·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면서 해외로만 돌았다. 10·26 이후 동서지간인 JP와 함께 공화당 재건에 나섰던 한병기는 5공이 출범하자 정계를 떠나 설악산 케이블카를 운영하는 설악관광회 회장으로 물러났다. 13대때 서울 서초을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현재는 JP와 정치적 행동을 함께하고 있다.

 

근혜씨는 현재 한나라당 부총재로 예상 외의 정치력을 보이며 TK 지역의 리더로 발판을 다져가고 있다. 차녀 서영씨는 부모가 모두 사망한 1982년 풍산금속 사장 유찬우(柳纘佑)의 장남 유청(柳靑)씨와 결혼했지만 몇달만에 이혼했다. 외부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서영씨는 현재 육영재단에만 관여하며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거듭된 마약 복용으로 박대통령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지만씨도 요즘에는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박정희는 집권 내내 친척이 정부 고위관리나 정치권에 진입하는 것을 한사코 막았다. 자격을 갖추었든 아니든 이 원칙을 밀고 갔다. 물론 이권개입도 차단했고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 원칙에서 예외가 있다면 무임소장관실에서 정무조정실장을 지낸 셋째형 박상희의 아들 박준홍 정도였다. 조카사위 JP의 경우는 ‘혁명 동지’라는 점에서 다른 인척과 같은 선상에서 파악하기 곤란하다.

 

중간에서 이런 일을 도맡은 이가 권상하 비서관이었다. 권상하는 1964년부터 약 5년여간 청와대 정보수석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대통령의 친인척과 학교 동창생들을 관리했는데, 관리대상 인물의 주거지역 관할 경찰서를 통한 사실상의 감시였다. 권비서관 이후에는 김시진(金詩珍)·박승규(朴承圭) 민정비서 등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들은 미행까지 하면서 매일 친인척과 관련한 정보와 동향을 체크했고,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이를 통해 친족들의 정치관여와 이권개입을 막았다. 대신 궁핍한 생활을 하는 친족들에게는 연탄과 쌀을 대주는 식으로 소리없이 돌보았다. 1975년부터는 친족들의 청와대 출입을 아예 금지했고, 장조카 박재홍을 통해 친족들의 소식을 보고받았다.

 

이처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친인척 관리에 신경쓴 탓인지, 박정희 재임 시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친인척 비리사건은 터지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친족(親族)에게 엄격했던 반면 처가(妻家)인 육씨 집안에 대해서는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하는 등 비교적 관대하게 대했다.

 

妻家에는 관대

 

사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세간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렸지만, 단아한 목련꽃을 연상시키는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국민들 가슴 속에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한 국모’로 남아 있다. 1974년 8월15일 서울 국립극장 기념식 단상에서 조총련에 세뇌당한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격으로 비운에 스러져간 육영수는 사후 어떤 여론조사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퍼스트 레이디’로 꼽혀왔다.

 

육영수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아버지 육종관(陸鐘寬)과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사이의 1남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육종관은 독농가로서 옥천의 만석꾼으로 유명했다. 보수적인 토호였지만 일찍이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옥천·대전 일대에서는 최초로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다녔고 당대의 유명한 연예인이나 영화인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다만 당시 부호들이 그랬던 것처럼 축첩을 했는데, 그래서 집권 초기 박정희의 장모 이경령은 청와대에서 살고 장인은 소실과 함께 서울에서 기거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육영수의 조카사위 ‘3동서의원’ 진기록

 

육영수의 형제로는 큰언니 육인순(陸寅順·1914∼1972), 오빠 육인수(陸寅修·1919∼2001), 여동생 육예수(陸禮修·1929년생)가 있다. 박정희는 친가쪽의 인척들이 청와대에 출입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지만, 처가쪽에 대해서는 달랐다. 우선 박정희가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신 장모 이경령씨가 말년을 청와대에서 보냈고, 주로 육영수가 부른 것이기는 하지만 처조카들도 자유롭게 청와대를 출입했다.

 

육영수의 형제들은 박정희 형제들과는 성장배경이 달랐다. 명문가였던 만큼 집안에 인재들이 즐비했다.

박정희 처가의 주요 인물들은 ‘처형’인 육인순의 사위들이었다. 육인순은 22세에 춘천고보와 경성제대 법대를 나온 인텔리 홍순일(洪淳一)과 결혼했다. 일제때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홍순일은 육인순과의 사이에 3남5녀를 낳았는데 6·25때 납북되었다. 홀몸으로 3남5녀를 키우던 큰언니를 육영수는 정성껏 보살폈다.

 

박정희가 권좌에 오른 직후인 1963년 육인순은 서울시립부녀사업관장으로 임명됐고, 이어 당시 동대문구 망우동에 혜원여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박정희 재임 시절 처가쪽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인물이 육인순의 맏사위 장덕진(張德鎭·부인 洪銀杓)이다. 장덕진은 고려대 법대를 나와 사법·행정·외무 ‘3시’를 패스한 수재였다. 장씨는 재무부 이재국장 겸 대통령비서관, 재무부 재정차관보 겸 대통령외자관리 수석비서관, 경제기획원 차관, 농수산부 장관, 8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능력은 “대통령을 시험으로 뽑는다면 틀림없는 대통령감”이었지만, 관직생활 막판에는 대통령의 인척이라는 점이 오히려 핸디캡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장씨는 1980년대 말부터 국내정치에서는 발을 빼고 만주와 러시아로 눈을 돌려 사업을 벌이고 있다. 현 직함은 대륙종합개발 대표이사 회장이다

 

둘째 사위는 현 외교통상부 장관 한승수(韓昇洙·부인 洪昭子). 춘천고·연세대 정외과·영국 요크대를 졸업하고 줄곧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지냈다. 6공 때인 1988년 13대 국회에 진출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6공과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상공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주미 대사,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을 지냈다. 민국당 간판으로 16?선거에 당선된 뒤, 현 정부에서도 외교통상부 장관이 됐다.

 

셋째사위는 유연상(柳然常·부인이 洪晶子)씨. 고려대 경제학과, 보스턴대 대학원 등을 나왔고 미국에서 증권회사를 다녔다. 영남투자 회장을 지냈고 영남대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다. 넷째사위 정영삼(鄭永三·부인 홍지자)은 현재 조흥관광진흥(한국민속촌) 회장이다. 박정희 재임 시절에도 모직회사를 운영하는 등 줄곧 재계에서 활동했다.

 

윤석민(尹錫民·부인이 홍재희)씨는 다섯째사위다. 청주고·고려대 법대를 나온 윤석민은 한국 해운업계의 ‘간판’이었던 대한선주 회장을 지냈고, 11대때 국민당 간판으로 국회에 진입해 국민당 부총재를 지냈다. 육인순의 사위인 장덕진·한승수·윤석민 3인은 비록 시기는 다르지만 국회의원을 지낸 ‘3동서의원’으로 헌정사에 기록됐다.

 

육인순의 장남 홍세표(洪世杓)는 춘천고·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평생 ‘뱅커’로 일했다. 현재는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이다. 차남 홍국표(洪國杓)는 미국으로 이민갔고, 막내 홍민표(洪民杓)는 현대자동차 상무이사로 재직중이다.육영수의 오빠 육인수(陸寅修)는 친인척 중에서 대통령 덕을 본 거의 유일한 케이스다. 육인수의 사위들이 ‘자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면 육인수는 예외로 보아야 한다. 일제때 도쿄(東京) 무사시노(武藏野)고등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뒤 진명여고·대구고·서울고 등에서 수학 선생님으로 재직했다.

 

‘박통’ 덕본 유일한 예외 육인수(陸寅修) 의원

 

육인수는 공화당 공천을 받아 1963년 고향인 옥천·보은에서 출마해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평범한 교사에서 일약 선량이 된 것이다. 이후로도 육인수는 10대까지 내리 5선을 지냈다.

 

국회 문공위원장, 공화당 당무위원, 공화당 중앙위 의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3공화국 탄생에서 10·26까지 권력의 이면사에서 육인수는 대통령의 처남이자 중진 정치인으로서 표나지 않게, 그러나 주요한 고비마다 이름을 걸치고 있다. 지난 6월25일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처제인 육예수(陸禮修)의 남편은 무던한 성격으로 알려진 언론인 조태호(趙泰浩)씨다. 함남 북청 출신인데 해방후 고려대 총무과장으로 재직했다. 1965년에 ‘5·16 장학회’ 이사가 되었고, 문화방송 이사·디자인포장센터 이사장·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말년에 “부산일보”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88년 사망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저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에서 조선말 세도정치의 병폐를 개탄하면서 ‘국가권력을 무궤도하게 악용하는 말세적 정치현상’이라고 평했다. 박정희에게는 친인척이 정치에 개입하고 권력의 흐름을 좌우하는 것은 결단코 막아야 한다는 ‘신념’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박정희는 첫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뒤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지닌 실력으로 자립해야 하며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이란 지위가 나 개인은 물론 가족이나 집안의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이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신념을 가졌던 박정희가 처족에게는 관대하고 친족에게는 엄격한 ‘이중 잣대’로 볼 수도 있는 처신을 한 것은 왜일까? 만석꾼 집안으로서 유복하게 성장한 ‘처가 식구’와 달리 가난한 친족들이 권력의 맛을 보기 시작하면 온갖 이권과 청탁에 빠져들어 결국 통치권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리라고 염려했기 때문은 아닐까.

 

‘외교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지닌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박정희를 “독재자이자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박정희 시대의 명암을 정곡으로 찌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박정희는 친인척 관리에서만큼은 아주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全斗煥·완산(完山) 전씨(全氏), 갑자기 찾아온 권력

 

측근의 부패가 아니라 친인척 비리로 무너진 5共

 

1980년 4월 어느날, 서울 반포 경남아파트 전기환(全基煥·전두환 전 대통령의 큰형)씨 집.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붐볐다. 전씨의 모친 기일(忌日)이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의 얼굴도 보였다.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온 전두환의 일가친척들은 어림잡아 200명 안팎이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전씨 모친 기일이 언제인지 알지도 못하던 인척들이 태반이었다.

 

그즈음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거칠 것이 없었다.

 

12·12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이제 대통령 자리에 앉는 일만 남았다. 온 나라가 전두환이라는 ‘꼭지점’을 향해 맹렬하게 생존의 몸부림을 칠 때였다. 그러고 보면 ‘떠오르는 권력’을 향한 전씨 문중의 움직임도 기민한 편이었다. 6촌, 8촌까지 전두환과 촌수를 따질 수 있는 피붙이들은 다 몰려들었다.

 

참석자들이 “우리 전씨 일가가 이렇게 많았느냐”며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전씨(全氏)의 도시조는 백제 개국공신 섭(攝)으로 전래되고 있다. 여기서 여러 관향이 갈라졌다. 하지만 전씨는 비록 여러 관향으로 분적(分籍)되었으나 뿌리가 같기 때문에 단일혈족으로서 유대를 굳게 하기 위해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를 간행했고, 1966년에는 다시 “병오대동보”(丙午大同譜)를 편찬했다. 범전씨(凡全氏)로서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그래서 전씨(全氏)는 서로 본관이 달라도 다른 성씨의 분파(分派)쯤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전두환 전 대통령의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완산 전씨의 시조 전집(全潗·시호는 충정)은 도시조 전섭의 30세손이다. 한국의 족보를 망라한 사이트 ‘뿌리를 찾아서’(www.rootsclick.com)에 나오는 완산 전씨 개요를 옮겨 보면 이렇다.

 

“전집은 고려 공민왕때 중랑장으로 두차례에 걸쳐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추충정난공신(推忠靖扈亂聖功臣)이 되어 완산백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정선(旌善) 전씨(全氏)에서 분관하여 완산을 본관으로 대를 계승하고 있다.

 

완산 전씨는 조선시대에 여러 관직자를 배출하였다.

 

명종 때의 전치원(全致遠)은 1606년 사헌부 감찰,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거쳐 춘추관 기사관으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서예와 성리학에 능통했고 저서로는 “임진난이록”(壬癸亂離錄)이 전한다.

 

전우(全雨)는 1592년 임진왜란때 창의(倡義)하여 공을 세우고 중임도찰방(重林道察訪)에 발탁되었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또 전형은 서예로 일가를 이루었고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36년 통신사 임광을 수행해 일본에 건너가 글씨로 이름을 떨쳤는데, 저서로는 “해사일기”가 전한다.

 

전준은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각처에서 많은 적을 죽이고 삼학진(三鶴陣)에서 왜병의 기습을 받아 역전하다 순절하였다. 1638년 8읍 사림이 장문(狀文)을 연정하여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또한 전문도 난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의병을 이끌고 각처에서 공을 세우다 순절하였다.”

 

전통적으로 무관(武官) 집안이다. 중랑장(정5품) 직책으로 완산 전?시조인 전집(全潗)부터가 그랬다. 그는 이방실과 이성계의 부하 장수였다. 하지만 전두환의 직계조를 보면 전집으로부터 선대까지 단 1명의 문과 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13대 직계조인 전제만이 현감을 지냈을 뿐이다. 조선 명종때 제(霽)는 첨정을 거쳐 영산 현감에 재임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진·정암 등지에서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때 도산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호조참판에 추증되었고 도계서원에 제향된 것으로 나온다. 그 흔한 무과 급제자도 없었다. 오랜 기간 ‘춥고 배고픈’ 세월을 보낸 것이다.

 

1985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완산 전씨는 전국적으로 6,811명에 불과했다. 전씨 문중에서도 세(勢)가 약한 문파다. 그런데도 전두환 모친 기일에 일가친척 200여명이 모였으니 권력자와 밀착하려는 그 순간적인 결집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오랜 박씨의 집권을 끝내고 바야흐로 ‘전씨세상’이 열리던 시절이었다.

 

빈농의 집안

 

전두환은 부친 전상우(全相禹)와 모친 김점문(金點文) 사이의 3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전두환의 형제는 10남매였으나 맏이 열환과 규곤은 일찍 죽었고, 두환과 경환(敬煥) 사이에 남동생 석환이 있었는데 역시 어려서 죽었다. 1929년생인 기환씨 위로 세명의 누나 홍렬(鴻烈·1918년생)·명렬(命烈·1922년생)·선학(善學·1928년생)이 있고, 두환(1931년생)과 경환(1942년생) 사이에 여동생 점학(點學·1935년생)이 있다.

 

전두환의 형제 가운데 대학을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두환은 대학 학력에 준하는 ‘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경환은 유도대학을 나왔다. 그만큼 집안 살림이 곤궁했던 것이다. 부친 전상우는 삭풍이 매섭게 몰아치던 1940년 1월 식솔들을 이끌고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마을을 떠나 만주로 갔다. 두환의 나이 열살 때였다. 합천군 율곡면은 완산 전씨 집성촌이다. 형제 중에는 기환과 두환이 함께 ‘율곡국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친족이 있는 곳을 등지고 만주행 열차에 오른 것은 형편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일가는 만주 지린(吉林)성 반석현에 정착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생활에 쪼들렸는지 1년3개월만에 다시 보따리를 싸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상우는 대구에 짐을 풀었고, 만주에서 틈틈이 배운 한방기술로 한의원을 열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한의학을 배운 것이 아니어서 손님들의 발길이 뜸했고, 수입은 식구들이 겨우 끼니를 때울 정도에 불과했다.

 

전기환의 학력은 분명하지 않다. 중학교를 마쳤다는 얘기가 있으나 고향 사람들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 어쨌든 기환은 6·25때 육군 중사로 참전했고, 1959년 경찰에 지원해 경기도경 소속의 순경이 되었다. 서울 용산경찰서로 옮긴 시점은 1967년 9월. 1공수특전단장으로 있던 동생 두환씨가 장군이 된 뒤 기환씨는 동생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때가 1974년 2월. 주로 용산경찰서 교통계 사고조사반에서 근무했다. 5공 시절 막후에서 이권에 개입하고, 경찰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환씨가 ‘용산마피아의 대부’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이후 소규모 사업을 벌이다 실패하자 기환씨는 경기도 과천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논농사를 짓고 돼지를 치는 평범한 농사꾼으로 지냈다. 하지만 동생 두환은 12·12로 권력을 잡자마자 농사꾼 큰형님을 서울 강남의 대형 아파트로 ‘모신다’. 박정희의 큰형님 동희씨가 동생에게 부담을 준다며 대통령 취임식에 불참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5공이 막을 내린 뒤 기환씨는 이른바 ‘노량진수산시장 강탈사건’과 관련해 구속됐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어김없이 전(前) 정권의 부정부패 사건은 터졌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그 양상이 사뭇 달랐다. 이전에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부패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5·6공 권력 교체기에 가장 먼저, 가장 집중적으로 터져나온 것은 ‘전두환 일가 비리’였다. 당시 한 정치학과 교수는 “일종의 네포티즘(Nepotism:친척 등용, 족벌주의)인데 아주 원시적인 부패현상”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집권 초기에는 전두환도 친인척 관리를 엄격히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1980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은 헬리콥터를 타고 자신의 생가인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마을을 방문했다. 전두환은 종씨인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집안에서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 대통령 못하고 그만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대인관계를 맺거나 사람을 평가할 때 능력보다 인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전씨뿐만 아니라 동생 전경환 등 친족, 그리고 이순자 여사 등 처족들도 혈연과 인연을 중시한다. 그【?청탁꾼들이 이런 약점을 이용해 전씨 일가 주변에 몰려들었고, 결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퇴임후 최대의 ‘친인척 비리사건’을 겪었다..

 

전기환과 박동희(박정희의 큰 형)의 차이

 

전두환의 큰형 전기환과 박정희의 큰형 박동희. 동생이 집권한 뒤 전혀 딴판으로 행동한 두 맏형의 처신은 친인척 문제에서 3공화국과 5공화국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통령은 내 동생이지 내가 아니며, 그럴수록 형인 나 자신은 근신하는 것이 동생을 돕는 일”이라며 동생의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전기를 공급해 주겠다는 대통령 동생의 권유를 “신문에 나면 우짤라꼬”하며 손사래를 쳤던 박동희다.

 

하지만 전기환은 달랐다. 1980년 4월 전씨 일가붙이가 모여 제사를 지낸 서울 반포의 50평짜리 아파트는 불과 3개월전 동생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던 농부가 동생의 등극과 함께 현기증나는 수직상승을 한 것이다. 그리고 정권이 끝난 뒤 기환은 노량진농수산물시장 강탈사건으로 쇠고랑을 찼다.

 

6공화국 들어서자마자 터져나오기 시작한 ‘전씨 친인척 비리’는 전씨 집안을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제사를 모실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전두환 집권 기간 전씨 친족들이 어떤 궤적을 그리면서 권력의 단맛에 취해 갔는지는 친인척 비리 사건을 열거하는 편이 이해하기 편하다. 동생 경환은 전씨 일가 중 ‘친인척비리 1호’를 기록했다. 유도대학을 나온 전경환은 ‘형 덕’에 유신 시절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친인척 비리 사건에서 전씨 친족들의 죄상을 ‘굵직한’ 것만 열거해 보자.

 

▷全敬煥(동생):새마을운동본부 중앙회장. 1998년 3월1일 새마을운동본부 기금 73억여원 횡령, 여러 이권에서 알선수재, 10억6,000만원 탈세 등 8개 혐의로 구속. 자신의 동서 황흥식(黃興植)·김승웅(金承雄) 등도 같은 사건으로 구속.

 

▷全淳煥(숙부 전상기의 2남):대전수산주식회사 대표.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수뢰한 혐의로 구속.

 

▷全禹煥(숙부 전상희의 장남):고향에서 정미소 운영하다 일약 양곡가공협회장에 앉음. 새서울용역 감사. 각종 인허가 청탁 개입, 수뢰 혐의로 구속.

 

▷金永道(누나 전학렬의 아들):대립개발 회장. 청탁 개입, 수뢰 혐의로 구속.

 

▷李昌錫(처남):주식회사 동일 공금 9억원 횡령. 부친 이규동으로부터 경기도 화성 임야 26만평을 증여받으면서 1억6,000만원 탈세 혐의로 구속.

 

▷李圭東(장인):대한노인회 회장. 비리 의혹으로 국정감사 출두.

 

전두환 일가의 비리 사건은 이밖에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잔챙이’들이 즐비하다.

 

범(汎)전씨 종친들의 활약

 

이런 비리와 별개로 5공 시절 전씨 종친들의 대약진은 눈부신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전씨(全氏)는 18개의 본관으로 갈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일혈족 의식이 강하다. 가나다 순으로 열거해 보자.

 

▷경남 사천이 고향인 전석영(全錫濚)은 대양공업고와 단국대를 나왔고 10여년간 청와대 부속실에 근무했다. 5공이 들어선 1980년 9월 그는 42세의 나이에 일약 청와대 살림을 도맡은 총무수석에 발탁됐다. 꼬박 4년2개월을 근무한 뒤 성업공사 부사장, 대한보증보험 사장을 지냈다. 노태우 정부에서 문민정부에 걸쳐서는 보험개발원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청와대 비서관 중에서 유일하게 전두환과 같은 완산 전씨.

 

▷대구 달성 출신으로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전세봉(全世鳳)은 해군 법무관시험에 합격해 군인의 길로 들어선 드문 케이스. 1986년 해군 법무관(준장)으로 별을 단 뒤 예편하고 이듬해 청와대사정비서관, 6공 들어 민정비서관을 지냈다. 행정부로 나와서는 조달청 차장, 제14대 조달청장(1993∼94년), 감사원 감사위원(94∼97년·차관급)을 지냈다. 현재 법무법인 세종의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전홍식은 1982년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들어가 5공 임기 말까지 재직했다.

 

▷전병식(全炳植)은 경복고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육사 교관을 지냈다. 이후 상공부에서 국장으로 근무하다 5공 출범과 함께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냈다. 1982년 청와대를 나온 뒤 1990년까지 국립공업시험원 원장을 지냈다.

 

▷전재기(全在琪)는 경북대 사범대 부속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검찰 출신. 역시 5공 출범과 함께 청와대 사정비서관으로 파견근무한 뒤 검찰로 복귀했다. 이후 서울지검 형사5부장, 청주지검장, 대구지검장, 법무연수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여의도합동법률사무?변호사.

 

▷전달출(全達出)은 천주교 신부로서 국보위 입법회의에 참여한 후 평통 부의장(85년)을 지냈다. 현재는 “매일신문” 명예회장으로 있다.

 

▷전영우는 충남 예산 출신의 새마을 지도자로 농사일을 하다 영문도 모르고 발탁되어 국보위 농수산위원회를 거쳐 새마을 영농기술자 중앙회에 근무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학제(全學濟)는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지내다 1984년 한국과학기술원장이 되었다. 1986년에는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뒤 다시 과기원장으로 복귀했다. 현재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전석홍(全錫洪)은 작달막한 체구에 자신의 선조인 전봉준(天安 全氏) 장군을 연상케 할 만큼 다부진 스타일.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행시에 패스해 오랜 관료 생활(충북 부지사, 내무부 지방개발국장) 등을 지내다 5공 들어 내무부 차관보, 전남도지사를 역임했다. 6공 들어 장관급인 국가보훈처장에 발탁된 뒤 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현재는 한나라당 국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이다.

 

▷전상석(全尙錫)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시에 패스한 뒤 여러 지방법원 판사와 부장판사를 지내다1981년 대법원 판사가 되었다. 12·12, 5·18 재판에서 전두환측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경북 성주가 고향인 전주식(全珠植)은 육군 제3군단 사령관을 끝으로 군문을 떠난 뒤 1984년 국가안보회의 군사연구위원과 서울시지하철공사 감사를 역임했다.

 

▷전부일(全富一)은 예비역 소장으로 예편한 뒤 유신 정권에서 제9,10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남해화학 사장을 지냈다.

 

▷전상진(全祥振)은 직업외교관으로서 1979년 유엔대사를 끝으로 외교관 생활을 끝마쳤다. 5공 정권 출범과 함께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KOC 부위원장이 되었고, 서울올림픽 조직위 제1사무차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외교협회 고문.

 

▷전병우(全炳宇)는 전주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내무관료 생활을 오래 했다. 1979년 전북 부지사로 있다 11대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발탁됐다. 12대에서는 지역의 거물인 황인성씨를 전국구로 밀어내는 파란을 일으키며 전북 진안·무주·장수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전종천(全鍾千)은 전기환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인물이다. 종친에다 경찰 출신이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그는 서울지역 경찰서장을 한번도 지내지 못해 경무관 승진 대상이 아니었으나 전기환의 영향으로 제주경찰국 국장으로 갔다가 2년만에 치안감으로 특진했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공천(정읍·고창)받아 여의도에 진출했다.

 

妻家 사람들

 

5공 때의 대표적인 금융사건은 ‘이철희(李哲熙)-장영자(張玲子)부부 어음사기사건’이다. 1981년 겨울 불거져나와 결국 5공 최대 금융스캔들로 커진 이 사건의 ‘배후’로 몰려서 구속된 사람이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李圭光)이다. 이씨는 장영자씨의 형부다(이씨의 아내·張星姬가 장영자의 언니). 그러니까 이순자와 장영자는 사돈인 셈이다.

 

군 시절 처가에 신세진 전두환

 

육사 3기생인 이규광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정권 치하에서 독특한 역할을 한, 그래서 아직도 언론으로부터 미스터리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3공때 민정에 참여하는 박정희 세력에 반기를 든 이른바 ‘반(反)혁명 사건’에 연루돼 군복을 벗었으나 유신 말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밀명을 받아 정계·관계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뒷조사해 보고하는 특명정보대장을 지냈다.

 

이순자는 성주(星州) 이씨(李氏)다. 이순자의 아버지 이규동(李圭東)은 3형제 중 장남이다. 아래로 규승(圭升)과 규광(圭光)이 있다. 공교롭게도 3형제는 모두 육사 출신이다.

 

이규동은 박정희와 동기인 육사 2기, 규승은 늦게 입학해 육사 7기, 규광이 육사 3기다. 집안의 후광이 없는 하나회 청년장교 전두환에게 처가는 여러 모로 도움이 됐다. 이규동의 육사 동기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 말고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한신 합참의장, 문형태 합참의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규동과 이규광은 준장으로 예편했으나 동생보다 늦게 군문(軍問)에 들어선 이규승은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장 사건이 터지자 전두환 대통령은 1982년 5월13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자신의 무관함을 강조하면서 ‘처가 신세’를 진 일을 털어놓았다.

 

“내가 군대 시절 처가 사람들, 특히 장인 신세를 많이 졌다. 그분들이 많이 도와주었고 많은 사랑도 해주어서 처가생활을 10년 했다. 그분들에게 잘해 주고 싶은 마음이 태산 같아도 못하고 있어. 잘못하면 노인들이 무슨 주책을 저지를지 몰라. 장영자는 처삼촌(이규광)의 처제니까 나한테는 사돈의 8촌도 안돼.

 

이철희는 일제때 정보학교를 나와 박정권 때부터 요직에 있으면서 정치자금 모으는 수법과 배분에 관해 어느 부처가 약하고 어떻게 하면 돌아간다는 걸 훤히 알고 있었을 거야. 이번에 과거의 모든 수법을 다 썼겠지.”(신동아 1993년 6월호 ‘李圭光 11년만에 말문 열다’ 기사에서 인용).

 

어쨌든 전두환은 자신의 말대로 군 시절 처가 덕을 톡톡히 보았다. 대표적인 것이 1973년 터진 윤필용 사건. 유신 시절 박정희 권력을 떠받치던 군부의 지형이 바뀌고 급기야 5공화국 권력의 탄생을 잉태한 엄청난 사건이다. 하나회의 대부격인 윤필용 사건으로 인해 당시 군내 육?11기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들이 궁지에 몰렸다. 이때도 이규동·이규광 형제는 하나회 회장이자 사위, 그리고 김포공수단장이던 전두환 소장을 구명하는 운동에 나섰고 마침내 성공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자 ‘당연히’ 처가쪽에도 서광이 비쳤다. 장인 이규동은 곧바로 대한노인회 회장 자리에 앉았다. 이규동은 명성그룹 관련설과 잣나무 묘목 26만 그루를 경기도에서 무상으로 받아 서울시에 26억원어치를 되판 사실 때문에 정권이 바뀐 뒤 국회에 출석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1982년부터 대한노인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청강문화재단 이사장과 대한노인회 고문을 맡고 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규광은 풀려난 뒤 한국양회공업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전두환 장군이 권력을 잡아 나가는 과정에서 이규광은 아주 깊숙이 정치적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규광을 연결고리로 전두환과 DJ가 ‘먼 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규광의 장인과 DJ의 장모(첫 부인 차용애 여사의 어머니)가 남매지간이다. 즉, 이규광은 DJ와 사돈지간인 셈이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총칼로 누르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과 야당 지도자에서 사형수 신세가 된 김대중 현 대통령이 ‘따지고 보면’ 사돈지간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사형수 DJ와의 인척관계 고리 李圭光(이순자 삼촌)

 

이순자는 1939년 아버지 이규동과 어머니 이봉년(李鳳年·작고) 사이의 1남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밑으로 이신자(李信子·45년생)·이정순(李貞純·48년생)·이창석(李昌錫·51년생)이 있다.

 

둘째 이신자의 남편, 그러니까 전두환의 첫째 동서 홍순두(洪淳斗) 역시 1988년 항공화물업계로부터 세금 추징 면제청탁을 받고 2억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국민대를 나와 운송업계에 종사해온 홍순두는 5공이 들어서자 동아그룹 계열사인 동아콘크리트 부장으로 입사해 2년만에 초고속 승진, 대한통운 항공화물 사장으로 올라앉아 항공화물업계의 대부로 불렸다. 홍순두와 DJ의 오른팔 권노갑 민주당 고문이 역시 사돈의 연을 맺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권고문의 장녀 수현과 홍순두의 차남 태식이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다.

 

전두환의 둘째 동서는 김상구(金相球·부인 이정순)다. 육사 15기 출신이자 전두환이 이끈 하나회 멤버이기도 하다. 군 시절 처제와 후배를 맺어준 셈인데, 김상구는 윤필용사건이 터진 1973년 중령으로 예편하고, 미국으로 이민가 한국일보 하와이지사장을 지냈다.

 

5공화국 출범과 함께 귀국해 평통 사무차장, 호주대사 등을 역임하고 12, 14대때 두차례 금배지를 달았다. 호주 대사 시절 공관장회의가 열리면 외무부의 귀빈용 승용차를 타고 다니거나 직업외교관이나 군 출신 선배 외교관을 호령했던 일화는 당시 외무부 안에서 씁쓸한 일들로 회자되었다.

 

이창석(李昌錫)은 전두환의 유일한 처남이다. 주식회사 동일의 공금 9억여원을 횡령해 구속됐다

 

 

盧泰愚·교하(交河) 노씨(盧氏), 쇠락한 거족(巨族)의 부활

 

利權 대신 국정 장악한 진짜 權府 ‘청와대 가족회의’

 

1987년 대선때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무명’에 가까운 인지도에서 출발해 대권을 거머쥐었다. 여당 프리미엄이 작용했다고 쳐도 당시 민정당의 전략은 선거기법상 3김이 이끄는 세 야당보다 확실히 앞섰다. ‘보통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노태우 후보가 갑자기 ‘친인척 배제’ 선언을 했다.

 

“내가 당선된다면 친인척이 이권에 개입하거나 정치에 나서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

 

효과 만점의 공약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두환 일가의 온갖 비리 소식에 국민들은 넌덜머리를 쳤다. 노태우의 친인척 배제 공약은 민심을 파고들었다. ‘후계자’ 노태우가 상왕(上王) 전두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겼다. 과연 노태우는 이 공약을 지켰는가.

 

6공화국때 정치권과 언론이 귀를 쫑긋 세우고 염탐하려고 애쓰던 ‘세력’이 있었다.‘청와대 가족회의’.세간에서는 ‘작은 청와대’라고도 불렀다. 권부(權府) 중의 권부, 권력의 이너서클이라는 얘기다. 참석 멤버는 노태우 대통령·김복동(金復東·처남)의원·금진호(琴震鎬·동서) 전 상공부장관·박철언(朴哲彦·처 고종사촌) 정무장관, 최종현(사돈) 선경그룹 회장·신명수(사돈) 동방유량그룹 회장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6공 초대 안기부장을 맡았던 안무혁(安武赫·육사 14기·하나회)씨는 1988년 5월 노대통령을 독대하고 안기부가 파악한 가족회의의 부작용과 비판적 여론을 전달하며 친인척을 배제하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노태우는 오히려 화를 냈다. 안씨는 사표를 내고 안기부장직을 떠났다. 5공때 전두환 친인척이 배경을 활용해 이런저런 이권에 관여하는 ‘비리’를 저질렀다면 6공화국 들어서는 성격이 달라졌다. 국정의 큰 줄기가 가족회의를 거쳐 방향을 잡아나갔다. 주요 정책과 인사가 이 가족회의 테이블 위에서 결정됐다.

 

노태우의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창성군파에 속한다. 한국의 노씨는 중국 당나라때 안록산의 난을 피해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정착한 노수(盧穗)를 시조로 한다. 노수의 아들들이 신라에 공을 세워 여러 지역의 주백(州伯)으로 분봉되는데, 둘째 아들 노오(盧塢)는 파주군 교하면 교하백(交河伯)으로 봉해졌다. 교하 노씨는 노오의 후손 노강필(盧康弼)을 시조로 하고 노오를 원조로 모신다. 교하 노씨는 고려말부터 거족(巨族)이었다.

 

노태우의 20대조 노척은 딸을 원나라 황제인 순제비로 보내면서 고려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17대조 노한은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동서지간으로 우의정을 지냈고, 노한의 아들 노물재는 세종대왕과 동서지간이었다. 노물재의 아들이 노태우의 15대 직계조인 유명한 영의정 노사신이다.

 

노사신은 수양대군과 이종사촌이다. 노사신의 아들 노공필은 6조 판서를 모두 지냈는데, 조선 왕조에서 정약용과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18년) 유배생활을 했다. 이런 오랜 유배생활 탓인지 노공필 이후의 노태우 직계조 가운데 문과 급제자는 나오지 않았다. 교하 노씨 문중은 급격히 쇠퇴했고 198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4만5,812명이었다.

 

노씨 중앙종친회 사무실에 가면 ‘구파일원손 만동근원’(九派一原孫 萬同根源)이라고 쓴 노태우의 휘호가 걸려 있다. ‘9파가 모두 한 조상의 후손이고, 그 후손이 여러 갈래로 뻗었으나 조상은 같다’는 뜻이다. 1985년 기준으로 노씨 전체 인구는 19만6,284명. 인구가 이 정도이면 굳이 본관을 따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실제로 1987년 대선에서 노씨 문중은 총력으로 노태우 후보를 지원했다.

 

친족들의 조용한 처신

 

노태우는 1932년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盧秉壽)와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밑으로 남동생 둘이 태어났지만 막내는 죽고 둘째 노재우(盧載愚)만 남았다. 신용리는 천수답이 많아 가뭄이 들면 배를 곯아야 하는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노태우는 어엿한 ‘직장’을 갖고 있는 아버지 덕에 이웃보다 곤궁함이 덜했다.

 

하지만 노태우 나이 일곱살때 아버지는 막내 동생 노병상(盧秉祥)이 중학 시험을 치르는 것을 돌봐주러 대구로 가다 버스가 기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지경으로 전락했다.

 

삼촌 노병상의 유언 “장례를 조용히 치르라”

 

30대에 청상과부가 된 김태향은 어린 두 아들을 이끌고 세상 풍파를 헤쳐 나갔다. 그러나 이때 막내삼촌 노병상(盧秉祥)은 자신을 뒷바라지하다 죽은 형님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중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조카 태우·재우 형제를 공부시키기 위해 헌신한다. 노병상은 둘째형 노병도를 찾아 중국으로 갔다가 만주에서 사업을 해 모은 돈을 갖고 5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노태우가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노병상은 1965년 서울에서 한성보일러를 인수해 한성기공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자신이 아들처럼 키운 노태우가 대통령에 오르자 노병상은 “조카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며 주변에 ‘대통령의 삼촌’이라는 사실조차 티를 내지 않고 살다 1988년 8월 조용한 장례식을 당부하면서 작고했다. 동생 노재우씨도 6공화국 내내 소리 없이 지냈다. 대선 때는 노태우의 사조직 ‘태림회’(泰林會)를 조직해 형님의 당선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막상 선거가 끝나자 다시 철저히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1980년부터 한성기공 사장으로 근무하던 노재우는 회장으로 취임했지만 회사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노병상씨의 장남 성우와 차남 용우가 실질적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노재우는 원래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격인 데다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지 말라”는 삼촌의 당부를 의식해서인지 6공 내내 아무런 잡음 없이 조용하게 지냈다. 현재는 (주)성화산업 회장으로 있다.

 

재벌가와의 혼맥

 

노태우의 친가는 이처럼 단촐하고 평범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아들과 딸은 ‘아버지 임기 동안’ 재벌가와 혼인하면서 ‘권력과 돈’의 정략적인 결합이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을 내내 받았다. 노소영은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의 장남 최태원(SK그룹 회장)과 결혼했고, 정치를 지망하던 노재헌은 신명수 신동방그룹 회장의 맏딸 신정화와 결혼했다. 미국 유학중이던 노소영·최태원 부부는 임기말 노태우로부터 ‘스위스은행 20만달러’를 건네받았다가 미국에서 외화 밀반출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고, 15대 총선에 출마하려던 노재헌은 1995년말 터진 노태우 비자금사건으로 꿈을 접었다.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지만 6공때 노씨 종친들은 노태우라는 ‘큰 나무’를 만난 덕분인지 사회 각 분야에서 소리없이 성장했다. ‘九派一原孫 萬同根源’이라는 노태우의 휘호대로 종친들은 본관에 상관없이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다. 순수하게 자기 힘으로 성장한 케이스가 대다수인데, 어쨌든 6공때 주요 직책에 오른 노씨(盧氏)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盧信永은 서울대 법대를 나와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직업외교관 생활을 했다. 인도 대사(73), 외무부 차관(74), 제네바 대사(76)를 거쳐 1980년 외무장관에 기용되었다. 이때 노태우가 장관 추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신영은 그후 안기부장(82)과 국무총리(85∼87)로 정치적 성장을 거듭했는데, 민정당 대표 노태우와 ‘노-노체제’를 구축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노태우에게 수행비서 이병기를 추천한 인물이 바로 노신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포스트 전두환’에 대한 시각차이로 관계가 서먹해졌다. 현재는 롯데복지재단 이사장.

 

▷당대의 보수주의 논객 노재봉(盧在鳳)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에서 6공 출범과 함께 대통령 정치특보로 ‘발탁’되어 비서실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승승장구하며 한때 대망론까지 나왔으나 이를 견제하는 YS의 공세로 꺾였다. 현재 명지대 석좌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외무관료 노창희(盧昌憙)는 5공때 나이지리아 대사·외무부 본부대사로 있다가 6공화국 초대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이후 유엔 대사, 외무차관, 영국대사를 지냈다. 현재는 전경련 상임고문.

 

▷노건일(盧健一)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내무관료로 진출해 5공때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충북지사를 지낸 후 6공 들어 산림청장, 내무차관, 청와대 행정수석,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현재 인하대 총장.

 

▷노재원(盧載源)은 노태우와 나이가 같은 교하 노씨 동본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외무부에 들어가 1979년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있을 때 노태우의 추천으로 금진호(국보위 상공위원장)와 함께 국보위 외무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 5공때 외교안보연구원장, 외무차관,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고 6공 이후에는 외무부 본부대사, 초대 중국대사 등을 지냈다. 지금은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노인도(盧仁道)는 교하 노씨 동본으로 벼락출세한 케이스. 충남 아산 둔포면 농협조합장이던 노인도는 1990년 농협중앙회 초대 상임감사가 되더니 92년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래서 ‘종친 덕을 보았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노인환(盧仁煥)은 10대 국회의원(거창·산청·함양)을 지내고 5공때 정계를 떠나 전경련 상임부회장을 했다. 6공 들어 13대 전국구 의원을 지낸 뒤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민정당 대표를 지낸 권익현을 밀어내고 산청·함양 공천권을 따냈다. 3선으로 국회 재무위원장을 지냈다.

 

▷노정기(盧正基)는 노태우와 육사 동기다. 5공때 제2공병단장을 역임한 뒤 준장으로 예편했다. 주미 대사관 정무공사를 거친 후 6공때 필리핀 대사와 외무부 본부대사를 지냈다.

 

대통령을 에워싼 처족

 

노태우 친가쪽이 고만고만한 서민층 집안이라면 처가인 김옥숙 집안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명문가다. 처가쪽 사람들은 모두가 노태우 대통령의 도움 없이도 각자의 영역에서 터를 닦은 상류층 인사들이었다.김옥숙은 1935년 아버지 김영한(金永漢)과 어머니 홍무경(洪戊庚) 사이에 3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위로 김진동(27년생)·김익동(31년생)·김복동(33년생) 등 오빠가 셋이고, 아래로 여동생 김정숙(金貞淑·37년생)이 있다.

 

그중에서도 김복동(金復東)은 본의든 아니든 노태우의 정치적 성장 과정에서 밑거름 역할을 했다. 노태우와 김옥숙을 맺어준 사람이 바로 육사 11기 동기생 김복동이다. 나이는 노태우보다 한살 어리지만 경북고 동기동창이다.

 

육사 생도 시절 전두환·노태우 등과 함께 칠성회(七星會)를 주도했다.

 

1952년 육사 생도였던 노태우는 김복동의 집에 자주 놀러다녔고 경북여고 1학년생이던 김옥숙과 자연스럽게 만났다. 처음에는 ‘오빠’ ‘친구 여동생’ 사이로 만났지만 1957년 노태우가 중위로 진급한 뒤로는 연인 사이가 됐고, 김복동이 “태우는 내가 보장한다”며 두 사람의 결합을 뒤에서 도왔다.

 

김복동은 육사 11기 생도대장을 했다. 생도 시절 김복동은 전두환과 함께 동기 그룹에서 양대산맥을 이룰 정도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전두환 소장이 12·12 거사 동참을 제안했을 때 “정치에 참여하지 말고 군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하자는 약속을 잊었느냐”며 거절했다. 5공이 들어서고 타의로 군복을 벗었다. 잠시 낭인 생활을 하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이규광씨가 자리를 비운 한국광업진흥공사 사장에 취임했다.

 

그 자리에서 권토중래를 노리다 노태우 집권과 함께 정계에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6공 시절 ‘청와대 가족회의’ 멤버로 권력의 핵심에 진입했고, 그래서 한때 김복동 대망론이 나돌기도 했지만 의 친인척 불가론에 걸려 좌절했다. YS의 등장으로 정치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또 다시 정치낭인으로 떠돌다 지난해 세상을 떴다.

 

박철언(朴哲彦)은 ‘6공의 황태자’로 불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5공청산, 북방외교, 3당합당 등 6공화국의 굵직한 ‘기획’이 그의 머리 속에서 나왔고,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철언의 어머니 김당한씨가 김옥숙의 부친 김영한과 남매다.

 

박철언은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다. 1969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육군법무관으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해 유신 시절에는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12·12 이후 국보위 법사위원 겸 전두환 장군 법률특보로 5공화국 헌법을 기초하기도 했다. 5공 때는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법률비서관,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을 역임했다. 1997년 대선때 DJ캠프에 가담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역할’을 받지 못했다.

 

금진호는 노태우의 손아랫동서다. 대륜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잠시 은행원 생활을 할 때 중매로 이화여대 약대를 나온 김정숙(金貞淑)과 결혼했다. 금진호는 상공부 국장, 특허청 소장 등을 지내다 1980년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5공에서 상공부 장관, 한국소비자보호원장을 역임했다. 무리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6공 때는 한국무혁협회 고문 등을 지내며 특별한 직책을 맡지 않았지만 세간에서는 ‘경제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2년 경북 영주·영풍에서 민자당 공천으로 14대 국회에 진출했다.

 

그는 6공 말기에 청와대 가족회의에서 YS를 적극적으로 밀었다. 1991년 간암으로 세상을 뜬 YS의 핵심 측근 김창근(金昌槿) 전 교통부 장관과 동향으로, 각별히 친했는데 그 인연으로 민주계와 가까워졌다고 한다. 1992년 대선에서는 ‘5공의 금융황태자’ 이원조(李源祚) 의원과 함께 대선자금 조달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국제무역경영연구원장이다.

 

친인척 모임 3인방의 운명

 

김진동은 대구 종로학원장을 지냈다. 영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전력공사에 근무했고, 1980년 요금과장으로 정년퇴직했다. 이후 줄곧 학원을 운영했다. 1987년 당시 경북대 보건대학원장이었던 김익동(金益東)은 정형외과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의학자이자 교육자다. 경북대 의대를 나오고 미국 피츠버그대 정형외과에 근무하기도 했다. 경북대 대학원장과 총장까지 역임하고 현재는 경북대 명예교수로 있다. 부인 김경숙씨도 영남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노태우의 청와대 가족회의는 1987년 대선 때부터 시작해 임기말까지 이어졌다. 김복동·금진호·박철언이 주요 멤버였는데, 임기중 사돈 관계를 맺은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과 신명수 신동방그룹 회장이 중간에 합류했다. 가족회의의 연락은 청와대 제1부속실에서 했다. 당시 제1부속실장은 윤석천(尹錫千·현 동아일렉콤 전무)이었는데 대통령 지시사항을 직접 처리했다. 따라서 청와대 친인척 회동은 부속실과 일부 경호 관계자들에게만 노출되었을 뿐 비서실에서도 친인척 회동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노태우 시절 청와대 가족모임은 크게 세가지 형태였다. 명절이나 혼사때 부인과 자녀까지 동반하는 모임, 토요일 오후 테니스 모임, 그리고 정국현안이 발생했을 때 소집하는 3인방(김복동·금진호·박철언), 또는 5인방(최종현·신명수) 가족회의. 테니스 모임에서는 금진호와 김복동이 주로 노대통령을 상대했다. 운동을 끝낸 뒤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한 대화가 이뤄졌다고 한다.

 

핵심은 역시 청와대 가족회의. 회동 내용이 외부에 알려질 때마다 정국은 요동쳤고, 그럴수록 당과 국회 그리고 언론에서는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파악하기 위해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정국운영의 방침과 ‘가장 민감한’ 차기 대권구도가 이 모임에서 결정되었다.

 

YS는 이 청와대 가족회의를 역으로 활용했다. 정적인 박철언 제거 등 노태우에 대한 압박이 가족회의라는 채널을 통해 은밀하게 작동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차기 정권은 ‘친인척 및 군 출신을 배제한다’는 원칙. 민주계 입장을 대통령에게 전달한 인물은 금진호와 신명수 신동방그룹 회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명수 회장이 친YS 입장을 취한 것은 부친인 동방유량 창업자 신덕균(申德均)씨가 YS의 부친 김홍조(金洪祚)옹과 가까운 사이였던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YS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가족회의는 그 자체가 힘의 이동을 따라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권력의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했다. 당시 여권의 분화 과정에서 김복동·금진호·박철언은 민자당 내부의 힘의 구조를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후보는 경선으로 뽑아야 한다는 원칙론을 강조한 김복동, 내각제 합의각서 파동 등 YS와 권력투쟁까지 불사했던 박철언, 그리고 노태우에게 YS 불가피론을 전달한 금진호.

 

공교롭게도 이들 3인방은 1992년 14대 국회에 나란히 정계에 진입했고, 대권 막바지에 김복동(11월)과 박철언(10월)은 민자당을 탈당해 정주영의 국민당에 합류했다.전두환의 친인척이 권력형 비리와 이권 개입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면, 노태우의 친인척은 정치권력 자체를 차지하고 정국을 운영하는 주체로서 활동했다.

 

노대통령 퇴임 이후 임기 동안의 일로 곤욕을 치른 케이스는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된 박철언 정도가 고작이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의 여파로 지금도 간간이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은 신명수 회장과 동생 노재우. 노태우는 자신이 조성한 비자금 중에서 신회장에게 230억원, 노재우에게 129억여원을 주었다.

 

지금도 법원은 노태우씨의 비자금 사용처를 파악해 남은 재산을 환수하고 있다. 두 사람은 “다 써버렸다”는 입장이지만 신회장 재산에 대해서는 가압류 등을 통해 환수를 추진하고 있고(현재까지 동산 가집행을 통해 1,760만원 환수), 이재우에 대해서는 재판이 진행중이다.

 

- 월간중앙 (20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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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소리없이 주요 직책에 포진한 친인척들 /

YS 친인척 ‘정치금지’ 대원칙 차남(현철)으로 빛바래

 

歷代 대한민국 대통령의 宗親 그리고 친인척 관리스타일(2부)

 

글·오민수 월간중앙 기자;자료 도움·김두봉 역사연구가(simu@joongang.co.kr;)

 

●DJP연합 드라마의 조연 가락중앙종친회, DJP 공조 파기 이후…

●형 때문에 고생한 동생들, 大義씨는 먼저 죽고 大賢씨는 언론을 피하고

●인텔리 집안 妻家, 처조카 영작(한양대 석좌교수)·형택(預保 전무)에 관심

 

金大中·金海 金氏, 변방 三韓甲族 후예의 등극

 

김대중 대통령의 본관은 김해(金海) 김씨(金氏)다. 서기 42년 가락국(가야국)을 창건한 김수로(金首露)왕을 시조로 모셔 가락(駕洛) 김씨라고도 한다. 김해 김씨는 한국 최대 씨족이다. 김해 김씨 종친회인 ‘가락중앙종친회’는 전국의 종친(김해 허씨와 인천 이씨 포함)을 대략 600만명으로 추산한다.

 

남북한을 다 합하면 8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스웨덴 인구(750만명)보다 많은 숫자다. 김해 김씨는 신라(新羅) 김씨(金氏)의 알지계(閼智系)와 함께 김씨(金氏)의 양대산맥을 이루며 명문거족으로 번성했다.

 

600만 종친 거느린 최대 성씨

 

가락중앙종친회는 김해 김씨를 비롯, 김해 허씨(許氏), 인천(仁川) 이씨(李氏)로 구성됐다. 3성(姓)이 한데 모인 이유는 물론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가락국 수로왕과 아유타국(인도)에서 건너온 공주 허황옥의 혼인은 역사상 최초의 ‘국제결혼’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10남2녀를 낳았다. 그런데 허황옥의 간곡한 청으로 장남만 아버지 성을 따르고 2남은 허씨 성을 따랐다. 인천 이씨는 허씨에서 갈라졌다.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해 하동 7불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3성은 해방 이후 따로 종친회를 조직했다가 1964년 4월 시조의 나라 이름을 따 가락종친회로 통합하고 1967년 12월 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김대통령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安敬公派) 13대손이다.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도 김해 김씨 안경공파다. 김해 김씨 148개 분파 중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같은 종친, 같은 문파가 배출(현 정권 출범 당시)한 것도 기네스북감이다. DJ와 JP, 그리고 DJ의 정치적 선배이자 장면 정권에서 보사부 장관을 지낸 김판술(92)씨 등 세사람은 가락중앙종친회 고문이다. 현재 종친회장은 김봉호 전 국회부의장이 맡고 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해임안 문제로 끝내 갈라선 DJP 공동정권을 가장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본 ‘세력’이 있다면 아마도 가락중앙종친회일지 모른다. 물론 가락종친회는 정치집단이 아니다. 그러나 전국 면단위까지 지부 조직을 갖추고 있는 이 거대 씨족의 정치적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1997년 대선때 양김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막후에서 뛴 사람들은 양김의 측근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가락종친회는 양김 후보단일화를 위해 발벗고 나섰고, 마침내 김해 김씨 정권을 탄생시켰다.

 

기자는 DJP 공동정권이 붕괴된 직후인 9월6일 서울 마포구 신공덕동에 있는 가락중앙종친회를 찾았다. 사무실 중앙에 걸려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가 인상적이었다. ‘동방대성 點璣㈐?천파일본 만지동근’(東方大姓 三韓甲族 千派一本 萬枝同根·동방의 대성이고 삼한갑족이며 파는 많지만 한 뿌리에서 나왔으며 수만 갈래로 나누어져 있지만 그 근원은 같다). 가락종친회에 대한 기초자료를 챙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종친회의 두 어른인 DJP가 순식간에 정치적 동반자에서 정적(政敵)으로 돌변하는 과정을 지켜본 그들의 심정이 어떤지 궁금했다. 종친회 관계자의 말이다.

 

“우리가 정치세력은 아니지만 지난 대선때 전국의 각 종친회 조직이 DJP 공동정권의 승리를 위해 애쓴 것은 사실입니다. 김대통령이나 김종필 명예총재 모두 종친회에 대한 기여도가 매우 큰 분들이고, 종친회에서도 두분이 함께 국정을 이끄는 데 대해 무한한 자긍심을 가졌는데…. 정치하시는 분들이 결정한 일에 대해 뭐라고 의견을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두분이 다른 길을 걷는 것이 안타깝죠.”

 

불과 한달 반 전만 해도 가락중앙종친회는 DJP 공동정권 밑에서 마침내 가락인의 한이 풀리고 1,500년 묵은 기원이 영글어가는 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 보았다.

 

한반도를 오르락내리락하던 장마가 가는 비를 흩뿌리던 7월19일, 경상남도의 고도(古都) 김해시. 역사학계에서 주목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바로 500년 가야사를 복원하기 위한 ‘가야문화환경정비사업’ 기공식이었다.

 

신라(新羅)에 무너져 정사(正史)에서 푸대접받아온 ‘망국(亡國) 가야국’의 역사적 위상을 되찾아 주려는, 가락국의 시조 수로(首露)왕의 후예들인 가락중앙종친회가 숙원사업으로 추진해온 일이 하나둘씩 열매를 맺어가는 뜻깊은 자리였다. 1,300억원이 투입되어 2003년까지 완공되는 김해 고도 복원사업은 가락인들의 꿈이었으며 동시에 김대중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광복후 일본의 실증주의 사학이 지배한 우리 역사학계에서 가야사는 아직도 ‘복원’되어야 할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 정사로 인정받는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아예 가락국이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역사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락국 멸망 이후 김해 김씨가 배출한 최고의 인물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이다.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은 김해 김씨 문중에서 중시조로 불린다.

 

하지만 고려 시대로 접어들면서 간헐적으로 중앙 정치 무대에 인물을 배출하던 김해 김씨는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영 빛을 보지 못한다. 조선 성종 때 “용재총화”의 저자인 성현은 가락 김씨를 “옛날에는 성했다 지금은 쇠한 씨족”이라고 표현했다.

 

조선시대에 배출된 366명의 정승 중에서 김씨가 52명인데, 이중 김해 김씨는 숙종때 우의정을 지낸 갑봉 김우항뿐이다. 문과 급제자도 122명으로 턱없이 적다. 오늘날 인구가 30만명 안팎인 청송(靑松) 심씨(沈氏)가 224명, 20만명인 여흥(驪興) 민씨(閔氏)가 233명을 배출한 것에 비하면 김해 김씨 문중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위축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김해 김씨가 조선조에 배출한 역사적 인물이 없지는 않다. 무오사화때 억울하게 희생된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과 조선 제1의 화가 김홍도,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등이 그들이다.

 

정치적 변방이던 가락종친회의 恨

 

그 때문인지 우리나라 씨족 중에서 가장 후손이 많고 역사가 오래 된 김해 김씨 문중에게는 조상님께 떳떳하지 못한 뿌리깊은 죄책감 같은 것이 있다. 김해 김씨는 현재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거대 성씨’(巨大姓氏)로서 한민족 최대 세력으로 불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역사를 복원하지 못했다. 인구수로는 삼한갑족이되 오랜 세월 정치적 변방으로 밀려난 현실적 힘의 약세 탓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행사 관련 기사가 다음날 조간신문 문화면이 아닌 정치면에 실렸다는 점이다. 여야 지도부가 이 행사에 대거 ‘출동’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김중권 대표와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가 참석해 축사를 했고, 한나라당에서도 김종하 국회부의장과 김영일 국회 건설교통위원장, 김혁규 경남도지사가 축사를 했다. 김대통령은 정순택 교육문화수석을 통해 치사를 남겼다.

 

‘워딩’은 모두 달랐지만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요컨대 고구려·백제·신라 3국 위주로 기술된 한민족 고대사를 가락국을 포함한 4국 시대로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야 유물의 발굴로 인해 역사학계에서 얼마 전부터 논쟁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여야의 정치지도자들이 정식으로 ‘발제’했다는 점에서 예사로 보아넘길 문제는 아니다. 요컨대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는 문제인 것이다.

 

어쨌든 이날 행사에 대한 유력 언론들의 정치면에 실린 기사 요지는 천편일률적이었는데, 제목도 ‘여야, 김해 김씨 구애(求愛) 경쟁’ 등으로 비슷했다. 행사의 역사적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표밭을 의식한 여야 지도부의 행태를 꼬집는 투였다.

 

DJ의 종친 사랑

 

대체 가락종친회가 뭐길래 여야 지도부는 언론으로부터 ‘구애’라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면서 이런 풍경을 연출하는 것일까.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1, 2위가 수시로 엎치락 뒤치락하던 1997년 대선 레이스에서 DJP연합군단과 이회창사단은 ‘피차간에’ 가락중앙종친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똑똑히 보았다.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에 앞서 최근 대두하고 있는 ‘JP 대망론’과 관련한 해프닝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5월3일 자민련 변웅전 대변인은 김봉호 가락중앙종친회 회장의 말을 옮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음 대권도 김해 김씨에서 나올 것이라고 인도의 점성가가 말했는데 이는 JP를 가리킨 것이다.”

 

인도 점성가 예언의 신빙성 여부는 제쳐두자. 대통령선거가 씨족장을 뽑는 추장선거가 아닌 다음에야 국정을 책임진 공당의 대변인 입에서 나올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대변인이 버젓이 유권자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이 말이 다시 ‘JP 대망론’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김해 김씨 문중의 오랜 꿈이 재집권을 향해 또 다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유권자의 15%를 차지하는 가락종친회 문중의 선거에서의 위력을 의식한 발언이었을까?

 

선거에서 가락중앙종친회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 두가지.

 

첫째, 지난 대선 개표때 경북 봉화군 상운면 제4투표소에서는 아무도 예기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싹쓸이’하다시피 한 경북이었다. 그런데 유독 이 투표소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리드했다. 김해 김씨 집성촌에서 몰표가 나온 탓이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1992년 대선 때까지는 가락중앙종친회가 단결하지 못했다. JP가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에도 김해 김씨 종친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DJP가 똘똘 뭉친 1997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영남, 특히 경남에 기반을 둔 김해 김씨 문중표만 끌어들이면 박빙의 리드를 굳힐 수 있는 국면이었다. DJ는 당연히 가락종친회에 정성을 쏟았고, 가락종친회 문중에서도 적극 호응했다.

 

둘째, 충북 진천은 전통적으로 여당 세(勢)가 강한 지역이지만 1992년 대선때 ‘뜻밖에도’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 후보를 눌렀다. 충청남북도 34개 선거구 중에서 DJ는 유일하게 진천에서만 1위를 했다. 진천은 김해 김씨 집성촌이자 김해 김씨의 중시조인 김유신이 태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가락국을 합병한 이후 신라는 가락국 유민들을 접경지역으로 이주시켜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정책을 폈는데,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태수로서 고구려와 대치했던 곳이 이곳인 만큼 망국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DJP가 손을 잡은 1997년 대선때 DJ는 이 지역에서 이회창 후보를 더블스코어로 앞섰다.

 

물론 이처럼 김해 김씨 집성촌에서 몰표가 나오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놓고, 1997년 대선에서 실제로 전국의 종친들이 누구를 찍었는지는 통계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가락중앙종친회가 종중 차원에서 DJP 후보단일화 압박에서부터 표몰이에 이르기까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사건’도 많았다.

 

1997년 1월 가락중앙종친회 신년교례회때 DJ와 JP는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영정 앞에서 후보단일화를 맹세했다. 한국내 최대 씨족임에도 불구하고 서기 532년 나라가 망한 이후 1,500년 동안 단 한번도 ‘왕’을 내지 못한 한을 풀어보자는 문중의 염원이 양김을 압박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치권은 600만명 거족(巨族)의 움직임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가락중앙종친회 단일후보가 되기까지

 

그해 10월16일 경남 김해시에서는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 3개 성씨의 종손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락국 시조대왕(김수로왕) 추향대제가 열렸다. DJ와 JP도 나란히 참석했다. 원래 중앙종친회에서는 이날 ‘고유제’도 함께 올릴 예정이었다. 고유제는 문중의 인물이 나라의 최고 권좌에 오르는 것을 조상들께 알리는 행사로 대선 출마 신고식인 셈이다. 그러나 JP의 요청으로 고유제는 뒤로 미뤄졌는데 내각제 합의 문제로 양측의 후보단일화 문제가 타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도 김종하·김형오·김무성 등 김해 김씨 소속 의원을 보내 김해 김씨 종친표를 의식한 물밑 활동을 벌였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11월3일 마침내 DJP 합의문을 발표했고, 11월21일 경남 김해에서는 가락중앙종친회 고유제가 열렸다. 이날 가락중앙종친회 김영준 회장은 “김대중 고문과 김종필 고문은 종친회 발전에 앞장선 분들이다. 이번 대사를 성공적으로 이끌도록 모두 단합해 전진하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대선에서 DJ를 찍자는 노골적 표현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종중 차원의 DJ 지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DJ도 고유제를 마친 뒤 인사말을 통해 “김종필 총재의 양보 덕분에 가락종친회의 단일후보로 나서게 됐다. 가락종친회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으면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솔직히 내가 가장 약한 곳이 영남지역인데, 이곳에서도 남 못지않게 표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중앙선관위에서는 중앙종친회 김영준 회장의 발언이 선거법을 위반했다며 경고조처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DJ가 ‘가락종친회 단일후보’로 나서자 한나라당 가락종친회 회원들이 자격 시비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당시 김종하·김영일·김용갑 의원 등 가락종친회 소속 여당 의원 16명은 성명서를 내고 “김대중 총재가 진짜 우리 문중 사람인지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신 때부터 DJ를 곤혹스럽게 했던 ‘성씨 시비’를 재론한 것이다.

 

1970년대말 목포지역 가락종친회 명의로 ‘DJ는 가락 김씨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정체불명의 괴문서가 나돈 적이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한때 DJ는 가락종친회에서 푸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를테면 1980년 봄 가락종친회 춘향대제에 참석한 DJ에게 종친회에서는 금관제복 입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DJ는 검은색 일반제복을 입고 시조묘에 참배하는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물론 선대 때부터 종친회 일에 물심으로 공헌한 JP는 당당히 금관제복을 입고 참배했다.

 

어려서 부친을 잃은 DJ는 장성할 때까지 김해 김씨 종친과는 인연을 맺을 기회가 없었고, 김씨 문중에서 전통적으로 쓰는 돌림자도 사용하지 않아 일부 종친들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했다. 더구나 DJ는 야당 지도자로서 형극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정부를 상대로 문중의 숙원사업을 펼쳐가야 할 입장인 가락종친회와는 거리감이 없지 않았다. 가락중앙종친회 관계자에게 이런 ‘오해’와 관련해 물었더니 “잘 알고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아직도 종친들 사이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지만 족보에 다 나와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종친회에서 고문으로 모시고 있는 분이다. 재론의 여지가 없다.”

 

1980년대 이후 DJ는 가락종친회에 지극한 정성을 쏟았다. 문중의 대소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숙원 사업에는 정치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9년말 가락종친회의 숙원이었던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정비사업에 대한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당시 가락종친회에서는 이 문중사업을 국가 사업으로 승격시키려고 종친 국회의원들을 앞세워 추진했지만 정당간 이해관계 때문에 예산 확보가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DJ가 예결위를 앞두고 평민당 의원들을 동원해 예산 확보에 발벗고 나섰고, 결국 20억여원의 거금을 확보해 가락 김씨 문중의 성역 정비사업을 국가차원에서 벌여나갈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DJ를 대하는 가락종친회의 태도는 완연히 달라졌다. 1996년에는 경주의 김유신 장군 묘역 부근 삼림이 전소되자 국민회의 총재였던 DJ가 복구사업에 국고 예산 18억원을 확보해 주기도 했다.

 

인구수로 가락 김씨는 한반도 최대 씨족이기 때문에 건국 이래 정·관·재계에 기라성 같은 인물을 숱하게 배출했다. 워낙 인물이 많기 때문에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차고 의미도 없다. 16대 국회의원 당선자만 헤아려 보자. 역대 국회에서 늘 그러했듯 16대 국회에서도 가락종친회 핏줄들은 원내교섭단체 정족수를 ‘거뜬히’ 넘겼다. 총 25명인데 한나라당 소속으로는

 

김영춘·김영구·김기배·김형오·김무성·김부겸·김용학·김종하·김호일·김학송·김동욱·김영일·김용갑·김기춘·김정숙·김홍신 등 17명, 민주당 소속으로는 김영배·김덕배·김홍일·김충조·허운나·김한길·김기재 등 7명, 자민련에서는 JP가 유일하다. 전체 인구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약 15%)에 합당한 숫자다.

 

- 월간중앙 (20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