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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더 즐거운 의·식·주·樂] 고추, 그 뜨겁고 붉은 세계

풍월 사선암 2010. 8. 10. 08:50

[알면 더 즐거운 의·식·주·樂] 고추, 그 뜨겁고 붉은 세계

 

연둣빛(세계에서 가장 매운 '부트 졸로키아')이

예뻐 한입 물었다… 눈물·콧물… 온몸이 불탔다

올해 상반기 밀수꾼 선호도 5위

최근엔 혈당 조절 등 '기능성' 강조…

청양고추 종자는 美회사가 소유권

 

먹고 입고 자고 즐기는 의식주락(衣食住樂)의 모든 것을 풀어 드립니다. 우리가 즐기는 모든 것에는 과학적인 원리와 역사적인 배경이 숨어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 '알면 더 즐거운 의·식·주·樂'에서는 알면 더 맛있고 더 재미난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관세청은 지난 6일 2005년부터 2010년 상반기까지 6년 동안 밀수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10대 밀수품을 발표했다. 뜻밖에도 고추가 당당하게 5위다(2010년). 1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2008년). 총 금액으로는 246억원어치. 담배, 포도주, 녹용, 인삼도 5위권에 들었다.

 

한국인에게 고추는 각별하다. "'매운맛'은 통점(痛點)이 느끼는 고통"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한국인은 그 매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을 정도로 '엽기적'이다. 여름철 이열치열(以熱治熱) 전술의 최첨단 무기, 고추의 뜨겁고 붉은 세계를 파헤쳐봤다.

 

▲불 폭탄을 얻어맞은 듯한 고통

 

지난 4일 수원 서울대 원예작물육종연구실 시험실습장을 찾았다. 1322㎡(400평)에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200여종의 고추 종자를 키운다.

 

예쁜 연둣빛 고추가 보였다. 인생철학과도 같은 진리 하나. "센 놈은 늦게 등장한다." 매운맛 성분인 캅사이신이 강할수록 고추는 늦게 익는다.

 

만만한 색깔에 인턴기자가 한입 깨물었다. 입 안이 약간 얼얼하다 싶은 순간, 불 폭탄에 얻어맞은 듯 무시무시한 고통이 강타했다.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알이 빠져나갈 듯하고 숨이 막히는 고통이 10여분간 계속 됐다. 인도 원산 부트 졸로키아, 매운 정도가 청양고추의 100배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였다. 인턴기자는 "절대 사람이 먹어서는 아니 될 물건"이라고 했다.

 

▲ 이렇게 매울 수가…. 지난 6일 본지 최우영 인턴기자가 접시 가득 담은 고추

20여종의 ‘매운 맛’을 보고있다. / 이태경 기자

 

▲혈당 조절용 기능성 고추까지

 

매운맛으로 고추 품질을 논하는 시대는 지났다. 대신 21세기 고추의 세계는 다양성의 시대다. 덜 매운 고추 혹은 기능성 고추가 이 시대 고추 연구진의 최대 과제다.

 

2008년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와 강원대, 제일종묘는 공동으로 '당조(糖助) 고추'를 개발했다. 당뇨병 환자용 고추다. 혈당 강하성분인 AGI가 일반 고추보다 4배 이상 들어 있다. 일반 고추보다 덜 매우면서 달다. 값은 3배 정도 비싸다.

 

일본에서는 'CH-19 Sweet'라는 품종을 개발했다. 매운 캅사이신 대신에 매운맛이 없는 캡시에이트 성분이 들어 있는 고추다. 캅사이신과 마찬가지로 땀 배출을 돕는다. 일본에서는 "한국 여자 몸매 유지 비결은 고추"라는 소문이 돌면서 이 같은 다이어트 기능을 가진 고추가 인기다.

 

▲'안 매운 고추'의 원조, 오이고추

 

한국에서는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매운맛을 조절한 고추 개발이 진행 중이다. 4년 전 나온 오이고추가 대표적인 품종이다. 오이고추의 핏줄에는 토종 고추와 중국, 인도네시아, 미국 고추 등이 섞여 있다. 오이와는 상관이 없다. 오이고추를 개발한 종묘회사 사카타코리아 조대환 박사는 "오이고추라는 이름은 마케팅 때문에 붙인 것"이라고 했다. 품종명은 BN54다.

 

농림수산식품부에서는 3년 전 맵지 않은 고추인 파프리카의 국내 종자를 개발하기 위해 사업단을 꾸렸다. 강병철 서울대 식물생산과학부 교수는 "2년 후면 국내 품종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양고추, 그 불편한 진실

 

고추는 원산지 남미를 떠나 지구를 돌고 돌아 한국까지 전래됐다. 그리고 1980년대 한국 매운맛의 대명사 청양고추가 개발됐다.

 

청양고추는 1983년 당시 중앙종묘(현 세미니스 코리아) 유일웅 박사가 개발했다. 유 박사는 2007년 "경북 청송과 영양에서 품종 수확에 성공해 청양고추로 명명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충남 청양군은 "중앙종묘가 1970년대 말 청양농업기술센터에서 종자를 받아가 개량한 것"이라며 청양고추축제를 개최하는 등 우선권을 주장하고 있다. 복잡한 사연은 여기까지.

 

애석하게도 청양고추 종자 소유권은 미국 종자회사 몬산토가 가지고 있다. 몬산토가 씨앗을 팔지 않으면 청양고추를 기를 수 없다. 청양고추를 개발한 중앙종묘는 1998년 종자회사 세미니스에 인수됐다. 이 회사는 2005년 몬산토에 매각됐다. 세미니스코리아는 몬산토코리아의 자회사다.

 

게다가 채종지, 즉 꽃가루를 암술에 묻혀서 씨앗을 만들어 채취하는 고추밭은 중국에 있다. 앞서 언급한 오이고추 또한 종자 소유권은 사카타코리아, 그러니까 일본 종묘회사에 있다. 한국 밥상에 오르는 고추들, 한국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신정선 기자 violet@chosun.com 

최우영 인턴기자 (서울대 식물생산과학부 4년) 

입력 : 2010.08.10 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