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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먹이던 소년, 국민들을 먹이다

풍월 사선암 2010. 7. 16. 08:18

소 먹이던 소년, 국민들을 먹이다

 

<그리운 나라, 박정희>AP통신 언슨 황소같은 국민들 거느려

군인이 경제를 알겠느냐, 다만 다른건 몰라도 가난엔 박사

 

시골 청년 정주영의 ‘소 판 돈’

 

2009년, 새 희망을 얘기하기가 걸맞지 않은 신년이다. ‘가진 자’도 어렵다 하니 ‘못가진 자’는 말할 것도 없다. 소의 해를 맞았지만 소처럼 일하자는 근로의욕을 찾아보기 어렵고, 언필칭 경제대국 10위권의 대한민국엔 목하 낯부끄러운 빈곤, 견디기 어려운 말 못할 빈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물론 오늘의 가난은 보릿고개 시절의 가난과 다르다. 질과 양이 다르다. 그러나 가난은 설움과 고달픔만이 아닌 ‘힘’이기도 하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힘을 주고, 그리고 인물을 키웠다.

 

가난이 지겨운 강원도 시골의 청년이 돈을 벌어 오리라 결심하고 가출을 했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눈 뜨고 코 베어간다는 서울 바닥에 그냥 맨몸으로 부딪쳤다. 가진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집에서 소 판 돈을 훔쳐갖고 나와 그것 때문에 오랜 세월 부모님에 대한 불효와 죄의식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는 결국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사는 부자를 넘어 수많은 사람을 먹여살리는 재벌이 되었다. 현대 창업주 정주영의 경우다.

 

정주영은 박정희 시대라는 시공(時空)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성공은 박정희 시대의 개막과 운좋게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보아 무리가 없을 터이다.

 

 1977년 9월 5일 세 자녀와 함께 구미공단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금성사와 대한전선 등을 시찰하고 옛생각에 잠긴 듯 공단 구내를 바라보고 있다. ⓒ 국가기록원

 

소 먹이던 소년 박정희, 그리고 어머니

 

1960년대의 한국은 5.16혁명의 주인공 박정희를 제5대 대통령으로 선택함으로써 대전환의 시대를 열었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처음 맞은 1964년 정초, AP통신은 한국에 등장한 40대 지도자 박정희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식민지 시절의 시골 소년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캘빈 쿨리지가 미국 대통령이었고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추장 차림을 하였으며, 이승만 씨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을 무렵, 한국의 남쪽 산골에서는 여섯살 난 박정희 소년이 커다란 갈색 황소를 끌고 있었다.”

 

AP통신 아시아총국장 로버트 언슨의 서울발 이 기사는 그때의 소년이 40년 후 대통령이 되어 “커다란 황소 대신에 일할 의욕은 가졌으나 황소처럼 고집 센 2600만 인구를 거느리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소 먹이는 일은 사내아이들의 몫이었다. 그때의 소년은 영양상태가 나빴고 제 또래에 비해 키가 작아 황소를 끌고 다니는 일이 힘에 부쳤다. 그렇게 소를 먹이던 소년이 국민을 먹여살리겠다고 나설 줄을 어찌 알았으랴. 더욱 그가 잊지 못하는, 모진 가난을 부둥켜안고 한숨을 토하던 어머니가 남부끄럽게 40 나이에 배가 불러 지우려 했던 5남2녀의 늦둥이 막내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줄을 꿈엔들 알았을 것인가.

 

1978년 8월13일(금) 비. 어머님 돌아가신 29주째 기제일이다. 1949년 음력 7월 10일 어머님께서는 구미군 상모면 옛집에서 노환으로 타계하셨다. 어머님 연세 79세. 내 나이 32세. 7남매 중 제일 막둥이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어머님을 32년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32년간이라고는 하나 대부분 객지에 있었으므로 직접 집에서 모신 것은 훨씬 짧은 시간이 될 것이다. 서재에 간소한 젯상을 차려 놓고 영정 앞에서 분향하면서 어머님의 명복을 빌다. 조용히 눈을 감고 어머님 생전의 지극하신 사랑을 되새겨본다. 이 세상에서 어머님처럼 나를 사랑해주신 분은 없으리라. 어머님의 사랑은 하늘보다 더 높고 바다보다 더 깊다 하겠다. 어머님 생전에 못다한 효도, 이제 후회한들 막급이라.

 

오직 한 가지 방법은 대통령으로서 성심성의를 다해 선정에 힘써서 보다 부강하고 자랑스러운 조국을 건설하여 후세들에게 물려주는 일. 이것이 어머님 은혜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조국의 발전상을 천국에 계시는 어머님께서도 보시고 기뻐하시리라. 어머님 길이 길이 홍복을 누리옵소서.

 

그가 남긴 일기의 한 부분이다.

 

가난에 대한 경배

 

그가 ‘경제 대통령’이어서 나라를 일으켰을까. 아니다. 애시당초 경제를 모른다며 “군인이 뭘 알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가난에 대해선 박사”라고 자임했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흔해빠진 명예박사 같은 것을 걸치지 않았다. 겉치레가 아닌 실속만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그는 해마다 봄이면 농촌에 가서 모내기를 하고 가을에 벼베기 행사를 꼭 했다. 그걸 ‘쇼’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박정희라면 이를 갈고 부르르 떠는 반대세력 어느 누구도 그걸 트집잡은 적이 없다. 그의 진정성을 정치적으로 폄훼하거나 비방하는 것은 농촌에 대한 모독이고 가난의 한에 대한 경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키우고 나라를 키운 것이 바로 가난이었다. 사람들은 원수 같은 가난을 지긋지긋하게 여겼지만, 그는 “가난은 나의 스승”이라며 어머니 앞에서의 고개 숙임처럼 가난을 경배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8할이 농민인 농업국가이면서 외국에게 빌어먹지 않으면 지탱을 못하는 국가의 현실을 정면으로 상대했다.

 

“어제 마산에서 유세를 마치고 부산으로 자동차를 타고 왔습니다. 연도의 풍경은 대단히 아름다웠습니다. 오곡백과가 대풍년을 이루었습니다. 연도에는 코스모스가 한없이 피어서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단히 부드러운 기분을 주었습니다. 한 곳을 지나오면서 보니까 땅에 납작하게 붙은 쪼매난 오막살이 주막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코스모스가 피었는데 그 코스모스 키가 오막살이집보다 오히려 더 클 정도로 납작하게 붙은 주막집입니다. 거기 어떤 농부 같은 한두 분이 앉아서 막걸리를 이래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맑고 높은 가을하늘, 오막살이 주막집, 코스모스, 두 사람의 농부, 막걸리. 이 광경이 아주 낭만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하나의 낭만이라고 듣고 버려둘 수 없는 심각한 현실이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금년과 같이 이렇게 풍년이 들었더래도 우리나라는 식량 하나 자급자족을 못하는 그런 형편에 있다 이겁니다.”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부산 유세에서 한 말이다.

 

가난의 대명사는 농촌이고 식량이었다. 그는 농촌을 바꿈으로써 식량의 자급자족이 안되던 국가의 오랜 가난을 기어이 벗겨냈다.

 

농촌에 갈 때면 소년처럼...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의 책 <한국경제정책30년사> <아, 박정희>를 보면 농촌 시찰할 때의 행복해 보이는 대통령 모습을 여러 곳에서 거듭 서술하고 있다.

 

집권당인 공화당의 심벌이 황소였고, 선거 때면 ‘농민의 아들 박정희’를 선전했다. 굳이 새마을운동을 말하지 않아도 그의 농촌 사랑은 가슴으로부터 우러나는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뭄 끝에 단비가 오면 그 무섭다던 사람이 한없이 좋아했고, 농촌 시찰을 갈 때면 소년처럼 들떠 있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경기도 광주의 모범부락을 시찰하러 갈 때의 일화 한 토막.

 

대통령 차가 광나루를 지났을 무렵, 농부들이 끌고 가는 소들로 길이 메워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광주의 장날이었다. 대통령 차 행렬이 다가가자 모두 길가로 비켜 서는데 그중 소 한마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소 주인은 당황해서 고삐를 마구 잡아당기고 차에서 경적을 울리는데도 막무가내로 비키기를 거부했다.

 

고집불통 소에게 대통령이 한마디 던졌다.

 

“임마, 나를 몰라 봐? 내가 ‘황소당’ 총재란 말야.”

 

그 소리에 조바심을 내던 수행원들이 폭소를 터뜨리자, 진땀을 빼던 소 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잘살게 된 농촌을 보고 기분이 좋을 때면 유머로 주변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던 박정희.

 

김정렴은 그의 농촌 사랑을 “빈농 출신으로 농촌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대통령의 빈곤 타파를 위한 충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 구미공단 구내의 ‘박정희 소나무’ ⓒ 구미시 홈피

 

‘박정희 소나무’의 전설

 

이제는 농가에 외양간은 없어도 농기계가 있고, 명절이면 귀향한 가족의 승용차가 마당에 들어선다.

 

농사의 절반을 담당했던 소는 노동에서 벗어나 한우라는 이름의 ‘고깃덩이’로 변했다. 그러나 우리는 소에게 미안함을 금할 수 없는 정서를 갖고 있다. 노동과 헌신의 이미지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더욱이 외로운 노인들뿐인 농촌에서는 소가 식구와 다름이 없다. 소의 끼니를 거를 수 없어 하루라도 집을 비우는 나들이를 하지 못한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보면 “시골 쇠도둑놈은 서울놈에 비하면 양반이다. 서울놈들은 새알 볶아 먹을 놈들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야말로 소설다운 표현이다.

 

요즘의 쇠도둑은 다르다. 단순 절도가 아니다. 외로운 시골 노인들의 식구 같은 생명체에 대한 납치살해에 다름 아니다.

 

전에 흥미로운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2005년 봄, 전라북도에서 한우 절도단을 검거한 소식이었다. 쇠도둑을 잡아놓긴 했는데 수십 마리 소의 주인을 어떻게 찾아줄 것인지가 문제였다. 사람들이 나타나 자기 소라고 주장하는 대로 다 들어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담당자들의 고민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가 주인을 알아보고 뚜벅뚜벅 걸어오는데 담당자들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토록 소는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다.

 

농부는 자기 소의 영각 소리, 발걸음 소리, 숨소리만 들어도 알게 마련이다.

 

지난해 LG그룹의 구미 공장 구내에 ‘박정희 소나무’가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1970년대에 대통령 박정희가 흑백TV를 생산하던 금성사 공장을 방문하고 이 소나무를 보더니, 어린 시절 풀 먹이던 소를 여기에 매어 두고 책을 읽던 일을 회상했다고 한다. 직경 1미터, 높이 12미터에 수령이 2백60년 된 곰솔이다.

 

LG 측은 구미공단 조성 초기에 사업장을 신축하면서 이 소나무가 수령이 오래된 점을 고려해 그대로 살렸고, 그후 소나무는 몇번 고사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영양제를 주사하며 정성으로 보살펴 양호한 건강 상태를 유지해 왔다.

 

이같은 사연이 알려져 관계 당국은 2000년 6월 이 소나무를 경북도 보호수로 지정했다. 그후 구경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외국 바이어와 귀빈들이 방문하면 으레 소나무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한다고 한다.

 

그때의 박정희는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까. 대나무와 탱자나무숲을 등지고 산자락에 들어앉은 납작한 초가집, 아버지가 칠곡에 살다가 그곳으로 이사올 때 알량한 살림살이의 전부를 황소 한 마리 등에 싣고 왔다는 것, 그가 공부하던 처마 밑에 닭둥우리가 매달려 있던 작은 토방과 그 옆에 붙은 외양간, 그리고 소여물을 끓이는 큰 가마솥을 걸었던 부엌을 그려보았을 것이 아닌가.

 

소를 끌고 나와 풀을 먹이고 나무에 매어놓고 책을 보던 자기의 모습과, 그런 자기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허연 김을 한숨처럼 뿜어대며 뜸베질하던 소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그 소의 워낭 소리와 영각 소리가 다시 귓전을 울렸을 것이다.

 

 1972년 4월 4일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왕곡리 새마을사업 현장을 돌아보는 길에 어린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다. ⓒ 국가기록원

 

모세는 가나안땅을 밟지 못했다

 

소 먹이던 소년 박정희가 5.16으로 역사에 등장한 1961년이 우연히도 소의 해였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묵묵히 헌신하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풀을 먹고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소처럼 그는 사심없는 국가경영으로 자본도 기술도 없었던 불쌍한 대한민국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

 

가난이 정주영을 키우고, 그가 갖고 나온 ‘소 판 돈’이 현대그룹의 재산으로 탈바꿈한 것도 박정희 시대였다.

 

“국민들을 절대빈곤에서 탈출시켜 제대로 먹고 입게 만들겠다는 것이 그분 평생의 집념이었어요. 그게 박 대통령의 통치철학이었고, 좌우고면 안하고 그 길로 매진한 겁니다.”

 

전 국회의장 박준규의 말이다.

 

대통령 박정희의 국가경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황소고집’이다. 그 시대의 ‘대한민국 열차’는 경제라는 동력(動力)을 중시하고 정치는 뒤에 붙인 차량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는 정치바람으로부터 경제 각료들을 막아주고 국보(國寶)처럼 아끼면서, 정치는 백안시하고 혐오했다. 제3공화국의 정치는 겨울이었다. 그의 황소고집으로 정치는 짓밟혔다. 그러나 겨울철 보리밭처럼 밟았다고 본다면 그것이 보리를 밟아 죽이고자 함이 아니듯이 정치도 마찬가지로, 결국 그 시대의 산업화가 바로 민주화의 골격임을 깨닫게 된 것이 얼추 2000년을 넘어서였다.

 

“아버님은 구약의 모세처럼 이 민족을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까지 인도하시기는 했지만 아버님 자신은 그 땅을 밟지 못하실 운명이었던가 봅니다.”

 

박근혜의 말이다.

 

그렇다. 국가경영의 화두(話頭)는 가난으로부터의 엑소더스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켜 홍해를 지팡이로 가르고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지만 그 자신은 가나안을 밟지 못하고 죽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허리띠를 조이기만 했지, 허리띠 풀어 먹고 마시는 세상을 국민(후세)의 몫으로 넘겼다.

 

그런 박정희를 우리가 제대로 알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지금의 우리는 왜 빈곤을 견디기 어려운 것일까. 새해에 새 희망을 말하는 목소리가 왜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일까.

 

금년 고인의 30주기를 맞으면서 가슴에 회한이 솟구침을 금할 수 없다.

 

김인만 작가 (2009.02.01)  김인만 작가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