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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정부가 선정한 한국전쟁 4대 영웅 故 김동석선생

풍월 사선암 2009. 7. 10. 22:18


미국정부가 선정한 한국전쟁 4대 영웅 故 김동석선생
 

 

북파공작원 대부 김동석은 누구인가?

 

‘전쟁영웅‘ 김동석(82) 예비역 대령은 철저하게 비밀을 요구하는 첩보부대 특성상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오히려 회고록이 소개되는 과정에서 중견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더 크게 부각될 정도로 지금까지 김씨는 한국전쟁과 북파공작활동에 얽힌 비밀들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어 왔다.

 

김씨에 대한 평가는 미국 정부가 정전협정(1953.7.27) 체결 50주년을 앞두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한국전쟁 기념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김씨를 맥아더.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 및 백선엽 육군 대장과 함께 김씨를 한국전쟁 4대영웅으로 선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 주둔 중인 미 제2보병사단은 2002년 5월7일 경기도 의정부시 소재 캠프 레드 클라우드 내 사단 전쟁박물관에 ’김동석 영웅실’을 만들고 김씨에게 ‘전쟁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육사 8기 출신인 김씨는 제17연대 11중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여 해 박성철이 지휘한 북한군 15사단을 전멸시켜 부대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김씨는 1950년 9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소속 미군 연락장교로 발령받아 첩보세계에 입문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서 결정적 첩보를 수집하는 전과를 올렸다.

 

김씨는 최초로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 105전차사단 제1대대장 김영 소좌가 포로로 잡히자 끈질긴 설득작업을 벌인 끝에 평양 입성작전에 필요한 결정적인 정보를 수집해내기도 했다. 그는 육군첩보부대 1사단 지구대장을 거쳐 1952년부터 1961년 5.16쿠데다가 발생할 때까지 동해안 첩보업무를 담당한 제36지구대를 이끌었다. 그는 1954년 2월 강원도 통천 부근 원산 만에서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를 생포 납치했고 휴전 이후에도 동해안 일대에서 북파공작업무를 진두지휘했다.


김씨는 1923년 8월 함경북도 명천 칠보산 기슭이 고향이다. 중국 국민당 애국의용대 부대장과 백범 김구선생 경호원 등을 역임했고, 대한유도회 부회장(유도8단) 과 한미친선 골프회 회장등을 지냈다.

 

김동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김일성을 4분 차이로 놓쳤다고 한다. "1952년 8월 북한군 17사단장 이.취임식 참석차 원산에 들른 김일성을 잡기 위해 현장에 투입됐는데 예상보다 이른 새벽에 평양으로 떠나는 바람에 놓쳤다"고 말했다. 당시 김일성이 남긴 담배꽁초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김씨는 2년 뒤인 54년 2월에는 적진인 강원도 통천에 침투, 북한군 사단장 이영희를 설득해 귀순토록 했다고 주장했죠. 김씨는 이 같은 자신의 북파공작 활동을 담은 'This man, 전쟁 영웅 김동석'이란 회고록을 최근 펴냈답니다. 'This man'은 50년 9월 맥아더 장군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라네요.

 

그는 50년 7월 강화도를 경유, 인천으로 잠입한 뒤 서울 지역에 주둔 중이던 북한군의 위치와 현황 등 상세한 첩보를 유엔군사령부에 보냈죠. 맥아더 장군은 김씨의 첩보를 면밀하게 검토한 끝에 "'This man'이 보낸 것이면 오케이"라며 인천상륙 작전에 들어갔다 고 합니다.

 

그때부터 김씨는 남북한 공작원들 사이에서 'This man'으로 불려 왔다는군요.

 

 

김씨가 서울에서 국군에게 체포된 북한군 105전차사단 제1대대장 김영 소좌를 설득해 얻은 정보는 국군의 평양 입성에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고 합니다. 미국은 김씨의 공로를 인정해 2002년 5월 경기도 의정부 미 2사단 내의 전쟁박물관에 '김동석 전쟁영웅실'을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난 김씨는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맡았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해방 직후 소련군에 체포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호송 중이던 박정희와 정일권을 헤이룽장성 부근에서 탈출시켜주었다"고도 주장했죠.


그는 육사 8기로 임관한 후 6.25 전쟁 중 육군첩보부대(HID) 창설 요원으로'공작원 세계'에 뛰어들었습니다. 일제 때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던 부친을 따라다니며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을 익혔던 것이 첩보부대 창설에 관여하게 된 이유가 됐다고 했다는군요.

 

아직도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김씨는 대령으로 예편한 뒤 강원도 삼척 군수와 강릉 시장, 목포 시장, 함경북도지사, 대한유도회 부회장 등을 지냈죠.


중견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씨가 딸이랍니다.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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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특수임무수행자모임의 반대규 고문이 촬영한 것입니다>

가족들이 영정을 모시고 있다

영정과 가족들

슬픔에 젖은 아들과 가족들

젊은 특수임무수행자들의 마지막 인사!

오열하는 딸 진미령

가족들과 도열해 있는 특수임무수행자들

원로 국가 유공자들

아들과 스님

전쟁 영웅의 아들과 딸

장례식장의 가족 친지

보수들의 집회에서 열심히 활약하는 반대규!

 

6월이면 생각나는 ‘이 사람’- 북파 공작원의 대부

6.25가 낳은 불세출의 전쟁영웅 김동석 HID지대장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옛말이 있다. 특히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특출한 인물이 등장해 용맹을 떨치며 국난을 평정한 사례가 자주 있었다.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장군, 당태종과 양만춘 안시성주, 임진왜란과 성웅 이순신, 청산리대첩의 이범석 장군 등등......


우리역사에는 이런 사례가 많다. 현충일과 보훈의 달을 맞아 6.25가 낳은 불세출의 전쟁영웅이며 북파공작원의 대부인 김동석 전 HID 36지대장을 조명해 본다.


이글은 36년 기자생활을 통해 가장 잊을 수 없는 분으로 각인된 그분 생존시 여러차례의 면담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지난 3월26일 86세로 영면해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잠드신 님의 명복을 빈다.


별 달지못한 유일한 대령출신 전쟁영웅


1950년 초여름날 새벽 북한군의 침투를 시발로 53년 7월27일 휴전 때까지 3년1개월간 삼천리금수강산을 초토화하며 남북간에 처절한 혈전을 벌인 6.25 한국전쟁. 이 기간중 미국정부가 선정한 4명의 전쟁영웅이 있다. 맥아더 원수, 리지웨이 대장, 백선엽 대장등 3인은 한국전 당시 사령관과 참모총장을 역임한 4성, 5성장군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장군아닌 영관급이 한사람 끼어있다. 그가 바로 김동석 지대장이다. 그는 모든 군인의 꿈인 별을 달지 못하고 대령으로 예편한 인물. 장군이 아닌데도 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 까지는 엄청난 비화가 있다.


6.25가 터졌을 때 중위로 중대장 이었으나 전쟁기간중 두차례나 특진해 소령을 달고 육군첩보부대 (HID) 36지구대장을 맡았다. 영화 실미도를 본 사람은 그들의 임무에 대해 다 알고 있는 북파공작대가 바로 그가 이끈 부대다. 36지대는 원산 앞바다에 위치한 작은섬 여도에 둥지를 튼 여단규모 부대로 적진에 수시 침투해서 각종정보 취득은 물론 특수시설물 파괴, 요인 체포등 적을 교란시키는 특수임수를 수행하곤 했다.


북한을 도와 한국전에 참전한 중공군 60만 대군이 1.4후퇴 직전 압록강을 건넌 것은 확인됐지만 그후 그들의 동태는 전혀 아군 정보망에 걸리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가 몹시 긴장하며 중공군의 동태를 챙기느라 부산을 떨었지만 허탕. 그때 김 지대장이 대원들을 이끌고 직접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중공군장교를 생포하여 그를 회유함으로서 비밀정보를 캐내는 것은 물론 그들의 주둔지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중공군은 모든 병사가 9일분의 식량(빵과 생선 말린 것등 간이식)을 휴대하고 낮에는 노출 되지 않도록 숲속에 숨어서 자고 밤에만 전진하는 올빼미작전을 펴며 극비리에 서울점령을 노렸던으로 확인됐다. 이 정보를 면밀히 분석한 맥아더 장군은 1월3일 새벽에 그들을 섬멸함으로써 한국전 개전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UN군 10만이상-전투기조종사 수십명 피해 막아


만일 중공군이 그들 작전대로 한강을 넘어 서울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피아간에 수많은 접전이 벌어졌다면 엄청난 피해가 따를 것은 물어보나 마나다. UN군 희생은 최소10만명 이상, 미공군 전투기조종사는 수십명에 달할 것 이란게 미군측 분석이었다.


이 사실은 당시 8군사령관 마크 M 클라크대장의 회고록: 한국전쟁비사 -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에 잘 나타나 있다. 클라크장군은 2차대전 당시 소장으로 직접 낙하산을 타고 이탈리아, 프랑스 적진에 침투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지원한 용장으로 첩보전과 유격전의 베테랑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그때 한국군 HID36지대가 시도 때도 없이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후방을 끊임없이 교란하자 크게 신경이 쓰인 인민군은 제7군단과 6군단을 원산근처에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했다.


김 지대장과 대원들의 활동이 결과적으로 적 병력을 최전방에 집결하지 못하게 분산시켜 그들의 전력을 약화시키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고 극찬했다.


그의 전적은 6.25개전초기부터 화려하게 이어진다. 육군 17연대3대대11중대장으로 낙동강전선 안강-기계 전투에서 인민군 1군단(무정군단) 선봉대를 괴멸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전사에 길이 빛날 이 전과로 17연대 장병전원 1계급특진이란 영예를 누린다. 패장이 된 적장 무정은 중장에서 전사(이등병)로 강등되는 치욕을 맛본다.


또 17연대 3대대장으로서 해병대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으로 참여해 최초로 서울땅을 다시 밟는 역사의 증인이 된다. 중국군 생활로 중국어에 능통한 그를 맥아더사령관이 직접 선정하여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서울수복작전에 투입한 것이다.


해병대는 서쪽으로 한강을 건너 마포-연희고지를 거쳐 중앙청으로 진격하고 그가 이끄는 육군은 삼각지-용산을 지나 남산을 공격 동부서울을 장악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어 계속 펼쳐진 평양점령 작전에도 맨 먼저 투입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김 지대장은 이런 공로로 대한민국정부가 주는 훈장과 미국 동성훈장, 리더쉽훈장등 모두 27개의 훈장을 받았다. 그는 전쟁중은 물론 휴전후에도 미군 장성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그들과 교분이 두터운 자랑스런 한국군이었다.


주한 UN군사령관이나 사단장으로 취임하는 지휘관마다 부임후 가장 먼저 그를 찾아 인사하고 협조를 부탁하는게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사실은 장군출신이 아닌데도 6.25전쟁의 영웅으로 미국정부가 그를 뽑았고 극진히 예우하는데서 기인한다.


의정부 미2사단에 흉상-기념관 설치 그의 공적 기려


특히 의정부에 주둔한 미2사단(인디언해드 패치, 캠프 클라우드)의 예우는 한마디로 대단하다. 미2사단이 어떤부대인가?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참전(라이언 일병구하기에 나선부대) 했으며 한국전이 터지자 1주일만에 가장먼저 부산에 상륙했고 평양입성때 김일성집무실을 점령해 인민기를 노획한 세계최고 정예부대라 긍지가 대단한부대가 바로 2사단이다. 그런 부대가 사단본부 한쪽 전쟁기념관 앞에 김 지대장의 흉상을 세워 오가는 장병들이 경의를 표하며, 기념관 안에는 김동석 영웅관을 별도로 설치 운영하고 있다.


또 해마다 12월 16일을 김동석 영웅데이로 정하고 이날은 공휴일로 전장병이 휴무하며 그의 공적을 기린다. 한국군 정보부대에도 그의 기념관이 마련돼 후배장병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김 지대장은 6 ~ 7년전 기자와 만나 여러 얘기를 나눌 때 “생사를 함께했던 옛 전우들이 휴전후 지금까지 세상을 많이 떳고 한사람 한사람 유명을 달리할 때마다 현실적 제한 때문에 상관으로써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너무나 부끄럽다”면서 “옛 전우들의 공적을 겨우 감사패하나에 담아줄 뿐”이라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특히 휴전직후 인민군 장성을 생포하는등 전공이 뚜렷한 신유덕 공작대장이 2004년 5월 작고했을 때 더욱 그랬다고 옆 전우들이 들려주었다. 아끼던 부하를 보내는 그의 안타까움은 얼마전 보상관련법이 만들어져 다소 해소됐고 그도 이런 과정을 지켜볼 수 있어 다행이아닐 수 없다.


6.25때 소년병으로 입대해 현역시절 김 지대장의 부관을 지냈고 50년이상 측근에서 보필한 최인연 예비역중령(3년전 작고)은 기자와 가깝게 지내던 시절 그와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러면서 “김 지대장은 책임감이 강하고 능력있는 지휘관으로 부하를 끔직히 아꼈던 청사에 길이 빛날 투철한 군인이었다”며 “현재도 미국 군부, 중국 군부로부터 가장 대접받는 한국군의 원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별도 박스 김 동석 지대장은 누구인가?


김동석 지대장은 러시아연해주에서 1923년 망명객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가 나라잃은 슬픔을 가슴에 안고 일제의 핍박을 피해 집단망명을 했던 것. 1943년 하얼빈고교를 졸업하고 무도전수학원 재학중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 근무하다 해방을 맞아 장개석 국민당의용군에 입대했다. 그후 황포군관학교 단기과정을 마치고 소령으로 임관하게 된다.


중국군대서 조선족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그는 뜻밖에도 일본군장교로 포로가 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일권 장군을 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 그들과 교분을 갖게 된다.


그러던중 그는 모택동군대인 팔로군에 포로로 잡혀 총살형을 받기에 이른다. 총살직전 “지휘관인 나는 죽어도 좋으나 부하들은 살려 달라”고 간청하자 사형집행책임자가 그의 용맹과 부하 사랑하는 마음을 가상히 여겨 그를 살려주고 강제로 팔로군에 편입시켰다. 그 사형집행관이 훗날 판문점 휴전회담 때 차석대표로 나온 이상조다.


팔로군에서 기회만 노리던 그는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탈출, 한국으로 오게 된다. 해방후 고국에서 육사8기생으로 입교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5.16 쿠테타 직전 대령 (당시 김종필등 동기생들은 중령)으로 동해안 방위사령관시절 거사에 동참하라는 박정희소장의 권유를 받았으나 자신은 오로지 국방에만 충실하겠다며 거절한다. 이런 일로 인해 그는 쿠테타가 성공한 후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대령으로 예편하게 된다.


동기생가운데 가장 승진이 빨랐고 후일 틀림없는 참모총장감이라 여겨지던 그가 별을 달지 못하고 군복을 벗게 된 것. 5.16 후 몇 달 쉬다가 과거 그의 도움을 받았던 박정희장군의 배려로 행정공무원으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5.16참여 거부, 예편후 몇 달 쉬다 공무원으로 변신


초임지가 강원도 내무국장, 이어 삼척군수, 속초시장, 강릉시장, 목포시장, 수원시장, 경기도북부출장소장을 거쳐 함북지사를 지냈다. 25년에 걸친 공직생활은 한결같이 성실하고 근면하게 임했다. 군에서나 행정직에서나 그의 성품은 다를 바 없었다고 주변인사들은 말한다.


60년대 초 삼척군수 시절 큰 수해를 당해 위문단이 현지를 방문 했을 때 그중 한명이었던 모윤숙 시인은 웬 젊은 홍보요원이 브리핑을 잘하더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이 군수여서 놀랬고 또 그가 군 출신이었다는 말에 깜짝 놀랬다는 후일담도 있다.


그만끔 그는 책임감이 강하고 맡은 일에 성실했고 자기 일을 부하들에게 떠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공직생활을 마감한 후에는 한미친선골프회장, 국제문화협회 상임고문 등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펼쳤다. 유도9단이며 국제심판인 그는 용인대설립에도 참여했고 80이 넘어서도 운동을 통한 국제교류에도 힘썼다.


그는 평소 검소한 생활이 몸에 베어 서울송파구문정동소재 조그만 빌라에서 살았다. 그 집을 방문한 토마스 A 스츠워츠 전 8군사령관이 “좀 돕고 싶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안타까와 했을 정도로 청빈했다고 부하들은 들려준다.


유명가수인 진미령씨 (본명 김미령)가 딸이고 방송인 전유성씨가 그의 사위. 노년의 그는 옛 전우, 후배들을 비롯해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인사 1천여명이 만든 ‘영웅 김동석후원회’모임에 자주 참석하는게 큰 즐거움이었다. 노 영웅의 단한가지 소망은 어떻게 하면 7 ~80대 황혼기에 접어든 옛 전우들이 삶에 대한 기본적 걱정없이 노후를 보장받도록 하는 것과 또 젊은 후배전우들이 열심히 일할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위해 노심초사 했다.


이런 생각으로 2005년 가을 회고록 ‘이 사람 (This man) 김 동석’을 펴냈다. 6.25전쟁 발발시점부터 휴전후 5.16쿠테타에 이르기까지 육군첩보부대를 직접 지휘한 경험을 기록한 자서전은 숨겨졌던 북파공작원들의 애환과 비화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This man이란 전쟁중 김 지대장의 정보를 신뢰한 맥아더사령관이 그의 사진을 보며 이 사람이 귀한 정보를 제공 했다고 지칭한데서 그 용어를 책제목으로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