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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유엔軍司令官 解任 / 韓國戰爭

풍월 사선암 2009. 7. 29. 10:20

 

<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1880~1964) >


♧맥아더 유엔軍司令官 解任♧   

 

전세가 다시 유리해짐에 따라 미국은 한국전쟁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에들어갔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그리고 합동 참모 본부는 전쟁을 확대하자고 주장했다. 전쟁이 중간에서 서면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UN의 국가들은 휴전을 강력히 주장했었다. 그들은 더이상 희생을 원치 않았고 한국전쟁이 세계 대전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국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경우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51년 3월 13일 UN군은 서울을 다시 재탈환하였고 전세는 계속 UN군 쪽으로 기울었다. 전쟁이 유리해지자 UN의 휴전 압력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미국은 중공과 협상을 통해 휴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3월 20일 이 소식을 들은 맥아더 장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 뒤, 맥아더는 정부와는 한 마디의 협의도 없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부 환도 보류를 요청하고 23일에는 중공군 최고 사령관에게 휴전 협상을 제의하고, 중국 본토 폭격을 시사했다. 이것은 중공의 신경을 크게 건드릴만한 제안이었다. 이와 함께 트루먼 정부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실 이 비판의 배경에는 아래와 같은 저간의 사정이 내포돼 있었다.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고, 그 결과로 미군이 완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트루먼 대통령은 50년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한국 전쟁에서 원자 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암시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덧붙여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 폭탄을 사용할 때 UN의 승인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며 의존하지도 않겠다고 말했다.


반면,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UN의 많은 나라들은 한국전쟁이 제3차 대전으로 번질까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 UN의 많은 나라들은 휴전을 제안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이 원자 폭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영국의 애틀리 총리는 황급히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애틀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과 협상을 하자고 설득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오히려 강력 대응을 주장했다. 이처럼 미국과 영국의 견해가 대립되고 있을 무렵인, 12월 5일 중공군은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UN군은 계속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UN군이 북쪽으로 진격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전세는 다시 역전 된 것이다. 중공군의 남진으로 1.4 후퇴 서울을 적에게 다시 빼앗겼으니 ...


맥아더 장군 역시 중공의 참전에 대해 미국이 강력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첫째, 미 해군은 중공의 해안을 봉쇄하고 둘재, 중공 본토를 폭격하며 셋째, 대만에 있는 장개석 군대를 참전시키고 넷째, 원자탄 사용도 고려할 것, 그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이런 의견을 수용하여 최종 결정을 내렸다. 최종 결정은 결사 항전이었다. 이에 따라 며칠 뒤, 트루먼 대통령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의 해임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애틀리 영국 총리의 끈질긴 설득으로 트루먼 대통령은 기존의 지론과 방침을 묵살하고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애틀리 총리에게 약속을 해버렸다. 때문에 트루먼 대통령은 이러한 맥아더의 행동에 격분하여 4월 11일 그를 해임시키고 그 후임에 리지웨이 중장을, 미 8군사령관에 밴플리트 중장이 취임했다.


해임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51.4.19 미 의회에서 퇴임 고별연설을 했다.


그 유명한 언구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1951년 4월 19일, 해임된 맥아더 장군이 미 의회에서 고별연설을 하고 있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