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2008 겨울 희망편지] [13] 사채 잘못 손댔다 풍비박산 죽을 각오로 막노동

풍월 사선암 2008. 12. 30. 06:40

 

[2008 겨울 희망편지] [13] 사채 잘못 손댔다 풍비박산 죽을 각오로 막노동 10년…내 처지 부끄러워하면 행복 오지않는걸 깨달아

'과거의 나' 버릴 때가 재기의 시작 아닐까요

심상기·노동·서울 관악구


고향인 경남 하동을 눈물로 떠나온 지 어언 10년이다. 1998년 IMF로 세상이 힘들 때였다. 직장 때문에 주말 부부로 살다가 아내가 이왕이면 장사를 해보겠다고 우유대리점을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아내가 사채를 빌리게 되었고 급기야 제품 판매 대금에까지 손을 댔다. 아내는 나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워 혼자 끙끙 앓다가 고리대금까지 끌어들여 걷잡을 수 없이 빚을 키웠다. 결국 내가 알게 돼 빚을 갚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거액의 은행대출을 한 것이 문제였다. IMF가 오자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가 어려워졌다. 마침내 나의 급여와 퇴직금에 차압이 들어왔다.


큰애의 대학 진학을 앞둔 1998년 말 나는 퇴직금을 한 푼도 찾을 수 없는 처지가 돼 버렸다. 총무부에 통사정을 해 등록금 용도로 현금 500만원을 찾아오는 길엔 서럽고 막막한 마음에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일시불 수령이 가능했던 국민연금을 받고 그 돈이 떨어지면 죽기로 했다.

 


 

아내와 대학에 입학한 아들을 서울로 올려 보냈다. 나는 막내와 함께 시골에 남아 술로 지냈다. 풍비박산된 가족이었다. 용기가 없어서 죽지는 못했다. 대신 몇 달 뒤 마지막 남은 800만원을 들고 나도 서울로 올라왔다.


술과 불면(不眠)의 연속이었다. 좁은 반(半)지하방이 우리 거처였다. 사람이 망하면 친척도 떨어져 나가고, 부귀해지면 모르는 사람도 모여든다고 했다(貧賤者親戚離 富貴人他人合). 꼭 그랬다. 가장 괴로운 것은, 가난하고 천해 보이니까 동창으로부터도 '양아치'라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차피 죽을 바엔 마지막으로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큰아이가 공부를 제법 잘했다. 노동판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날로 담배를 끊고 몸을 단련했다. 이후 안 해본 일이 없다. 석재공 보조, 페인트공, 택시 운전…. 지나간 10년은 눈물밖에 안 나오는 모진 삶이었다. 하지만 그 시련 속에서 나는 소중한 것을 얻게 되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이 어렵다고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숨기기에 급급하다면 행복은 오지 않는다. 체면과 부끄러움은 사치다.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현실을 당당하게 맞이할 때 재기의 기회가 온다.


10년이 지났지만 아내는 여전히 식당에서 일한다. 대신에 우리 가족은 소중한 것을 얻었다. 나도 아내도 부모로서 당당하게 노동일을 하고, 떳떳하게 식당일을 한다. 큰아들은 사법시험에 합격해 지금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다. 막내 또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선하게 살고 있다.


지난 10월에 드디어 10년 반(半)지하방을 탈출했다. 좁지만 세 칸짜리 셋방을 구해 10년 만에 네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죽는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산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다. 내 가정이 행복하면 우주가 행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