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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김안균 99간 한옥

풍월 사선암 2008. 9. 25. 08:06

     까치발 하고 담 넘어보는 우리의 옛 추억 -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돌담장 마을 

이수연의 길따라 바람따라 떠나는 여행길-31 

평택시민신문 webmaster@pttimes.com

 

▲ 김안균 가옥 담장 / 99간짜리 양반가로서 담장둘레만 340여 미터에 이른다.

 

총연장 1.5킬로미터 돌담장 마을


겨울 한 복판에 선 1월 어느 일요일. 지나다니는 사람도, 딱히 길을 물을 만한 곳도 눈에 띄지 않던 차에 신작로 옆으로 점방(店房)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듯 싶은 슈퍼마켓 간판이 보였다. 그 앞에 차를 세우려는 순간 왼쪽으로 마을입구가 보였다. 큰 길에서 보아오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마치 배부른 항아리 형국이랄까. 포장도로를 따라 지은 몇 채의 건물과 행정관서 몇 개가 마을의 좁은 입구를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듯싶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총연장 1.5킬로미터에 달한다는 돌담장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 같이

                            시(詩)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 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전문-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인 영랑 김윤식이 남도의 향토색 짙은 언어로 묘사한 그 돌담길이 이곳에도 있다. 온전히 돌로만 쌓은 것이 아니라 흙과 어우러진 토석 담인데다가 기와를 얹어, 붉은 바탕에 검은 띠를 두른 것 같은 마을색이지만 평생 시골이랄 수도 도시랄 수도 없는 곳에서 살아왔기에 이런 골목길에 대한 직접적이고 아련한 향수는 없어도 이곳 담장 길과 마을 풍경이 왠지 낯설지 만은 않다.    

 

▲ 넝쿨 늘어진 담장 / 집주인의 형편을 짐작하게 하는 모습이지 한 폭의 수채화 소재로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돌담길


함라면 함열리 돌담마을은 지난 해 우리나라 문화재청이 영호남 지역의 등록 문화재로 지정한 전국 10개 돌담 마을 중 한 곳이다.


등록문화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보물로서의 가치를 따지는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근, 현대에 형성된 건조물, 시설물, 문학예술작품, 생활 문화자산, 산업, 과학, 기술, 동산 문화재, 역사 유적 등 근대문화유산 중에서 보전 및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한 것들을 말한다.


개화기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를 대상으로 하지만 그 이후 것이라도 사라질 위기에 놓여 보존이 시급한 것들이 대상이 된다. 이는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지향해 오면서 펼쳐온 각종 개발행위는 물론 급속한 도시화와 경제 논리를 앞세워 오랜 전통을 간직해온 우리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허물고 외면하는 가운데 정체성 상실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빚었기 때문이다.


근대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시대이다. 또 이 시대의 흔적들이 다시 전통이 되고 유적이 되어 길이 보전해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인데 이를 외면하면 더 이상의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남아나기 힘든 것 아니겠는가.       


그동안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들을 보면 논산 강경의 어느 한약방 건물에서부터 철원의 농산물 검사소, 남 제주 비행기 격납고, 추풍령 역 급수탑 같은 것들인 것을 보면 몇 년 전에 허문 우리 평택의 옛 군 청사도 그 대상일 듯싶다. 하지만 이제는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기억이 되어 버렸다. 


문화재청은 “이러한 옛 사람들의 정서가 담긴 예스러운 ‘돌담길’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 시급히 보존할 필요성이 있어 문화재로 등록 한다”고 밝혔다. 

 

▲ 토담사이로 아직 보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토담너머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났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돌담길


마을의 입구에 보초처럼 서 있는 집은 전통양식이기는 하지만 새로 지었다.  하지만 몇 걸음 더 들어가자 한 눈에 보아도 몹시 퇴락한 한옥과 담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두 채가 아니다. 마을 뒤로 산을 두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의 뒷산이자 마을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함라산 기슭까지 이어지는 굵은(?) 길에서 가지 뻗듯 좌우로 갈라지는 골목을 만드는 그 집들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이어진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도 그 길들은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제 자리로 나온다. 그런데 이 마을 담장은 우리네 전통적인 마을 담장보다 높은 것 같다. 또 가옥의 규모에 비해 담장이 몹시 길다. 자연히 담장 안에 가둔 마당도 넓어서 그 공간에 혹시 허물어낸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까치발 하고 담 너머로 본 집안에는 장독대가 보이고, 이파리가 떨어졌어도 만만치 않게 키 큰 나무가 솟아있다. 어느 집은 기와가 아니라 생철(함석)지붕이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담장에 시멘트 기와를 얹었다. 이 마을도 열병처럼 번져간 새마을 운동의 지독한 몸살을 앓았던 모양이다. 시멘트를 바르고 슬레이트를 얹고. 그래도 돌담길만큼은 지켜낸 듯 하다. 이제 그 시멘트 기와마저 매끈했던 겉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 아래, 풍상을 이고 온 담장과 한통속으로 닮아가고 있다.


이 마을 담장의 백미는 지방 민속자료이기도 한 김안균 가옥이다. 한말과 일제시대 양식을 보여주는 민가로서 일제시대 일본식이 접합된 형태라고는 하지만 양반댁 건축의 최대치였던 아흔아홉 간짜리 대가(大家)의 면모를 여실하게 볼 수 있다. 담장의 둘레가 삼백 사십 미터란다.

사람이 살지 않아 잠겨 있다. 더욱이 담이 높아 그 속을 들여다보기도 어렵다.


일요일인데도 인적이 드물어 간신히 관리인을 찾았지만, 그리하여 서울에 있다는 집주인과 어렵게 통화를 했지만 승낙을 받지 못해 집 구경을 못했다. 담을 한바퀴 돌면서 아쉬움을 달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돌다보니 담이 온통 상처투성이다. 몇 차례 보수를 한 흔적이 있다. 측면으로는 큰 돌을 주로 쌓으면서 흙을 채워 넣었는데 앞쪽으로는 돌이 작고 흙이 좀더 많다. 그나마 윗부분은 벽돌로 처리했다.


이런 형편은 마을 전체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담은 토석 담인데 대문은 콘크리트 기둥에 철로 만든 곳도 있고 흙 담 무너진 곳에 새로 쌓은 부분은 시멘트 블록 담이다.  어느 담은 똑같이 쌓을 형편이 못되었든지 흙으로만 보수한 곳도 있다. 그 담장 기와에서 늘어진 말라버린 넝쿨이 영락없는 수채화 소재다. 

 

▲ 담의 변형 / 토석담, 함석지붕, 시멘트 블록 담이 섞여 있어서 묘한 느낌을 준다.

 

다양한 근 현대의 담을 만나는 즐거움


마을길 왼쪽으로는 전통가옥이 별로 없다. 토석 담도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민가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담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흙담, 흙과 돌이 섞인 담, 돌담, 벽돌을 섞은 담, 기와를 평평하게 겹쳐 넣은 담, 거기에 시멘트 담, 시멘트 블록 담, 생 울타리 등등. 어떤 전원주택은 아쉬운 이야기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데도 토석 담을 쌓았다.  


담장의 종류는 이렇듯 각기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집 중 대문을 걸어 잠근 곳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담장이 있다 해도 그 너머로 음식을 나누고 인정을 나누며 어떤 의사소통도 가능했던 그들에게 담장의 의미는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는 ‘벽’이라기보다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짓는 최소한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잠글 필요가 없는 대문이기에 아예 대문 없는 집들도 많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아직은 이 마을로 들어 온 외지인을 의식하여 대문을 걸어 잠그는 관광지의 피해의식 같은 것은 없는 듯싶다.


함열리에서 만나는 담장 길에서는 가까운 고궁에서 만나는 미끈하고 잘 치장한 새색시 같은 담장의 아름다움은 없다. 대신 낡고 헤졌지만 깨끗하게 빨아 다린 시골아낙의 수수한 옷차림 같은 것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수수함 속에는 마을의 유지들의 반대로 지금의 함열읍 쪽으로 철로가 나면서 쇠락해버린데 따른 아쉬움 같은 것이 진하게 배어 있는 듯하지만 이곳이 과거, 함열, 황등, 서수, 웅포, 성당을 관장하는 함열현 소재지였던 자부심이 곳곳에 녹아 있기에, 한 시간 남짓이면 돌아볼 수 있는 마을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품격까지 느낄 수 있다.


찾아가는 길(평택에서 약 두 시간 소요)

호남고속도로 연무대I.C.→강경→함열읍 방면 23번 국도→용안면→711번 지방도→성당리→맹산리→ 함라면 함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