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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 만드는 행복한 세상] 나눔 명사-류근철 박사

풍월 사선암 2008. 9. 12. 08:57

[나눔이 만드는 행복한 세상] 나눔 명사-류근철 박사

"걸인에게 자신의 밥 주신 어머니 영향"

한국 과학 기술원에 578억원 쾌척 '국내 개인 기부 사상 최고액'

무료 진료등 나눔 활동… "인재 키우려면 기부 문화 활성화 돼야"


한의학계의 원로인 류근철(82) 박사가 최근 한국 과학 기술원(KAIST)에 578억 원을 선뜻 내놓아 화제이다. 이는 우리 나라 개인 기부 사상 최고액인 데다, 과학 인재를 키우기 위한 미래 지향의 기부라는 그 뜻 또한 거룩해 더욱 빛난다.


한의학 박사 세계 1호로 한의원을 운영해 인술을 베풀며 크게 성공한 그는 인생 승자에만 머물지 않고 의로운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의인 류 박사를 서울 광화문 그의 아파트에서 만나, 나눔의 참 의미에 대해 들어봤다.


△나눔은 무엇인가요?


▲나눔요? 베품의 정신이자, 행복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람이 열심히 살아가는 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한 것인데, 기부(나눔)도 똑같다고 생각해요. 내가 가진 조그만 것을 내놓으면 절로 행복해지거던요. 그런 점에서 난 참 복이 많은 사람이지요.


좀 어렵게 말하자면 기부는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도록 실천하는 사회 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즘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책무)란 말을 자주 듣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품앗이, 두레 등 조직적인 자선과 기부 활동의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지요.


△그래도 578억 원이라는 숫자는 참 놀랍습니다. 기부를 결심하게 된 계기라도 있으신지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향이 참 컸어요. 내 아버님께선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의 진원지인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붙잡혀 일경에게 고문을 당한 후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졌고, 어머니는 정신 분열 증세까지 왔습니다.


결국 온 가족이 일본군에 쫓기게 됐고, 고향을 떠나 충주시 노은면에 어렵사리 자리를 잡았지요. 그 사이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어요.


말할 수 없이 궁핍했지만, 내 어머니께선 거지들이 밥을 달라고 하면 당신의 끼니를 내어 줄 정도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거지들에게 밥을 갖다 주면서 늘 마음 속으로 ‘내가 자라면 돈을 정당하게 환원해야지.’ 라고 생각해 왔답니다.


△박사님께서 기부한 재산은 어떻게 활용되는지요?


▲행정 중심 복합 도시에 땅을 사 카이스트 세종 캠퍼스를 세우고, 나머지 일부 돈으로는 경북 영양에 과학 기술인을 위한 휴양관과 연구 시설, 과학 유공자 묘역을 만들기로 학교측과 협의를 끝냈습니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는 카이스트의 숙소로 활용되고요. 노벨상 수상자나 유공 과학자 등 과학 발전에 기여했거나 많은 기부금을 낸 공로자들을 위한 묘역을 만들게 된 것도 뜻이 크지요.


△기부 결정을 한 뒤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달라진 점은 없습니까?


원래 돈에는 귀신이 붙어 있어 노여움을 잘 탑니다.(웃음) 그러니 올바로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해를 입어요.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서 자꾸만 ‘내돈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고,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기부를 결심했을 때 장남(연대 철학과 교수)이 ‘우리 가문에서 10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일을 하셨다.’고 말해 줘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마 가족들은 평소에 내가 기부하겠다는 말을 해왔지만, 이렇게 덜컥 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예요.


기부한 뒤 방송에 출연해 달라거나 책을 출판하자는 제의가 있어 좀 바빠졌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요. 하나 부탁하고 싶은 건, 내 기부를 계기로 우리 나라도 기부 문화가 좀 더 활성화돼 개인이든 기관이든 미래의 동량을 많이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가도 기부자에 대해 사회적 예우에 좀 더 신경 쓰면 더 많은 기부가 이뤄질 것으로 봅니다.


△박사님의 기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요?


▲고향인 천안 천동초등에 8 년 전부터 조금씩 기부해 왔어요. 그 사이 어린이와 주민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다목적 실내 체육관과 게이트볼장을 세워 줬고, 최근에는 골프장까지 만들어 주었어요. 어린이가 건강해야 나라가 건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한 일이지요.


1990년대 후반 모스크바 국립 공대 교수로 있으면서 의료 시설이 부족한 국내 지방 각지에서 의료 활동을 펼쳐 천안ㆍ산청시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박사님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


▲이미 말했듯이 부모님이 일본군에 쫓기는 바람에 초등학교 입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어요. 너무나 공부를 하고 싶어 11 세 때 학교를 찾아갔지요. 선생님께 통사정을 해 겨우 입학 허가를 받았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어릴 땐 과학을 좋아했는데, 깡통이나 버려진 모터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고 개구리로 실험도 밥먹듯 했어요. 못 쓰게 된 남비 등 폐품 을 주워 모아 엿장수에게 팔아 돈을 모았고, 혼자 힘으로 외국에 책을 주문해서 읽기까지 했지요.


초등학교 때 꿈은 공학 박사여서, 가슴에 늘 ‘工’자 배지를 달고 다녔어요. 처음엔 선생님께서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셨지만, 내 의지를 알고 도움을 주셨지요.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부를 결심하게 됐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가요?


▲잠깐 이쪽으로 와 볼래요.(류 박사가 어머니 방이라고 안내한 곳에 들어서니 영정과 직접 붓으로 쓴 좌우명 ‘효를 아는 것은 사람의 반열에 서 있음이요.


효를 행하는 것은 조상 어른의 복을 받음이라.’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늘 이 말 뜻을 가슴에 새기고 있지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등 사업가들도 평소 불우 이웃 돕기를 실천해 온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천문학적 액수를 기부케 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도 이번 기부에 그치지 않고 카이스트 발전 기금 1000억 원을 모금할 ‘카이스트 사랑 세계화 추진 위원회’를 곧 조직할 예정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모았나요?


▲일단 은행에 저축하면 좀처럼 꺼내질 않았지요.(웃음) 옷은 주로 남대문 시장에서 5000 원, 1만 원 짜리를 사서 입었고요. 여기 이 전화기는 쓰레기통에서 주운 건데, 10 년 넘게 쓰고 있지요.(류 박사가 숙소 겸 사무실로 쓰는 아파트에는 그 흔한 선풍기조차 없다.) 장롱과 침대를 빼고 모든 가구는 재활용한 것입니다.


못 쓰는 스키는 책꽂이로, 고물 쇠판은 책상으로, 남이 쓰고 버린 털조끼는 방석으로 바꾸었지요.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해도 좀 검소한 생활을 살았네요.


거기에다 한의원 운영과 ‘전자 침술기’ 등 특허 낸 제품 수출로 번 돈을 모아서 건물을 샀는데, 주변이 재개발 되면서 자산 가치가 크게 올랐어요.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어렵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도 새겨야 할 말이지요. 박사님은 앞으로 또 어떤 나눔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해 주실 계획이세요? 어린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도 해 주세요.


▲기부가 하나의 마침표였다면 이제부터 학자로서 제2의 인생을 살려고 합니다. 카이스트 특임 교수로, 한방을 활용해 우주 비행사들의 급상승, 급강하로 인한 신경 질환 치료 연구에 몰두할 계획입니다.


어머니의 구휼(빈민이나 이재민 등을 돕고 보살핌) 정신이 내 몸에 전해졌듯이, 내 뜻이 주위로 확산되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훨씬 밝아질 것으로 봅니다. 나눔은 꼭 돈이 많아야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일에는 누구나 동참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우리 어린이들도 평소 생활 속에서 나보다 못하거나, 어려운 친구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또 부자라고 자랑할 것이 아니고 가난도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예요. 남을 돕고 나누며 생활하세요. 그러면 나처럼 행복해질 터입니다.

 

최근 카이스트에서 받은 기부증을 들어보이고 있다. 카이스트는 앞으로 류 박사를

'카이스트 발전 재단' 명예 이사장으로 모셔, 그 뜻을 높이 사기로 했다.

 

류근철 박사는

1956년부터 진료를 시작한 류 박사는 1972년 세계 최초로, 침술로 제왕 절개 수술 마취에 성공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1973년 경희대 한방 의료원 부원장 때‘동서 의학 중풍 센터’ 설립을 앞장섰으며, 여기서 처음으로 양방과 한방 협진을 시도했다.


1976년 경희대에서 한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 한의사 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미국ㆍ유럽ㆍ러시아 등과 교류하면서 한의학의 우수성을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렸다.


공학으로 한의학 치료 효과를 입증하겠다는 그의 노력은 1996년 칠순의 나이에 모스크바 국립 공대에서 의공학과 박사 학위를 따고, 모스크바 국립 공대 종신 교수에 임명되기도 했다.


서원극 기자 wkseo@s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