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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부도·실업(不渡·失業)…온국민이 한마음으로 이겨내 / IMF 사태

풍월 사선암 2008. 8. 18. 10:09

대량 부도·실업(不渡·失業)…온국민이 한마음으로 이겨내 / IMF 사태

 

19971997년 11월 10일 오후 3시쯤, 대통령 김영삼은 전 부총리 홍재형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각하, 아무래도 IMF(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국가 부도가 날 수 있습니다!" 그 때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김영삼은 경악했다. 김영삼은 훗날 "당시 경제부총리(강경식)와 경제수석(김인호)이 사전에 조율해서 보고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 해 초부터 한보·삼미·진로·대농 같은 대기업이 줄줄이 도산했다. 7월에는 태국 바트화가, 8월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폭락했다. 7월 15일 재계 순위 8위인 기아가 부도 처리됐지만, 이 과정에서 정치권이 부도를 지연시키면서 외국 투자가의 불신이 커졌다. 기업 부도→금융기관 유동성 부족→대출 억제와 자금 회수→자금시장 경색→기업 부도라는 악순환이 일어났고, 외국 투자가들은 한국 금융기관에 대한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급격히 고갈됐다. 그런데도 한국인이 그 해 7~8월에 쓴 해외여행 경비는 15억3000만 달러였다.


▲ 1998년 1월 9일 범국민적인‘금 모으기 운동’의 산물인‘애국 금(金)’1차분이

울산시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에 도착했다. 조선일보 DB

 

"한국 경제는 펀더멘털(기초)이 튼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10월 28일 부총리 강경식)던 정부는 11월 14일 IMF로부터 구제금융 지원을 받기로 사실상 결정했다. 21일, 신임 부총리 임창렬은 "IMF에 200억 달러의 지원을 요청키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경제 식민지로 전락한 국치일(國恥日)" "나라가 '학실히' 거덜났다"는 탄식이 뒤를 이었다. IMF는 강도 높은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원화와 주식이 폭락했으며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대량 도산과 실업이 줄을 이었다.


1998년 한국 경제는 실업률 7.0%와 경제성장률 ―6.7%라는 최악의 경제 위기에 빠졌다. 커다란 고통이 국민들을 짓눌렀다. 그 해 실업자 수는 200만명에 가까웠고 6000명이 넘는 노숙자가 거리로 나왔으며 기업의 신규 채용은 거의 중단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1998년 1월 시작된 범국민적인 '금 모으기 운동'에는 한 달 만에 243만명이 참여해 20억 달러에 가까운 16만4000여㎏의 금이 쌓였다. 2001년 8월 IMF 차입을 전액 상환할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위기를 극복하려는 수많은 국민들의 의지가 큰 힘이 됐다.


 

▲ IMF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봄 명퇴자의 아픔을 담은 일명 '눈물의 비디오'. 제일은행 홍보부가 제작한 이 비디오는 당시 언론 보도 직후 다른 금융기관과 대기업, 청와대와 안기부를 포함한 국가기관, 군부대와 고등학교, 사우디 건설현장, 사찰에 이르기까지 주문이 쇄도했으며, 긴급제작해 무료로 제공한 1500부가 순식간에 동났다. 이 동영상은 IMF 사태를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본 사람들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해서 '눈물의 비디오'란 이름이 붙여졌다. 비디오의 주인공인 이삼억 차장은 췌장암으로 인해 2000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외환위기의 주역인 금융권이 스스로 피해자를 자처, 국민에게 준 고통을 호도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도 없지는 않았다.

 

입력 : 2008.08.18 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