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운정 이영도 시인의 구름, 봄

풍월 사선암 2008. 8. 14.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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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이영도 시,


정녕 윤회있어 받아야 할 몸이라면

아예 목숨일랑 허공에 앗아지고

한오리 연기로 올라 구름이나 되려오

무수한 해와 달을 품안에  안고보니

삼라만상을 발아래 굽어보고

유유히 산악을 넘는 구름이나 되려오

저녁놀 비껴뜨면 꽃구름이 되었다가

때로는 한 하늘 먹장으로 덮어도보고

아침해 솟는 빛앞에 몸을 맡겨 타려오

아득한 소망대로 이루어질 량이면

인간을 멀리하여 무량한 하늘가로

탓없이 떠서오가는 구름이나 되려오

 

 

  - 이영도


낙수 소리 듣다 미닫이를 열뜨리니

포근히 드는 볕이 후원에 가득하고

제가끔 몸을 차리고 새 움들이 돋는가


아이는 봄 따라 가고 고요가 겨운 뜰에

맺은 매화가지 만져도 보고 싶고

무엔지 설레는 마음 떨고 일어 나선다


<청저집, 문예사, 1954>

 

                         <이영도 시인>


먼저 이 시인의 운명은 좀 기구한 데가 있었다. 10대 후반에 대구의 이름 있는 가문의 청년과 결혼했지만 그렇게 만난 남편이 폐병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약관 21세에 딸 하나를 두고 과부가 되어 버렸다.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언니가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통영으로 이사를 했고 그 통영에서 그렇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갈한 몸가짐과 매무새에 상당한 미인으로 알려진 여류 시인! 남편을 잃고는 한 10년이 지나고 난 후 직장을 찾던 중 통영여자중학교에 수예 선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바로 그 학교에서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게 된다. 청마 유치환! ‘바위’, ‘깃발’로 대표되는 중엄하고도 예리한 시구로 대단한 인식의 파괴력을 보여준 당대 최고의 시인! 그 청마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결혼한 신분의 유부남이었지만 청아한 아름다움의 여류시인을 보자 먼저 마음이 빼앗겨 버린 것은 청마였다. 이미 이영도 시인의 주변에는 내노라 하는 남성들이 기웃거리고 심지어 미모에 반해 상사병에 월담을 감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어쨌든 가장 매력적인 남성이 가장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는 여류시인을 보고는 그냥 빠져 버린 것이다. 같은 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두 사람은 청마 쪽의 3년간의 끈질긴 구애에 드디어 여류시인이 마음의 문을 열면서 본격적인 마음의 연인관계로 ...

 

그러나 오해는 금물. 두 시인의 사랑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러브호텔을 기웃거리는 어떤 불륜의 관계로 발전하는 그런 속물적인 사랑이 아니라 평생을 서로를 범하지 않으면서 마음의 연인으로 서로의 격조와 품위를 지켜주며 절제의 미학으로 꽃을 피우는 이른바 플라토닉 사랑... 두 사람의 사랑은 나중에 20년 후(1967년) 청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사망하자 연인 간에 오고 간 편지들이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으로 풀판 되어 세상에 알려 지면서 60년대 후반이후로 대단한 화제가 된다. ‘세기의 사랑’ 운운하며...  


다음의 시편은 애정의 초기,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윤리적 내면으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그때의 여류시인의 미묘한 감정이 잘 녹아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무제’전문)


어쨌든 이렇게 시작된 마음의 연인관계는 서로에게 내밀하게 심화되어 향후 수천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깊이를 더해 간다. 때로는 싯귀로 때로는 신파극조의 사랑타령으로, 산문으로... 여류시인이 31세 되던 해에 시작된 사랑은 20년을 넘기고 1967년 청마가 교통사고로 급서하면서 비로소 끝이 난다. 그 날도 청마는 여류시인과의 만남을 위해 집에서 나오다가 자동차사고로...


(한편, 청마의 아내도 남편의 플라토닉(?) 외도를 알고 있었지만 ‘무릇 시인이라면 저 정도의 연심(戀心)은 있어야 한다’며 눈을 감아 주었다고 하니 그 남편에 그 아내...)


그 후로 여류시인은 청마를 잃은 슬픔을 속으로 삭이고 계속 교편을 잡았고 부산에서 대학에도 강의를 나가는 등 교육자의 활동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부산어린이회관장을 역임하는 등 복지사업도 적극적으로 수행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