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청마 유치환(柳致環)의 삶과 문학

풍월 사선암 2008. 8. 14. 11:26

 

유치환(柳致環)의 삶과 문학

 

청마(靑馬)와 이상(李箱)은 여러모로 대조되는 시인이다. 청마는 건강한 몸을 지녀서 고래 술을 평생 마시고도 끄떡없었는데 이상(李箱)은 20대 중반에 얻은 폐결핵을 극복하지 못하고 28세로 요절했다.


이상(李箱)이 생(生)의 의미를 찾지 못해 절망하고 자기 모멸에 빠져 몸부림치고 있을 때 청마는 [생명의 서(書)] 같은 시집을 내놓으며 삶의 정열에 들끓었다. 이상(李箱)이 인간의 삶 자체를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의식적으로 '애욕의 진흙탕'에 뛰어든 반면 청마는 [깃발], [바위] 등을 발표하면서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를 바라보며 일생을 살았다.


이렇게 다르면서도 둘은 친하게 지냈다. 이상(李箱)은 신상에 이상이나 변화가 있을 때는 꼭 청마에게 엽서를 띄워 알려주곤 했다. 이상(李箱)이 절망을 극복해 보려고 일본으로 건너갈 때 마지막으로 찾은 사람이 청마였다. 청마는 그러므로 국내에서 이상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다.


이상(李箱)은 어느 날 일본으로 간다면서 느닷없이 청마를 찾아왔다. 둘은 항구의 싸구려 술집에서 엉망진창이 되도록 마셨다. 생명력이 충천한 시인 청마와 생명력을 찾아 얻어 보려는 이상(李箱)이 만난 술자리이니 그 순간만은 의기투합 '비슷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날 밤, 지금은 불타고 없는 부산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조선 여관이란 삼류 여인숙에서 지내고 이튿날 저녁 둘은 관부연락선 부두에서 영원한 작별의 손을 마주 흔들었다. '이상(李箱)은 까마귀 같은 퀭한 눈에 커다랗게 입을 벌려 흥소했다.' 이것이 청마가 기록한 이상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청마는 친계(親系)로부터는 강직한 성품을 이어받고 모계(母系)로부터는 후덕한 덕성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청마의 성격 규정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로 대표되는 양면성에서 찾아져 왔고, '의지와 사랑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청마는 타고난 저항 정신을 피 속에 용해시켜 놓고 있었다. 그는 우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래고보 학적부를 보면 조선어, 영어, 한문은 늘 갑(甲9점)인데국어(일본어), 화학 등은 병(丙4점)을 면치 못했다. 또 그는 결석을 잘 했다. 병이 났다고 결석계를 내고 학교엘 잘 빠졌는데 학적부에 기록된 '체격란'에는 항상 '갑(甲)'으로 되어 있다. 가기 싫은 학교를 꾀병 내고 안 갔음이 분명한데 그러고도 석차는 27명중 7등이었다.


청마는 학교하고는 연분이 적었던 모양으로 연희 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마음에 안 들어서 1학년도 다 못 채우고 걷어치웠다. 그러고는 다시는 학교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일본에 건너가서 사진 학원에 들어가 사진 기술을 배운다. 사진관을 열어서 먹고 살 요량으로 한 것인데 사실상 그는 평양에서 그 후 사진관을 차렸다. 그러나 그것도 서너 달 만에 다 털어먹고 부산에 내려와 백화점 점원 노릇을 했다. 이것이 청마의 20대 모습이다.


30대 시절 청마는 만주 등지로 방황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외아들 '일향(日向)'을 잃게 된다.  얼어붙은 땅에 외아들의 시신을 파묻고 마음이 여린 청마는 종래 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다.


사람도 나도 접어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번 패망(敗亡)의 인생(人生)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에 호읍(號泣)할 곳 없어.


[황야에 와서]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만주 연수현에서 농장 관리인 노릇을 6년간 하다가 청마는 해방을 맞아 40대의 나이로 귀국하게 되고 그때부터 문화 활동과 교육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청마의 저항성이 가장 돋보일 때가 자유당 말기 정치적 부정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타고난 반골(反骨) 기질이 3.15 부정선거를 도저히 묵과하지 못한다.


그 환도를 찾아 갈라

비수를 찾아 갈라

식칼마저 모조리 시퍼렇게 내다 갈라

그리하여 너희들 마침내 이같이

기갈 들려 미치게 한 자(者)를 찾아


손에 손에 그 시퍼런 날들을 들고 게사니같이 덤벼

남 나의 어느 모가지든 닥치는 대로 컥컥 찔러….


청마가 얼마나 통분 격분했으면 이런 살기 등등한 시(詩)를 썼을까. 그는 그때 여기저기 신문 잡지에 정치 부패를 저주, 성토하는 시를 발표했다. 그 시절이 바로 청마의 경주(慶州) 시절이다.


55년부터 59년까지 그는 경주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었고 그 기간동안 그는 '나는 시인이 아니다'면서 자유당 정치와 그 불의를 단죄하는 투사의 칼날을 휘둘렀다. 59년 9월 10일 그는 강요에 의해서 교장직을 물러나게 되고 그후 2년간 심한 신경통을 앓으며 낭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기간동안 그는 대구매일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정치권을 질타하는 시를 계속 발표했다. 그 시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이다.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 1960년 3월 13일 '동아일보'


이 시가 나온 지 1개월 6일 만에 4.19가 일어났고 그가 그 동안 발표한 시편들을 묶은 시집들이 다투어 나왔다. 61년 5월 청마는 마침내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이 되어서 그리워하던 경주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학생들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청마는 바로 그 '덕목'으로 높은 추앙을 받게 되고 그후 문단에서나 교육계에서 크게 기림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투사'의 일을 떠나 곧 '시인(詩人)'의 자리로 돌아왔다.


<출처: 글봄문학회>

 

 

유치환 시 모음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바 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솔밭에 와서                                     


솔밭에는 솔바람 여울이 울고

솔바람 여울 위에 가치떼 설레고

가치 설레는 위에 하늘만 푸르고

내사 외로워 생각이고 무에고



행 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생명의 서 일장(一章)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바람에게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오리 풀잎나마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노송                                                      


아득한 기억의 연령을 넘어서 여기

짐승같이 땅을 뚫고 융융히 자랐나니

이미 몸둥이는 용의 비늘을 입고

소소히 허공을 향하여 여울을 부르며

세기의 계절 위에 오히려 정정히 푸르러

전전 반축하는 고독한 지표의 일변에

치어든 이 불사의 원념을 알라.


 

수선화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의 아침 거칠은 내 심사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의 깊은 동통을 가만히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위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여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코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었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온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한 경건한 손일레라.


 

향수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어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여 폐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 같지 못하여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

창파에 씻긴 조약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져 있나니


희망은 떨어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내 흑노같이 병들어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



日月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광야에 와서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깃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