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오탁번 시인의 ‘굴비’

풍월 사선암 2008. 7. 25. 16:44

 

 

오탁번 시인의 ‘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시(詩)의 해설

이 시(詩)는 “겨울 강”이란 시집에 수록된 오 탁번 씨의 “굴비”란 제목의 시(詩)다.


오 탁번 씨는 참  대단한 입담을 지니고 있다. 자칫 잘못 들으면 그저 홍당무가 되어 버릴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태연하게 역어 낼 수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더구나 웃음이 절로 나오면서도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것을 변주(變奏)해내는 실력이라니!


굴비는 음담패설(淫談悖說)이다. “항간(巷間)의 음담(淫談), 얼마 전에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 나는 차마 웃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라고.


음담패설(淫談悖說)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 그래서  오 탁번 씨는 시인(詩人)이다. 음담에 묻어 있는 삶의 곡진(曲盡)함까지 한눈에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가 마음과 그 마음에 목이 메고 마는 사내의 이야기는 해학(諧謔)과 웃음으로 가득 찬 이야기에 전혀 엉뚱한 활기(活氣)를 불어 넣는다. 아내가 굴비를 얻어 온 내역을 알고도 굴비를 맛있게 먹고, 그저 퉁명스럽게 볼 맨 소리를 하는 사내. 그리고 며칠 후 굴비가 다시 밥상에 올랐을 때는 결국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는 사내.


사연이야 어떻든 가난한 산림과 굴비에 얽힌 이야기는 사내와 계집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참으로 진실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야기는 허구(虛構)이고, 웃고 즐기자고 누군가가 만들어 낸 어른들의 우스개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음담(淫談)에도 삶의 진실은 있는 것이다. 그런 진실 앞에 어슬프게 정조(貞操)나 순결을 들이 대며 힐난(詰難)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웃다가 결국은 울고 마는 이야기, 그런 상식을 초월(超越)해 버리는 역설(逆說)은 이 시인(詩人)의 특유(特有)한 장기(長技)라고 할 수 있겠다.


사내와 계집의 사랑을 묘사하는 두 구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 방아를 찧었다.“와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에는, 개똥벌레, 베짱이, 소쩍새 등, 온 자연(自然)과 우주(宇宙)가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내와 계집의 사랑과 함께 호흡(呼吸)하고 장단을 맞추는 미적(美的)인 승화(昇華)의 경지(境地)가 숨어 있다.  음담패설(淫談悖說)에서 우주의 합창(合唱)을 엮어 내는 그런 파격, 그 파격이 이 시의 깊은 매력(魅力)이다. 결국 웃고 마는 음담패설(淫談悖說), 그러나 감동(感動)의 경지(境地)로 우리를 이끌어 올리는 시라고 하겠다.

 

오탁번 시인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중등교육을 원주에서 받은 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한국 현대시를 전공하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1967년「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하여 그 동안 시집 「아침의 예언」「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을 출간하고, 소설집으로 「처형의 땅」「저녁연기」「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순은의 아침」 등 출간하였다. 소설 「우화의 땅」으로 한국문학작가상, 시집 「겨울강」 동서문학상, 시 「백두산 천지」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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