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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술 세계화에 "내가 원조" 기싸움

풍월 사선암 2008. 7. 7. 06:20

침술 세계화에 "내가 원조" 기싸움 / 韓·中·日 '침 놓는 자리' 왜 다투나?

같은 이름의 경혈도 나라마다 위치 달라 / 표준 정하고도 갈등

 

세계보건기구(WHO)는 2003년부터 한국과 중국, 일본의 전통의학 전문가들의 논의를 거쳐 2006년 11월 361개 침구 경혈(經穴) 위치에 대한 국제 표준을 제정했다. 그러나 올해 'WHO 침구경혈부위 국제 표준서'가 발간되자 한국과 중국이 각각 자국의 침술이 국제 표준으로 지정됐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국제표준이 무엇이길래 양보 없는 신경전을 벌이는 것일까.


◆각국 경혈의 차이


음식을 먹고 체했을 때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뼈 사이의 움푹 파인 부분을 눌러주면 한결 편해진다. 한의학에서 골짜기처럼 생겼다 해서 '합곡(合谷)'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소화불량 환자들에게 침을 놓는 자리다. 하지만 이 합곡의 위치를 한국은 검지에 더 가깝게 보고, 일본은 엄지에 가깝게 본다.


인중(人中)으로 더 널리 알려진 '수구(水溝)'는 코와 윗입술 사이에 오목하게 골이 진 곳. 쇼크로 쓰러지거나 인사불성이 될 때 침을 놓는 구급혈이다. 수구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이 코와 윗입술의 중간 지점으로 보는 데 반해 중국은 코 쪽에 조금 더 가깝게 표시한다.


이처럼 나라마다 경혈의 위치에 차이가 나는 것은 오랜 세월 침술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한의사 간에 여러 학설로 나뉘고 의견 편차가 생긴 때문이다. 경혈 국제 표준 작업에 참가했던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구성태 교수는 "침술은 같은 동양의학 이론에서 출발했지만, 한의사마다 고전 문헌 해석이 다르고 자신의 임상 경험에 따라 선호하는 혈자리도 다르다"고 말했다.


또한 인종에 따라 경혈 위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풍시(風市)'는 차렷자세로 똑바로 섰을 때 허벅지에서 손의 중지 끝이 닿는 곳. 그러나 이 자리는 인종이나 성별에 따라 인체 비례가 달라 조금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국제 표준 제정 과정


지난 200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1차 회의에서 각 나라가 쓰는 경혈 361개 중 94개의 위치가 다른 것을 확인하고 통일된 국제 표준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0차례 회의를 거듭하며 88개 경혈에 대해 합의를 보았고 수구, 화료, 영향, 중충, 노궁, 환도 등 마지막까지 논란이 됐던 6개 경혈에 대해서도 2006년 11월 일본 쓰쿠바에서 열린 11차 회의에서 위치를 결정하는 데 최종 합의했다.


WHO 서태평양지역본부 최승훈 전통의학 고문은 "두 나라가 같은 자리에 혈을 표시하면 이를 표준으로 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나머지 것은 소수 의견으로 삼았다"며 "예를 들어 수구·화료는 한국과 일본 것, 중충과 환도는 한국과 중국 것, 노궁은 중국과 일본 것이 표준으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최 고문은 "회의 초기에는 '침구학의 본산' '임상은 우리가 최고'를 내세우며 3국 간 자존심 대결이 대단해 회의 장소를 놓고도 신경전을 벌였다"며 "특히 중국은 이미 합의된 혈자리에 대해서도 합의를 번복하고 다시 안건으로 삼자고 주장하는 등 주도권을 쥐려는 의식이 강했다"고 전했다.


반면 의료일원화 정책으로 전통의학이 크게 쇠퇴한 일본은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듯한 인상이다. 한국과 중국에 비해 일본 국내에서 침술의 위상이 높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참석자들은 풀이했다.


경희대한의대 침구과 강성길 교수는 "침 놓는 자리의 이름이 같은데도 실제 위치가 다르면 교육, 연구, 세계화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미 1980년대부터 표준화에 대한 필요성이 지적되다가 최근에야 결실을 본 것"이라며 "경혈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전문가들의 논란일 뿐 자존심 싸움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wis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