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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여인들은 질투를 하지 않았을까?

풍월 사선암 2008. 6. 27. 18:58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질투를 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하면 칠거지악이니 남녀상열지사니 남존여비의 사상이 마치 오래된 한국인의 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것은 착각이다. 다른 역사서나 사학을 연구한 사람들의 책을 근간으로 해서 살펴보면 조선 중기를 넘어가면서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또는 장희빈의 패악에 몸서리가 난 영조가 여성들의 수족을 묶어두기 위해 만든 제도라는 것이다. 신빙성 있는 것은 전자의 말이 맞을 것 같다.


조선 중기 까지만 해도 과부가 시집을 갔고 여자도 재산의 절반을 상속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여인들의 남편관리를 살펴보려고 한다. 과연 첩을 얻으면 양반신분의 여인네들은 고분고분 남편의 사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성종 19년 5월 22일,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장안에 떠들썩했다. 여인이 죽은 채로 물에 내려왔는데 시체가 몹시 훼손되어 있었다. 온몸에 상처자국이 있었고 성기에서 항문까지의 부위가 칼로 도려내져 있었다. 임금은 이와 같이 독한 상처를 입은 것은 일반적인 싸움이나 살인이 아니라 필시 사대부 집안의 독살스런 처가 질투심 때문에 첩을 학대하여 죽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까지 추적하여 범인을 잡아내라고 명령했다.

 

신윤복의 ´밀회´ 남녀의 은밀한 만남을 지켜보는

또 다른 여인을 통해 삼각관게를 알수있다.

 

질투에 의한 살인과 고문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투기에 의한 최초의 살인사건은 태조 6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교서감이라는 직위에 있던 왕미라는 자가 자신의 종과 간통을 하자 그의 처가 종을 죽여 길가에 버렸다. 관원이 잡으러가자 왕미는 처와 함께 도망쳤다.


처가 첩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학대란 대표적인 사례는 세종9년에 벌어진 집현전 관리 권채의 집에서 생긴 일이다. 집현전 응교였던 권채는 본처인 정씨 외에 종이었던 덕금을 첩으로 삼았다.


아내 정씨는 덕금을 몹시 미워하여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덕금이 남편 몰래 집을 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할머니가 아프다는 전가를 받은 덕금이 권채에게 휴가를 청했는데 허락하지 않자 몰래 할머니를 찾아갔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아내 정씨는 권채에게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기 위해 몰래 빠져나갔다고 거짓으로 일러바쳤다. 화가 난 권채는 덕금을 잡아 머리카락을 자르고 쇠고랑을 채워 방에 가뒀다. 이제 정씨는 남편의 묵인 아래 덕금을 괴롭힐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덕금을 칼로 베어 죽이려고 하다가 그렇게 되면 남들이 사정을 알게 될까 두려워 서서히 죽이는 방법을 택했다. 음식을 주지 않고 대신 똥오줌을 먹였다. 구더기까지 생긴 똥오줌을 덕금이 차마 먹지 않으려 하자 덕금의 항문을 침으로 찔러 억지로 먹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하기를 수개월, 덕금이 거의 죽기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고발하는 자가 있어서 권채는 외관직으로 좌천당하고 아내 정씨는 곤장 아흔 대를 맞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렇게 첩에 대한 본처의 질투심은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세종 때 좌찬성을 지낸 이맹균의 아내 이 씨는 나이 일흔이 가까웠는데도 질투가 심했다. 이맹균이 집안의 계집종을 가까이하자 그것을 질투하여 종을 학대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움 속에 가두어 굶겨죽였다. 그런데 한 술 더 뜬 것은 남편인 이맹균. 사사로이 종을 죽인 것이 들통이 날 것 같아 하인들에게 암매장하게 했는데, 하인들이 성가셨는지 죽은 여인을 길거리의 구렁텅이에 버렸다.


시신이 발견되어 범인을 찾는 수사가 진행되자 할 수 없이 이맹균은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세종은 이맹균을 귀양 보냈다. 그러나 대신의 아내라고 하여 처 이 씨는 벌을 받지 않았다.


남편의 사랑을 뺏긴 아내들은 이처럼 갖은 방법으로 첩이나 남편의 사랑을 받는 종들을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머리카락 자르기, 두들겨 패기, 성기를 못 쓰게 만들기 등이 자주 쓰이는 방법들이었다.


중종7년의 한 사건을 보면 끔찍하기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남편과 가까이한 종의 입을 솜으로 막은 다음 불에 달군 쇠로 음부를 지지고 돌로 내리쳐 화를 풀고는 죽였다. 남편이 정식으로 맞아들인 첩일 경우에는 갖은 모략으로 우선 남편과 떼어놓은 다음, 학대하거나 창피를 주어 내쫓았다. 심지어 독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종 때 장현 현감 홍천의 첩, 첩의 딸, 노비 두 명이 모두 독살되어 죽었는데 홍천의 부인이 질투하여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비참한 첩의 신분


그만큼 첩의 신분은 비참한 것이었다. 첩에게서 낳은 자식은 서자, 서녀가 되어 온갖 신분상의 제한을 받았고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첩은 남편의 친족과 친족의 호칭관계를 가질 수 없었고, 죽어도 남편과 함께 묻힐 수 없었다.


하지만 의무는 많아서 남편이자 정실부인, 혹은 정실부인의 소생이 죽었을 때는


길면 3년까지 상복을 입어야 했고, 남편에 대해서 정조의 의무를 지켜야 했다.


남편을 고소하면 목을 졸라 죽였고,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치거나 첩의 신분으로 다른 남자를 만나 개가하면


모두 엄한 형벌에 처해졌다. 그렇게 비참한 처지였지만 첩이 살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동기는 바로 남편의 사랑이었다.

 

신윤복의 ´기방무사´ 기방에서 기녀랑 놀던 남자, 다른 여인이 들어서자 시선을 빼앗긴다.


남편의 사랑을 잃은 그녀들의 처절한 복수


정실 아내들은 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위를 누렸지만, 남편의 사랑을 잃는 것은 그 어떤 지위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비참한 것이었다. 첩에 대한 본처의 질투와 가혹한 학대는 남편의 사랑을 빼앗긴 데 대한 복수였다고 한다.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고 있는 신사임당도 여자였던지라 남편에게 만은 질투심이 강했다고 한다. 기방에 출입하는 것을 눈치라도 채면 남편의 살을 꼬집고 할퀴는 등 여장부답게 화도 잘 내었던 모양이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보라. 후궁에게 상감의 사랑을 빼앗긴 것에 분풀이로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것만으로(물론 정치적 중상모략에 희생양이지만) 폐위되어 씻을 수 없는 통한의 세월을 보냈지 않는가.


사회가 발달하고 제도 또한 발전을 거듭해서 인권이 보호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비일비재한 가정의 불화. 남편과 아내의 신뢰가 무너지면 크게는 사회의 혼란을 가져온다는 점을 명심하자. 일 부 일 처제는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제도이자 아우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