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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과 역사 : 왕을 낳은 후궁들

풍월 사선암 2008. 2. 22. 15:51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왕을 낳았으나 신분제와 가부장제의 굴레를 벗을 수 없었던 후궁들. 그들의 아픈 삶을 되짚어 준 책이다. 왕의 어머니와 왕의 관계를 중심으로 쓰여져 있으며, 왕비의 일생과 왕의 가계가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되어 있어서, 조선시대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됐다. 나는 역사 드라마를 좋아해서 자주 봐왔지만, 사실 도대체 역사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는 잘 알지 못했었다. 드라마는 대개 기껏해야 왕 두세 명, 많으면 네 명이 바뀌는 정도의 시기를 설정하고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에, 나는 '태조 - 정종 - 태종 - 세종'으로 왕조가 이어졌고, '단종 - 세조'로 왕조가 이어졌다는 정도로만 알았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고, 광해군은 개똥이를 사랑했던 왕! 이 책은 내 머릿 속의 역사 퍼즐을 하나씩 끼워맞춰 주었고, 조선 시대 역사를 좀더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태조 (太祖) - 정종 (定宗) - 태종 (太宗) - 세종 (世宗) - 문종 (文宗) - 단종 (端宗) - 세조 (世祖) - 예종(睿宗) - 성종 (成宗) - 연산군 (燕山君) - 중종 (中宗) - 인종 (仁宗) - 명종 (明宗) - 선조 (宣祖) - 광해군 (光海君) - 인조 (仁祖) - 효종 (孝宗) - 현종 (顯宗) - 숙종 (肅宗) - 경종 (景宗) - 영조 (英祖) - 정조 (正祖) - 순조 (純祖) - 헌종 (憲宗) - 철종 (哲宗) - 고종 (高宗) - 순종 (純宗) 

 

 

태종 이방원은 조강지처인 원경 왕후의 일가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으나, 왕이 되자 그녀의 가족들이 세력을 얻는 것을 경계했다. 저자는 후궁제도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태종이 외척의 힘을 분산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 용의 눈물(KBS)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두 형들을 제치고 왕이 되었던 세종은 이런 전례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왕위의 장자 계승을 강력히 원했고, 심지어 그 다음대의 왕이 될 손자를 낳아줄 세자빈의 선택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태종이 체계화시켰던 후궁제도는 그의 아들(문종) 부부(들)에게는 비극의 씨앗이 됐다. 문종의 첫번째와 두번째 부인은 남편의 사랑이 여러 여인들에게 분산되자 질투와 고독을 느꼈고, 사랑을 갈구하며 발버둥치다 결국 폐위됐다. 그는 세번째 부인이 된 권씨에게서 마침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왕손(단종)을 보았으나, 하루만에 그 부인을 잃었다. 권씨가 산후병으로 사망한 뒤, 그는 두 번 다시 부인을 얻지 않았고 왕이 된 후에도 중궁전을 비워두었는데, 이것은 또다른 비극을 잉태했다. 병약했던 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당시 겨우 12살이었던 그의 아들 단종이 즉위했다. 문종에게 비빈이 없었던 터라 단종에게는 자신을 도와줄 웃전(대비나 대왕대비)은 없었으나, 동시에 할아버지 세종이 수많은 자식을 남긴 탓에 왕권을 위협할 숙부들은 넘쳐났다. 결국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죽임당했다.*왕과 비(KBS)

 

세조의 첫째아들인 의경세자는 한씨(훗날의 소혜왕후; 인수대비)와 결혼해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을 낳았으나,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사망했다(후일 덕종으로 추존). 이 책에 소개된 야사에 따르면,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죄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 또한 네 자식을 죽이겠다"고 말한 후, 그 꿈이 곧 사실이 됐단다. 의경 세자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세조가 사망하자 의경세자의 동생(예종)이 1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도 왕이 된지 1년 2개월만에 요절했다 (왕비는 한명회의 셋째딸인 장순왕후였으나, 그녀는 인성대군을 출산한 뒤 병사했고, 인성대군도 4살에 죽었다). 예종이 승하했을 당시, 그와 안순왕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한명회와 소혜왕후가 결탁하여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려놓았다. 왕위에 오른 성종은 한명회의 넷째딸인 공혜왕후와 결혼했다. 그러나 공혜왕후 역시 언니처럼 요절했고, 성종의 아이을 잉태하고 있었던 후궁 윤씨(성종보다 12세 연상)가 중전으로 책봉됐다. 그 당시 왕실에는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 예종의 왕비였던 안순왕후,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까지 포함해서, 윤씨가 받들어 모셔야 할 청상과부 대비가 세 분이나 있었다. *왕과나(SBS)

 

윤씨는 왕비가 된지 3달 만에 원자(연산군)를 낳았으나,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는 남편을 보며 외로움을 느꼈고, 그의 사랑을 힘겹게 갈구하다 폐출됐다(이 책에 따르면, 성종은 보수적인 성관념을 지녀, 여성들의 정조에는 엄격하고, 남성들에게는 관대했단다. 수많은 사대부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진 어우동은 풍기문란죄로 사형당혔으나, 그녀와 관계를 가진 남자들은 대부분 사면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부 재혼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p.67). 그녀가 이렇게 왕비가 된지 3년 만에 폐출된 데는 대비들의 입김도 컸다. 나중에 성종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꼈고 그녀 역시 후회하고 있었으나, 인수대비의 계책으로 그녀는 사약을 받았다. 성종의 후궁 정씨와 엄씨도 윤씨를 몰아내고 중전이 되려는 욕심으로 그녀의 폐위에 관여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게 된 후 광폭해져서 정씨, 엄씨는 물론 할머니인 인수대비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신료들이 그를 폐위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추대했다. *한명회(KBS)

 

중종의 왕비였던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했고, 문정왕후 윤씨가 중전이 됐다. 인종은 등극한지 1년도 되지 않아 후사 없이 사망했고, 문정왕후와 중종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경원대군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명종이 어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그녀는 수렴청정을 끝낸 후에도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 명종은 그녀가 사망한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의 아들인 순회 세자는 요절했기 때문에 명종이 평소 총애했던 하성군 (중종과 창빈안씨의 아들; 선조)이 왕위에 올랐다. 자신이 후궁 소생이었다는 열등감 때문에, 선조는 자신의 후계자는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장자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의인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했고, 후궁들에게서만 13명의 아들을 얻었다. 그의 총애를 얻었던 공빈 김씨과 인빈 김씨는 각기 자신의 아들인 광해군과 신성군이 왕위를 잇기를 바랐다. 그러나 공빈은 광해군을 낳고 2년만에 죽었고, 선조는 계속 적장자를 기다리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여인천하(SBS)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책봉 의식도 없이 당시 18세이던 광해군을 왕세자로 공표하고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피난을 떠나버렸다. 광해군은 전쟁을 지휘했고, 신성군은 피난 중에 병사했다. 선조는 인목왕후와의 사이에 뒤늦게 아들 (영창대군)을 얻은 후 그를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했으나, 영창대군이 두살박이일 때 사망해서 왕위는 광해군에게 돌아갔다. 광해군은 장자도 아니었기에 중국은 이를 핑계로 그를 왕으로 인정해주지 않았고, 광해군은 끝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 친형인 임해군까지 유배 보냈다가 사사했다. 광해군은 중국 사신을 초대해서 극진히 대접한 끝에, 조선의 왕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실리를 중시해, 기울어가고 있는 명나라와 떠오르고 있는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고자 했으나, 명분을 중시한 신료들과 대립하게 된다. 그러던 차에 그가 정원군 (선조와 인빈 사이의 소생으로, 한 때 광해군과 세자 자리를 다퉜던 신성군의 동생)의 아들인 능창군을 역모 혐의로 사사시키자, 정원군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유명을 달리 한다.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데 분노한 능양군 (인조)은 광해군에 맞서는 신료들과 더불어 반정을 성사시켜 왕위에 오른다. *왕의 여자(SBS)

 

후금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우고, 광해군과는 달리 청나라를 배격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조선에 쳐들어온다. 결국 병자호란으로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다. 소현세자는 오랜 볼모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급사(독살 추정)했고, 세자빈 강씨도 인조에 의해 사사됐다. *한국사傳: 새로운 조선을 꿈꾸다 소현세자빈 강씨'편(KBS)

 

 

 

 

봉림대군(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었고, 효종과 인선왕후의 소생인 현종이 그 뒤를, 현종과 명성왕후의 소생인 숙종이 또 그 뒤를 이었다. 숙종은 첫번째 왕비인 인경 왕후와의 사이에서는 두 딸만을, 두 번째 왕비인 인현 왕후와의 사이에서는 후사를 두지 못했다. 숙종이 장희빈을 지나치게 총애하면서, 장희빈은 점차 인현왕후에게도 무례해졌다고 한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종아리를 치기도 하고, 숙종의 애정을 분산시키고자 또 다른 후궁인 숙의 김씨를 들이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장희빈이 원자를 낳자 권력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된다. 그러나 장희빈 역시 또다른 여인인 숙빈 최씨(인현왕후의 시녀였던)로 인해 왕의 총애를 잃게 되어 희빈으로 강등된다.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돌아온 후,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는 두 어머니(인현왕후와 장희빈)를 성심껏 섬긴다. 그러나 장희빈은 세자에게 심한 매질을 하는 등 남편과 아들의 애정이 분산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사약을 받았고, 그 순간에 세자(경종)를 성불구자로 만들어놓았다.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생모를 입은 세자에게 "누구의 자식인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라고 꾸짖기도 했으며 세자 교체까지 논의했으나,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세자는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p.117). *장희빈(KBS)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후사 없이 죽었고,  미천한 출신의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의 소생(영조)이 보위를 잇는다. 영조는 마흔이 넘어서야 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대를 이를 아들을 얻었는데, 이 아들이 바로 사도세자이다. 영조는 아들에게 무섭도록 엄격했으나 아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이 갈라져 당쟁이 심화되면서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사이는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영조의 후궁 일파들이 그 갈등을 부추겼다. 사도세자가 역모 혐의까지 받게 되자, 그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세손까지 다치게 될 것을 염려해 사도세자를 포기한다. 그녀는 영조에게 사도세자에 대한 '대처분'을 청하고, 사도세자의 빈인 혜경궁 홍씨도 아들을 지키기 위해 이를 방조한다. 뒤주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의 아이디어였고,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만에 사망했다. 당시 불과 11세에 불과했던 세손(정조)은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손은 영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올랐으나, 오랫동안 후사를 보지 못하다가 39세가 되어서야 후궁인 수빈 박씨에게서 순조를 낳았다. *이산(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