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혈혈단신 미국생활 3년 '눈물의 일기'

풍월 사선암 2008. 3. 16. 10:14

   [weekly chosun] 혈혈단신 미국생활 3년 '눈물의 일기'

정권 바뀌어 귀국하는 서해교전 전사자 아내 김종선씨

 

“나라를 지키려 목숨을 바친 영웅을 홀대하는 나라…. 더 이상 얘기 안 하겠습니다.”

서해교전 당시 전사한 한상국 중사의 아내 김종선(34)씨가 지난 2005년 4월 24일 인천공항에서 미국으로 떠나면서 남긴 얘기다. 목숨을 바쳐 조국의 영해를 지켜냈지만 그들의 빈자리에는 무심했던 나라와 군에 대해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의 100분의 1도 다 못했다. 마음에 담아두겠다”며 쓸쓸히 떠났다.


그로부터 3년. ‘닫힌 마음’에 울분을 안고 떠났던 김씨가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4월 2일 귀국한다. 그동안 2함대사령관이 주관하던 서해교전 추모행사를 국가 주관 행사로 격상시키겠다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소식이 올 초 전해지면서 김씨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한나 킴’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온 불법체류자 신세도 견디기엔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 최근 부쩍 나빠진 친정 어머니의 건강 상태는 “효녀는커녕 애물단지만 됐다”던 김씨가 귀국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단돈 500달러를 손에 쥐고 떠난 미국에서 김씨의 삶은 고달팠다. 네일 숍(nail shop) 일로 시작해 맨해튼 지역에선 사무실 청소를 했다. 렉싱턴에 있는 음식점에서는 그릇을 닦았고 이스트타운의 작은 식품점에선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잡화 도매상 사무일로 먹고살기 위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펜을 들기 힘들 정도로 지친 하루하루가 계속돼 제대로 일기를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던 김씨는 귀국을 앞두고 외롭고 고단했던 미국 생활을 글로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지난 2월 귀국을 결심한 김종선씨.


그가 ‘일기 같지 않은 일기’라는 이름을 붙인 글은 3년 전 출국을 나흘 앞두고 아버지 기일(忌日)을 맞아 “사막 같은 인생의 길, 가는 걸음마다 바르게 걷기를 함께 기도한다”던 2005년 4월 20일자로 시작해 귀국을 앞둔 복잡한 심정을 기록한 지난 3월 10일자로 끝난다. 수첩에 적어놓은 메모, 휘갈겨 써 놓은 쪽지 글을 다시 꺼내 보면서 김씨는 참 많이 울었다고 했다. 돌아보기 싫은 아픈 상처들을 떠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편을 팔아 돈을 벌려는 수작’ ‘고철덩어리를 뭣 때문에 전쟁기념관으로 옮기려 하느냐’는 인터넷 댓글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구치던 순간,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1년에 8번이나 거처를 옮겨야 했던 기억을 적었다. “절대 쓰러지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꼭 살아남자”는 다짐도 보인다.


번듯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살다 결혼 반 년 만에 남편을 잃은 김씨. 2005년 서해교전 3주기를 맞아 남편의 유품을 매만지며 사무치는 그리움에 홀로 안타까워했다.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해 “언니처럼 예쁜 웨딩 드레스를 입고 싶었다”고 속으로 되뇌는 대목에선 애잔함마저 느껴진다. 작년 서해교전 5주기를 맞아 미국 참전용사 할아버지들과 함께 조촐한 추모식을 벌이던 일,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시에서 열린 한국전쟁 기념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을 때 아이들에게 장렬히 산화한 용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가르치는 미국인의 모습을 보며 느낀 감상도 적어 놓았다.

 

▲ 2005년 4월 24일 인천공항 출국장으로 향하던 김종선씨.


김씨는 전화통화에서 “앞으로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라면서 “마음에 남아 있는 (나라에 대한) 앙금을 털어내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의 시신을 40여일 동안 바닷속에 둔 정부와 군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참수리호가 침몰한 지점은 우리 바다 아닌가요. 실종이라고 변명했지만 따지고 보면 전우를 그냥 두고 나온 것이잖아요. 남편의 시신을 찾기까지는 제게 지옥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기다리라고 할 뿐 누구 하나 미안하다고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지요.”


그는 현재 평택 2함대에 전시된 참수리357호를 용산의 전쟁기념관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평화가 그냥 지켜지는 것은 아니란 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참수리357호예요.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서라도 꼭 전쟁기념관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전하려면 선체를 해체해야 하고 적잖은 돈이 들기 때문에 어렵다 이야기 하고 있지만 후세들이 가까이서 두고두고 볼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대단한 애국자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당연한 것 아닌가요.”


김씨는 4월 1일 뉴욕발 인천행 항공권을 끊어놓았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 귀국하면 10년 동안 미국에는 올 수 없게 될 것”이라면서 “우스터에 있는 6·25 전쟁 기념공원에 있는 (남편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이 무척 보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힘든 미국 생활 동안 그에게 힘과 용기를 준 참전용사 할아버지들도 그리울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대부분 여든 안팎의 고령이다. “고마운 분들. 돌아가시면 장례식에라도 참석하는 것이 도리인데…. 한국에 돌아가면 그게 어려워지겠죠.” 수화기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2005년 4월 20일 

미국에선 닥치는 대로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 기일이다.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고생만 하다 가신 아버지. 하늘 나라에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근심과 고통, 아픔과 걱정이 없는 그곳에 계셔서….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여기보다는 그곳이 나을 것 같다. 땀 흘리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 하지 않았나. 여기선 일자리 구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지만 미국에선 닥치는 대로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서 다시 시작하는 거다. 파이팅!!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나를 걱정해 주시는 모든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하루를 감사 속에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병원비가 비싼 그곳에선 절대 아프지 말아야 한다. 사막 같은 인생의 길, 가는 걸음마다 바르게 걷기를 함께 기도한다.


2005년 4월 24일 

나는 할 수 있다! 아자 아자!

시간은 오후 8시. 지금 여긴 뉴욕이다. 짐이라고 해야 옷가지 몇 개. 금방 찾아서 공항을 나왔다. 언니 친구가 아는 분께서 숙소를 마련해 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인천공항을 떠나며 그렇게 울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참았던 눈물이 솟구쳤다. 그래도 참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엄마도 오빠도 동생도, 우리 가족 아무도 여긴 없다. 나약한 생각은 접자. 절대 쓰러지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꼭 살아남자. 우선 일자리부터 찾아야겠다. 영어도 문제다. 무조건 하는 수밖에…. 엄마가 걱정이다. 무사히 도착했다고 전화했을 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울고만 계셨다. 좋아질 거라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열심히 잘살 거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영 안심이 안 되시나 보다. ‘작은 딸을 위해 기도 많이 해달라’는 말로 수화기를 놓았다. 당분간은 집에 연락하지 말아야겠다. 뉴욕에서 살아남기,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는 할 수 있다. 아자 아자, 파이팅!!!


2005년 5월 18일  

일자리를 얻었다

우연찮게 들어간 네일숍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주급은 적지만 팁이 있어 괜찮을 거라고 주인이 얘기했다. 나에겐 주로 발 손님만 맡으라고 했다. 근무 시간은 오전 9시30분부터 저녁 8시30분까지. 몇 년 만에 얻은 직장이라 조금은 긴장이 된다. 열심히 해야지.

 

▲ 침몰 53일만에 인양된 참수리 357호.

 

2005년 6월 4일  

집 떠나면 서럽다는 말, 그대로다

숙소에 문제가 생겼다. 몇 달은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주인집에서 사정이 생겼다며 오늘 당장 나가라고 한다. 난감하다. 어디로 가지? 일을 시작한 지 2주밖에 안 돼 돈도 없는데. 집 떠나면 서럽다고 하는 말, 그대로다. 네일숍 동료에게 사정 얘기를 했더니 선뜻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한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신혼집이라는데 걱정이다. 이른 시일 안에 방을 구해야 한다.

 

▲ 2002년 8월 11일 국군수도병원에서 열린 한상국 중사의 영결식.

 

2005년 6월 22일  

남편을 팔아 돈을 벌었다니… 난생 처음 주먹싸움을 했다

미 동부 해군동지회가 뉴욕 플러싱 공영주차장에서 (서해교전) 3주기 추모제를 준비하고 있다. 참수리 357호를 (용산 전쟁기념관으로) 이전하자는 서명서도 받기로 했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좋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오늘 ‘남편을 팔아 돈을 버는 ×’이라는 악담을 들었다. 그동안 억울한 소리 참 많이 들었지만 이건 아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의 뺨을 쳤다. 싸움이 시작됐고, 나도 때린다고 했는데 되레 많이 맞기만 했다. 집에 와서 보니 온몸이 멍투성이다. 서러웠고 너무나 억울했다. “나라 버리고 온 네가 뭐가 잘났다고 그러느냐”고 한다. 왜 내가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나? 여태 살아온 시간 동안 내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나? 정말 힘들다. 기도했다. 제발 여섯 분의 명예회복을 시켜달라고. 당신의 아들 한상국을 기억해 달라고. 40일 동안 차디찬 서해 바다 밑에서 끝까지 배를 지켰던 당신의 아들을 꼭 기억해 달라고. 그리고 제발 이 가련한 딸에게 위로와 힘을 달라고.

 

▲ 2004년 6월 29일 서해교전 2주기 추모식.

 

2005년 6월 29일

기일예배, 3년 전 그 바닷속에서 얼마나 추웠을까

오전에 남편 기일 예배를 드렸다. 숙소로 돌아와 남편의 유품을 꺼내 보았다. 불에 탄 흔적이 선명한 신분증, 군 표식 목걸이와 나에게 다정하게 전화하던 휴대폰, 뭔가를 적었을 샤프 펜슬…. 그의 온기가 아련히 느껴진다. 3년 전 그 바닷속에 (상국씨는) 얼마나 추웠을까. 벌써 3년이 지났는데, 난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다. 정말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줘. 당신의 명예를 꼭 회복시킬 거야. 그때가 꼭 올 거야. I am strong,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please.

 

2005년 8월 19일  

우스터시 공원의 남편 이름, 언제 봐도 가슴이 아리다

얼마 전부터 청소 일을 시작했는데, 자주 몸이 아파 사장님께 죄송하다. 쉬운 일이 없다. 갑자기 우스터에 가고 싶어 서둘러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5시간 걸려 도착한 우스터시 유니언 광장. 한국전쟁 기념 공원의 벽돌에는 여섯 용사의 영문 이름이 선명했다. ‘한상국 중사, 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에서 사망하다….’ 언제 봐도 가슴이 아리다. 참수리357호를 보러 평택 2함대를 찾던 때가 생각난다. 벗겨진 페인트칠, “고철덩어리”라 말하던 사람들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구치기도 했다.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해 봤다. 지금 내 마음은 그들을 용서했을까. 아니다. 용서가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 필요 없다. 남편이 마지막을 함께 한 참수리357호를 반드시 용산 전쟁기념관으로 옮기고 말 것이다.

 

2005년 11월 23일  

한국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다

몸이 너무 아파 일도 나가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히터가 고장 나 난방을 못한 탓이다.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께서 죽과 약을 갖다 주셨다. ‘또 잘리면 큰일’이라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매니저가 부담 없이 한 주 정도 푹 쉬라고 했다. 며칠 전에는 일하다가 넘어져서 팔과 다리에 멍이 들었다. 사장은 신발에 문제가 있다며 새것을 사라고 하지만 돈이 없다. 참자. 그날 생일을 맞은 동료 린다는 꽃다발 선물을 받았다. 얼마 전 내 생일엔 무엇을 했나. 씁쓸한 웃음이 날 뿐이다. 한국에 있는 엄마 생각이 난다. 보고 싶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다. 아니 아직 못 간다. 그 사람이 간 지 벌써 3년이 넘었는데, 해 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내일 오전에는 엄마 목소리를 들어야겠다.


2006년 1월 22일  

나는 돈에 환장한 여자인가

지난 연말에 찍은 방송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날이다. PC방에서 방송보기를 시도했지만 아직 올라오기 전. 대신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봤다. 돈 때문에 생난리 친다는 얘기들…. 갖은 악담과 말도 안 되는 악플이 가득해 기가 막히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남편의 친구라는 사람이 올린 글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마디 하면서 붙고 싶었지만 남편을 생각해 참고 또 참았다. 당시만 해도 경황이 없어 나는 돈(보상금)이 얼마나 나오고 얼마나 받았는지를 잘 몰랐다. 남편 시신도 찾지 못했는데, 돈을 수령하라는 용지를 들고 온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돈 문제만큼은 시부모님이 먼저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용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시골 부모님께 가라고 했는데, 그런 사실을 알고나 하는 얘기들인지. 지금도 연금이 얼마인지 난 확실히 알지 못한다. 내가 받고 있는 보조금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그런데도 사람들 눈에는 내가 돈 때문에 환장한 여자로 보이나 보다. 괴롭다. 난 최선을 다해 남편과 다섯 전사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묻고 싶다. 당신들은 그분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힘들다. 정말 죽고 싶다. 아니다. 죽긴 왜 죽어. 누가 내 마음을 알까. 아니다.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2006년 6월 28일  

서해교전 4주기, 마음의 평화를 기도했다

내일이면 서해교전 4주기다. 아까 시부모님과 엄마랑 통화했다. 두 집안의 어른들 모두 눈물 바람이다. 며칠 전 (해군) 2함대에서 전화가 왔다. 잘 있느냐고, 힘들지는 않으냐고…. 누구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러고 보니 2함대와 한두 번 연락을 했던 것 같다. 청와대에서 때마다 나오는 선물세트를 시골 시부모님 집으로 보내 달라고 몇 번 얘기했었다. 고마운 우리 엄마는 한 번 빼고는 항상 시골 사돈댁으로 부쳐드렸지. 본인이 받고 싶을 때도 있었을 텐데, ‘이건 네 시부모님 거야’라면서 꼭 버스 타고 나가 우체국에 가서 부쳐드린다. 자식이 무엇인지. 나는 애물단지 같다. 오늘도 조용했다. 내일도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겠지. 11시간 꼬박 서서 일해 다리가 아프지만, 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다. 내일 행사에 많은 분이 왔으면 좋겠다. 먼저 가신 분들이 섭섭하지 않게 초라하지 않았으면…. 뉴욕 해군동지회에서 전화가 왔다. 작년 6월 이후 연락 한번 없었는데, 내일 행사가 있으니 꼭 참석해달라는 것이다. 일 때문에 갈 수도 없었지만 사실 핑계였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한 이벤트라고 말하면 다들 나를 욕하겠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도와달라고, 때를 기다리겠다고,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2006년 9월 15일  

또 이사했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또 이사를 했다. 꼽아보니 지난 1년 동안 8번째 옮긴 셈이다. 여태 모은 돈과 엄마에게 빌린 돈으로 퀸즈 우드사이드에 아파트를 얻었다. 교회 청년 부부가 살던 아파트로 작은 침실이 딸렸다. 내 이름으로 렌트하는 게 처음이라 기분이 좋았다. 물 많이 쓴다고 샤워도 제대로 못 하고, 히터가 안 돼 냉방에서 고생하고, 에어컨 켠다고 쫓겨나고, 사기 당해 지낼 곳을 빼앗기고…. 성추행을 당할 뻔해서 바로 짐 싸들고 나온 적도 있었다. 불법체류자 신세라 좋은 직장은 꿈도 꿀 수 없는 신세. 부당한 경우가 많지만 그저 참고 지낼 수밖에. 먹고사는 게 힘들지만 그래도 감사하다. 한국에 있었으면 죽을 날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피해의식. 조금이라도 서운한 말을 들을 때 항상 들곤 했던 이 피해자 의식을 벗어나고 싶다. 조울증과 우울증으로 참 힘들었다. 참지 못하고 화내고,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된 나 자신을 바꿔보고 싶다. 자신 있는 내 모습이 그립다.

 

▲ 참전용사회 프랜시스 캐롤 회장과 함께.

 

2006년 10월 1일  

실비아 언니의 결혼식 들러리를 섰다

우스터에 사는 실비아 언니의 결혼식 날이다. 들러리를 꼭 해달라고 한 달 전부터 보챘었지. 너무나 좋은 날씨. 신부 화장을 곱게 한 언니는 참 예뻤다. 언니의 가정이 늘 행복하길 간절히 기원했다. 결혼식이 시작됐고 다들 춤추고 노래 부르며 즐기는 자리. 난 우울했다. 나도 언니처럼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었는데, 모두의 축복 속에 행복한 결혼식을 하고 싶었는데…. 정신차려 종선아.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해.

 

▲ 참전용사인 잭 릴리(왼쪽),켄 스위프트 할아버지와 함께.

 

2007년 3월 11일  

살얼음판 같은 인생… 난 이 산들을 넘을 것이다

엄마가 편지와 약을 보냈다. 엄마가 좋아하는 찬송가가 쓰여 있었다. ‘주님,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무덤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엄마는 꿈을 갖고 기도하라는 얘기도 하셨다. 목표와 꿈을 간직하라고도 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하지만, 난 이 산들을 넘을 것이다. 꼭 넘어 승리자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 살얼음판 같은 인생이지만 목표를 향해 지혜롭게 나아가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2007년 5월 15일  

기침 때문에 잠을 못 잤다, 병원에 들렀다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밤에는 더욱 심해 잠을 잘 수 없다. 병원에 들러 사정 얘기를 했더니 검사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약을 먹고 한숨 잤더니 좀 나은 듯하다. 다시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


2007년 5월 26일  

올해가 마지막 기념일이란다

올해 기념식이 마지막이 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오래했지…. 명예회복이 되지도 않았는데 기념식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하긴 이 초라한 기념식마저 없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겠지.


2007년 6월 6일                             

나는 진짜 못된 딸이다

현충일. 오전에 엄마와 통화했는데 현충원에 갔다 오셨다며 또 눈물 바람이다. 그런 엄마한테 난 지금 아침이니 제발 그만 좀 눈물을 보이라고 타박했다. 그 맘을 알면서도,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나. 진짜 못된 딸이다. 몸이 안 좋아 조퇴하고 다시 병원에 갔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회사, 이번에는 잘 다녀야 하는데.

  

▲ '한상국 중사, 2002년 6월 29일 전사 서해교전'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우스터시 한국전 기념 동상의 벽돌.

 

2007년 6월 29일             

나만의 5주기 추모식을 가졌다

우스터에 가는 길. 기차를 타고 가다 중간에 워싱턴 근처에서 한국전 참전용사인 잭 릴리 할아버지를 만나 그분의 차를 타고 함께 갔다. 참전용사회 부회장인 켄 스위프트 할아버지도 만났다. 후두암 수술을 받은 지 며칠 안 됐다는 회장 프랜시스 캐롤 할아버지는 집에서 눈물이 가득히 고인 눈으로 날 반겨주셨다. 10월에 있을 한국전쟁 기념 공원에서 가질 (한국전 참전기념) 동상 건립 기념식에 다른 쟁쟁한 분들과 함께 나를 초청해 주셨다. 나에겐 기회가 될 수 있을까? 먼저 간 여섯 분의 명예회복에 대해서 꼭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잭 할아버지와 함께 가게에 들러 하얀 꽃을 한아름 샀다. 유니언광장에서 나만의 5주기 추모식을 가졌다. 한 분 한 분 벽돌을 만져 드렸다. 5년 전 그때가 생각났다. 배가 침몰했다고 했고, 남편은 실종됐다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왜 바로 선체를 인양하지 못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들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걱정과 분노 속에 40일이 지났고 남편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남편의 시신을 조타실에서 발견했다고 했다. 남편의 시신은 물에 부풀어 올랐지만 불에 탄 흔적은 없었다. 너무나 깨끗했다. 난 분명히 기억한다. 조타실에 불이 나 가라앉은 배에서 남편의 시신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던 그들의 말을. 그들은 남편의 시신을 차디찬 바닷속에 배와 함께 놔둔 채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실종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체면만 생각하는 우리나라 대양 해군. 이런 식으로 무슨 발전이 있겠나.

 

2007년 10월 20일 

미국인들이 오히려 내게 “고맙다”고 했다

한국전쟁 기념 동상 제막식이 열린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시. 청명한 가을 날씨다. 좀 쌀쌀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난 가져온 배지를 나눠줬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있고 ‘한국은 당신을 기억합니다’ ‘형제애를 영원히 지켜나갑시다’란 영문 글귀가 적힌 배지다. 고맙다며 일일이 인사하는 참전 용사 할아버지와 가족들. 오히려 내가 더 고맙고 감사한데, 그들은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행사가 시작돼 자리에 앉았는데, 내 자리는 VIP석이었다. 우스터 시장 부부와 행사의 주역들, 왕년의 여배우, 군 관계자들, 우리 보스턴 영사관분들…. 지난 대선 때 대통령 후보로 나온 존 케리 상원 의원도 보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나라를 위해 먼저 가신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찡했다. 기념 동상의 바닥 벽돌엔 남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서해교전 전사자 6명을 이렇게 정성껏 추모하는 곳은 없다.


2008년 1월 7일 

‘서해교전 추모제 격상’ 뉴스, 읽고 또 읽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메일을 확인하고 뉴스를 검색하다가 눈이 번쩍하는 기사를 만났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서해교전 추모제를 국가가 주관하는 행사로 격상해 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실일까?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일, 그 일이 당장 올해부터 이뤄지다니. 한 10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 동안의 고생과 서러움이 번갯불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물이 나왔다. 참으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니, 그래 오늘은 실컷 울어보자. 여기 저기서 앞다퉈 메일이 왔다. 다들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하지만, 소식을 접한 뒤 너무나 가슴이 벅찼다. 모든 분들께 고맙다.


2008년 1월 26일  

난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서해교전 추모본부 회원들에게 오랜만에 소식을 전했다. 좋은 소식을 연초부터 들어 진짜 행복하다. 제발 끝까지 마무리가 잘 되길 기원한다. 빨리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돈 때문에 그런다며 더 심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때마다 신랑 앞에 한 맹세를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다.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 비웃고, 억울한 소리를 하고, 말도 안 되는 별별 얘기를 한다고 해도 난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2008년 2월 16일  

이제 집으로 간다.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다

완전히 결심했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4월 초면 미국 생활도 끝난다. 한 달 반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결과다. 마음먹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엄마의 건강이 더 안 좋아지면 어떡하나? 아버지처럼 병원 신세를 지다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지? 한 분뿐인 엄마인데. 그래, 가자. 가서 애물단지 딸이지만 효도를 하자. 남들은 내 속도 모르고 또 여러 이야기를 쉽게 해대겠지. 어차피 내 인생. 그네들이 살아 주는 게 아니다. 신경 쓰지 말자. 가려고 마음을 먹으니 빨리 가고 싶다. 가족들이 너무나 보고 싶다.

 

2008년 3월 10일  

한쪽 마음이 시린 것은…

요즘에는 잠도 더 못 자고 입맛도 없다. 소화가 잘 안 돼 저녁을 조금 먹거나 아예 먹지 않는다. 왜 이러지. 스트레스 때문인가. 이번 주까지 일하면 모든 게 끝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너무나 좋지만, 내가 놓인 상황이 어떤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다음 주 중으로 짐을 부칠 것이다. 이번에 나가면 10년 동안 미국에 올 수가 없다고 하는데…. 우스터에 있는 6·25 전쟁 기념공원에 있는 벽돌들도…. 만약 (참전용사) 할아버지가 한 분이라도 돌아가시면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는데…. 한쪽 마음이 시린 것은 그래서일 거다.


김종선씨가 초기 대표… 네티즌 3600명 매년 추모행사

대통령에 ‘서해해전 명칭 변경’ ‘참수리호 이전’ 건의


‘서해해전 전사자 추모본부’는 사람들의 기억과 관심에서 차츰 사라져가는 서해교전의 진실을 알려 나가자는 모임이다. 2002년 연말, 전사자에 대한 제대로 된 예우와 추모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데 뜻을 함께 한 네티즌 12명이 모였고 이듬해 1월 2일 다음 카페를 만들었다. 추모본부는 2003년 6월 29일 광화문에서 서해해전 1주기 추모행사를 연 것을 시작으로 온·오프라인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회원은 3600여명 정도. 김종선씨는 2004년부터 미국 출국 직전까지 2년 동안 이 카페 대표를 맡기도 했다. 현재 추모본부장은 ‘멋진 해군’이란 아이디를 사용하는 김상길(37)씨. 1993년 동해 해군 1함대 초계함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2003년 5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해마다 추모식이 거행되지만 달라지는 것은 2, 3, 4, 5주기의 숫자밖에 없다”면서 “그런 안타까움 때문에 이 일에 더 매달리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추모본부 일에는 대학교수, 변리사, 회사원 등 안보와 국방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 10여명이 힘을 보태고 있다.

 

▲ 서해해전 전사자 추모본부 cafe.daum.net/pkm357


추모본부는 지난 1월 29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게 건의문을 보냈다. 주요 내용은 △서해해전으로의 명칭 변경 △전사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서훈의 재평가 △승조원들의 국가유공자 대우 △참수리357호의 전쟁기념관 이전 등 4가지다.


김상길 추모본부장은 “김대중 정부는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해 해전을 교전이라 축소했다”면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과 일본 수군의 세세한 전투도 해전으로 기록됐다”고 했다. 그는 “부상 당한 장병들은 전역 후 치료비를 본인이 부담하는 실정이라며 외상 후 증후군과 같은 부분도 보훈 혜택이 가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참수리357호의 전쟁기념관 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 안보의 중요성에 대한 귀감(龜鑑)을 멀리 떨어진 2함대 안에 전시해 국민의 관심과 기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 필요한 재원이 부족할 경우 국민 캠페인을 벌일 계획도 있다고 했다. 비와 눈으로부터 참수리357호를 가려주는 차단막이 없어 선체의 부식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도 지적했다.


서해교전?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25분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 고속정인 참수리 357호에 선제공격을 가해 침몰시킨 사건이다. 교전 과정에서 윤영하 소령, 한상국·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와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했고, 이희완 대위 등 18명이 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