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대통령을 지배하는 한국의 퍼스트레이디 8인

풍월 사선암 2008. 3. 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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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망한다'는 옛말이 있다. 그만큼 며느리이자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은 한 가정을 꾸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물며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의 아내는 어떠하겠는가. 훌륭한 영부인은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의 성공 여부를 좌우하기도 한다. 대통령의 특별 조언자 역할을 했던 역대 영부인 8인의 면면을 조명해본다.



푸른 눈의 퍼스트레이디, 프란체스카

“아내의 지혜와 용기, 인내와 슬픔, 노력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날을 맞게 했다” - 이승만 전 대통령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보냈던 이승만 박사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스위스에 들렀다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식을 올렸지만 많은 동포들이 이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박사의 훌륭한 비서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취임한 뒤 미군정으로부터 관련 업무를 이양 받는 과정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역할은 컸다. 재임 기간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해 피난 생활을 해야 했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와중에도 세계 각국에 한국 부상병들을 위한 담요와 구호품을 보내달라는 영문 편지를 직접 써서 보내기도 했다. 그녀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먼저 구호품을 보내줬고, 이후 세계 각지에서 구호품이 도착했다. 남편의 나라, 한국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던 프란체스카 여사. 어느 날 한 외국인이 ‘오스트리아 사람이냐’고 묻자, ‘아니오. 난 한국인이에요’라고 답한 일화는 그녀의 한국 사랑을 짐작하게 한다.


1, 젊은 시절 프란체스카 여사의 모습.

2, 1957년 영주 부석사에 들른 이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린애처럼 손을 맞잡고 있다.

3, 1953년 11월 13일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 부부와 함께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

    프란체스카 여사는 막힘없는 영어 구사력으로 6·25 전쟁 전후 세계 각지에 구호를 요청하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활발히 수행했다.


 

순종적 아내에서 자주적 사회운동가로, 공덕귀

“그때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갔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 공덕귀 여사


신학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공덕귀 여사는 결혼에 도통 관심이 없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 유학을 준비하던 중 주변에서 당시 서울 시장을 맡고 있던 윤보선 전 대통령과 혼사를 주선했다. 한사코 공부를 더 하겠다는 그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의지가 하도 대단해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윤보선 전 대통령과 혼례를 치른다.


예를 중시하는 명문가의 맏며느리로 들어온 공덕귀 여사는 이 자리가 귀양살이처럼 외롭고 힘들었다. 공 여사는 명문가의 예의와 함께 며느리, 아내, 어머니 역할을 익히는 일을 무척 힘들어했다. 평소 걸음걸이가 남자같이 활달하던 그녀는 시집온 뒤 걸음걸이 훈련까지 받아야 했다.

 



조용한 삶은 이후 청와대 생활에서도 이어졌다.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자이자 일본 유학을 다녀온 교수 출신이었지만 정치적, 시대적 상황이 그녀의 역동적인 역할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 여사는 정치에는 일절 참견하지 않았고 그저 교회 지도자들을 청와대에 초청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여러 가지 조언을 듣곤 했다. 그녀의 본격적인 활동은 1년 8개월의 청와대 생활을 청산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 발휘됐다. 남편의 퇴임 이후 조용히 살았던 다른 역대 퍼스트레이디들과 달리 공 여사는 여성 지도자로 민주화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에 몸을 살랐다.


1, 공덕귀 여사는 결혼 직후 “1949년 1월 6일, 안국동 8번지로 귀양을 왔다”며 도미 유학의 꿈이 꺾인 것에 대해 자조 섞인

    평을 했다.

2, 공 여사의 퍼스트레이디 시절 활동은 외교사절 접대, 여성 단체 활동 참석, 의료기관 방문 등의 의례적인 것에 그쳤다.

    사진은 외교사절 부인들을 청와대에서 접견하는 모습.


 

죽어서도 빛나는 영원한 국모, 육영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역대 페스트레이디 중 가장 인기 있다고 손꼽히는 육영수 여사. 육 여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임무는 ‘청와대의 귀’가 되는 것이었다. 정보와 민심을 차단하는 일은 곧 대통령의 정치적 장래를 망치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심을 알기 위해 라디오를 즐겨 들었던 육 여사는 일 때문에 이 방 저 방으로 옮겨 다닐 때에는 아예 라디오를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한다. 라디오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은 물론 익명으로 배달되는 발행 금지된 신문들까지 모두 챙겨 읽었다.

 


11년의 세월을 영부인으로 청와대 생활을 한 육 여사는 퍼스트레이디의 역할 모델을 정립하게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페스트레이디로서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항상 조심하고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다. 또 사투리를 개선하고 화법과 시선 처리, 화장법과 옷차림새 등 이미지 메이킹에도 관심을 쏟았다. 그중 퍼스트레이디 비서실을 최초로 공식화하고 ‘퍼스트레이디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만든 일이 최고의 업적으로 꼽힌다. 비서실의 주요 업무는 민원 처리였다. 육 여사는 민의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자신 앞으로 온 편지는 모두 직접 읽고 답장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등 민원 해결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또 재임 기간 동안 나환자의 손을 잡고 그들이 건넨 음식을 같이 나눠 먹는 인간적인 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을 보여줬다.


서거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아직까지 육 여사가 이권이나 정실 인사에 개입했다거나 사리사욕을 챙겼다는 부정적인 비난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육 여사는 우리나라 퍼스트레이디 가운데 가장 비정치적이면서도 가장 정치적인 영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박하고 서민적인 퍼스트레이디, 홍기

“공평하고 원칙을 중히 여기며 남편이 청렴할 수 있도록 내조한 공이 크셨습니다” - 최홍순 최규하 전 대통령 비서실장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홍 여사는 정규 교육기관에 다니지 않았다. 대신 집안에서 어른들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전통적인 한국 여인이 갖춰야 할 교양을 쌓으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학생이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과 결혼한 홍기 여사는 이후에도 약 10년간 남편의 학업으로 인해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최 전 대통령이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갔을 때 홍기 여사는 시댁인 원주에서 어른들을 모시며 큰며느리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국무총리를 지내던 남편이 박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대통령 직무 대행을 맡고 있다가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홍 여사도 하루아침에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퍼스트레이디가 됐지만 홍 여사의 태도나 모습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특별히 꾸미지도 않았으며 가족이 먹을 김치는 항상 직접 담갔다. 퍼스트레이디일 때나 아닐 때나 홍 여사의 모습과 생활 방식은 늘 한결같았다.


청와대 시절 동안 홍 여사는 추석을 전후해 양로원과 고아원 등을 열심히 다니는 것 이외에는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퍼스트레이디로서 꼭 해야 할 의례적인 일만 수행했을 뿐이다. 약 2백50일 동안 청와대 생활을 했던 홍기 여사는 불안한 정치 상황 때문에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홍 여사는 죽기 전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8년간 투병했다. 남편의 부자연스러운 퇴임은 물론, 퇴임 이후 서서히 남편을 압박하기 시작한 여론으로 인해 말 못할 심적 고통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 최규하 전 대통령과 홍기 여사.

2, 최규하 대통령 취임 후 취재진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홍기 여사.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기보다는 남편 뒤로 물러나 내조하는 일에 주력했다.



화려한 권좌와 지옥 같은 나락을 오가다, 이순자

“나는 내 모든 것을 그분의 상황 속으로 던져 버리기로 결심했어요” - 이순자 여사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진학한 이순자 여사는 의사의 꿈을 포기한 채 스무 살의 나이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군인의 아내로 사는 살림은 넉넉지 않아 처가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때 이 여사는 가정에 보탬이 되고자 미용 기술과 편물 기술도 배웠다. 이 여사의 내조는 베테랑 수준이었을 뿐 아니라 재테크나 자식 교육에도 뛰어났다. 하지만 퍼스트레이디라는 자리는 이 여사에게 커다란 도전이었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당시 이 여사는 남편과 나란히 취임식장에 입장했다. 군인 시절부터 공식 행사장에는 항상 부부가 동반 참석했기 때문에 이들 부부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화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대다수의 국민들은 몸을 약간 뒤로 젖힌 채 앉거나 대통령과 나란히 손을 흔들며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이 여사의 모습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게다가 대통령 취임식 때 입은 화려한 컬러의 의상이 국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이 여사는 육영수 여사를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아 본받으려 했다. 특히 교육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 새세대육영회와 새세대심장재단을 설립해 유아교육과 심장 수술의 발전에 양적·질적 공헌을 했다. 하지만 이런 공적도 친인척 비리로 인해 그 빛이 바랬다. 청와대를 떠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5공 청산’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휘말리면서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받았다.


1, 이순자 여사와 전두환 전 대통령 기족의 기념사진.

2, 심장병 어린이 돕기 거북이 대회에서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낸시 여사가 방한 후 한국의 심장병 어린이 2명을 미국으로

    데려가 치료해주었다. 그후 이순자 여사는 ‘퍼스트레이프로젝트’로 심장병 어린이 돕기를 설정, 이에 주력했다.



그림자처럼 조용한 내조형 파트너, 김옥숙

“당시 부속실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영부인 활동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 청와대 핵심 관계자


김옥숙 여사는 청와대에 있는 동안 자신과 관련한 모든 행사를 언론에 알리지 않고 일체 대중매체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 관련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하지 않았고 어쩌다 참석해도 발언을 극구 삼갔다. 특히 김 여사는 재임 중 단 한 건의 인터뷰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림자 내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선거 기간 중에도 남편 유세 활동에 함께 가기는 했지만 항상 군중 속에 섞여서 깃발을 흔들거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퇴임 즈음에서야 김 여사의 활동 중 일부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20여 년간 소년소녀가장 10가구와 결연 관계를 맺고 인간적, 금전적 도움을 줬고 해마다 한 번씩 이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와 함께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부터 산간벽지에 있는 고아원, 양로원 등도 방문했다고 한다.


청와대에 입성한 김 여사는 특히 옷차림에 많은 신경을 썼다. 전임자인 이순자 여사의 옷차림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감안한 차별화 전략인 동시에 군사 정권의 연장선이라는 평가를 받는 정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완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김 여사는 대단한 멋쟁이였음에도 주변 환경과 시선 때문에 자신만의 솔직한 패션 스타일을 추구하지 못했다. 온화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육영수 여사 스타일을 벤치마킹했다. 순조롭게 임기를 마감할 것처럼 보였던 김 여사는 노태우 대통령 퇴임 2년 후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이순자 여사와 비슷한 고난의 길을 걷게 됐다.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원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 여사는 아예 두문불출했다. 김 여사의 근황은 베일에 싸여버렸다.


1, 미소 짓는 김옥숙 여사.

2, 1992년 1월 노태우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로라 부시 여사를 따로 만나 환담을 나누는

    김옥숙 여사.

3, 1988년 2월 26일에 열린 대통령 취임 축하 연회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옥숙 여사가 참석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 발 뒤로 물러난 현모양처, 손명순

“아내는 가족의 드러나지 않는 중심이며, 나는 아내에게서 또 다른 어머니를 느낀다” - 김영삼 전 대통령


김옥숙 여사는 청와대에 있는 동안 자신과 관련한 모든 행사를 언론에 알리지 않고 일체 대중매체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 관련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하지 않았고 어쩌다 참석해도 발언을 극구 삼갔다. 특히 김 여사는 재임 중 단 한 건의 인터뷰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림자 내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선거 기간 중에도 남편 유세 활동에 함께 가기는 했지만 항상 군중 속에 섞여서 깃발을 흔들거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손명순 여사는 대학 3학년 때인 20대 초반에 동갑내기 대학생인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스물세 살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40여 년을 정치인의 아내로 지냈다. 이화여대 약학과에 재학 중이던 손 여사는 기혼자는 퇴교해야 한다는 이화여대의 학칙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학업을 마치고 졸업을 했다. 학교에 결혼 사실을 알리지 않고 공부를 마치겠다는 집념으로 임신으로 불러오는 배를 천으로 감싸고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들었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손 여사는 학창 시절부터 대통령을 꿈꾸었던 남편을 위해 자신만의 내조법을 만들었다. 첫째는 가난을 참는 것이고 둘째는 남편에게 용기를 주는 것, 마지막으로 집에 찾아온 사람에게 기꺼이 밥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그의 성공의 절반은 손 여사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손 여사는 조용하고 소극적인 퍼스트레이디로 5년 동안 청와대 생활을 했다. 대신 청와대의 권위적이거나 소비적인 부분 등 낡은 관행을 바꾸는 데 앞장섰다. 청와대 수행원들과 운전기사들이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식사할 공간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구 본관 건물을 개조해 구내식당을 만들고 여성 직원 전용 휴게실을 만들었다. 또 청와대 직원들의 식구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청와대 구경도 하게 했다. 손 여사는 전임 퍼스트레이디들과 달리 구설도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손 여사는 남편의 재임 기간 중 정치인 부인들은 고사하고 청와대 내에서 같이 근무하는 참모들인 대통령 비서실장과 수석 비서관 부인들을 초청해 식사를 같이 하는 의례적인 모임조차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 손 여사는 자신이 입는 옷의 라벨을 떼고 입었으며 청와대 면회실로 들어온 선물도 대부분 돌려보냈다고 한다.


1, 베이징 제4회 세계여성회의장에서 한국을 대표해 기조연설을 하는 손명순 여사.

    퍼스트레이디가 유엔여성회의에 참석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2,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세계여성회의에 참석한 손명순 여사가 당시 리펑 중국 총리와 환담을 나누는 모습.

3, 1996년 김영삼 대통령, 손명순 여사 부부의 가족사진.



대통령을 만든 정치적 동반자, 이희호

“남편의 의견을 단순히 대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 제시한 정치인이었다” - 예춘호 전 국회의원


이희호 여사는 마흔한 살의 나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고 있어 정부의 감시 대상 1호였다. 자연히 이희호 여사 역시 24시간 감시와 미행, 도청 등에 시달렸다. 수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김 전 대통령을 대신해 이 여사는 홀로 자식을 키우면서 남편 뒷바라지뿐만 아니라 같이 잡혀간 남편 비서들의 뒷바라지까지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방학’이라고 불리는 약 15년 동안 이 여사는 단순히 남편의 내조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남편을 대신해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남편의 상황과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직접 외신기자들을 만나고 해외 유력 인사들에게 편지를 썼다. 시위와 집회에도 직접 참여했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4수 끝에 국가 최고 통치권자가 됐을 때 이희호 여사의 나이는 75세였다.


동교동 시절부터 검소한 것으로 유명했던 이 여사는 청와대 안주인이 되어서도 이전과 다름없이 살림을 검소하게 운영했다. 특히 당시 IMF로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 침대를 제외하고 의자, 식기 등 대부분의 집기를 전임자가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썼다. 바꾼 것은 커튼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이 여사는 1980년 이후의 퍼스트레이디 중 가장 훌륭한 퍼스트레이디로 손꼽힌다. 뚜렷한 업적을 많이 이룬 이 여사는 젠더 이슈를 직접 제기하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첫 퍼스트레이디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평생 일해온 이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이와 관련된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 결식아동을 돕는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을 발족했다. 퇴임 후에도 재임 중 만들었던 이 단체와 ‘한국여성재단’의 명예총재, 명예고문 등 다양한 분야의 명예직을 맡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최초의 인물이다.


■정리/이민경(자유기고가) ■자료 제공/ 한국의 퍼스트레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