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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말년 어지럽힌 간신 - 김흥경

풍월 사선암 2007. 9. 19. 07:28

공민왕 말년 어지럽힌 간신 - 김흥경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은 여장 광대 공길에게 동성애를 느낀다. 그러나 필자가 과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조선에서는 동성애적 성향을 보인 왕이 한 명도 없었다. 반면, 고려 대에는 그렇지 않다. 정사인 <고려사>를 보면 목종과 공민왕이 동성애에 빠진 것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왕 모두 정치적 위기 상황에 있을 때 동성애에 탐닉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하나 같이 왕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농단했다.

 

고려의 7대 임금인 목종은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어서 임금의 도량이 있던 인물이라 했다. 하지만 목종은 너무 착했다. 효성이 지극해서 18살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기가 센 어머니 천추태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이 때문인지 목종은 점차 술에 빠져들었고, 용모가 미려한 유행간이란 측신과 남색을 즐기기도 했다. 왕의 총애를 받는 만큼 유행간은 벼슬이 합문사인(閤門舍人)으로 뛰어올랐으며 권세를 자랑했다. 재상을 비롯한 백관들에게 턱과 낯빛만으로 지시하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역시 용모가 뛰어났던 유충정과 함께 왕실의 실세가 되었다.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가동되면 자연 위기는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오래지 않아 목종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천추태후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분위기도 농후했다.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려던 태후에 맞서 중국의 유교를 숭상하는 문신 관료들의 불만도 내연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왕에게 가는 정보를 독점하고 왜곡하는 유행간의 전횡도 위기의 심화를 거들었다. 결국 궁궐이 불에 타는 소란이 벌어진 뒤 목종은 천추태후와 함께 죽음을 당한다. 강조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서였다. 그토록 권력을 농단하던 유행간과 유충정은 강조의 정변 와중에 처형당했다. ‘강조의 변’은 워낙 의혹의 소지가 많은 사건이라 사서에 기록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행간의 남색 행각과 오만한 권력 자랑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공민왕의 엽기 행각?

 

고려시대 임금의 남색행각 중 가장 극적인 건 역시 공민왕의 일이라 하겠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회복하게 했던 고려 후기 최대의 명군이자 개혁군주였다. 그는 재위 20년의 대부분을 원의 간섭과 홍건적·왜구의 침입과 싸웠다. 내부적으로는 부원파 세력과 권문세족의 반발을 뚫고 끊임없는 개혁정치를 폈다. 그러나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고, 신돈을 내세운 개혁정치가 좌절된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공민왕의 행적은 엽기적인 폭군의 행각과 다를 바 없었다.


공민왕의 남색 대상은 바로 김흥경이란 젊은 신하였다. 얼마나 총애했는지 하루 저녁도 휴가를 주지 않고 항상 침전에서 데리고 잤다. 물론 김흥경의 벼슬은 몇 달 만에 좌우위상호군이란 고위직으로 껑충 뛰었고 오래지 않아 자제위란 기관의 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자제위는 홍륜, 한안, 권진, 홍관, 노선 등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 자제를 선발해 만든 기관이었다. 이들의 총책임자가 바로 김흥경이었다. 김흥경을 비롯한 자제위에 속한 인물들은 음탕하고 추악한 짓으로 왕의 총애를 입었다고 한다.


이들과 공민왕의 행각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대를 잇기 위해 여러 비와 강제로 관계시켜 사내아이를 낳게 해 자기 아들로 삼으려 했다. 정비·혜비·신비는 죽음으로 항거하고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익비의 궁에 행차해서는 김흥경, 홍륜, 한안 등을 시켜 익비와 성행위를 하도록 했다. 익비가 거절하자 공민왕은 칼로 위협해 관계를 가지도록 했다. 그 뒤로는 홍륜 등이 아예 재미 붙여 왕의 명을 사칭하고 수시로 익비와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공민왕 자신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력이 없는 관계로 노국공주가 살아있을 때도 동침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에는 여러 비를 두었지만 모두 별궁에 두고 동침하는 일이 없었다. 밤낮으로 노국공주 생각만 하며 슬퍼하여 마음에 병(心病)이 들었다.

공민왕은 이런 마음의 병 때문에 변태적인 성적 행동을 보였다. 젊은 궁녀를 방안에 들여 보자기로 얼굴을 가리게 하고 홍륜 등을 시켜 성행위를 하게 했다. 공민왕은 옆방에서 창에 구멍을 뚫고 이를 훔쳐보았다. 이때 공민왕은 짙은 화장을 하여 여자처럼 꾸미고는 마음이 동하면 관계를 하던 홍륜 등을 침실로 끌어들여 성행위를 했다고 한다.


공민왕이 시해된 것은 이런 엽색행각 뒤의 일로 역사에 기록됐다. 재위 23년 9월 환관인 최만생과 자제위의 홍륜 등에게 시해된 것이다. 시해 하루 전 최만생은 공민왕을 변소에까지 따라와 은밀하게 이런 말을 전했다.


“익비가 임신한 지 5개월이 됐습니다.”

“내가 후사를 부탁할 데가 없었는데 비가 아기를 배었으니 이제 근심이 없다.”


공민왕은 자신이 억지로 익비를 자제위의 내시들과 관계시킨 것을 알기 때문에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누구와 관계했느냐?”

“비가 홍륜이라고 합니다.”

“내가 내일 창릉에 배알하고 거짓으로 주정을 부리어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을 닫게 하겠다.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또한 마땅히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아라.”


자신까지도 연루돼 죽는다는 말을 들은 최만생은 두려움에 떨며 홍륜, 권진, 한안, 노윤 등에게 공민왕의 말을 전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은 오히려 술에 만취한 공민왕을 칼로 찔러 시해했다. 그런데 칼질을 한 이들이 “적이 밖에서 들어왔다”며 부르짖었는데도 위사들은 겁을 내 떨면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재상을 비롯한 신하들도 변고를 들었음에도 들어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내시 이강달이 사실을 알았는데 비밀에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왕의 명령이라 하여 이인임, 경복흥, 안사기 등을 소집해 사태 수습을 논의했다. 이인임은 처음에는 승려인 신조를 의심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다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 그를 심문하자 사태의 진상이 드러났다. 홍륜 등 일파는 체포돼 사지가 찢겨지는 차열형을 당하고 삼족이 멸해지는 극형을 받았다.


의문투성이인 공민왕의 죽음

 

재위 23년간 끊임없이 개혁을 추진했던 공민왕의 최후는 이토록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역성혁명을 추진했던 인사들에 의해 40년간이나 수없이 고쳐진 것을 보면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든 건 사실이다. 공민왕 말기의 엽기적 행각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시킨 역성혁명파의 악의적 조작을 정당화시킨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기도 하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신돈이 실각했던 1371년에도 공민왕이 개혁을 단념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신돈이 실각하면서 개혁의 깃발은 꺾였다. 경복흥, 최영 등 무인세력이 복권해 경복흥이 좌시중, 최영이 문하찬성사로 임명됐다. 왕 중심의 강력한 개혁정치에서 권세가 체제로 복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공민왕이 마냥 손을 놓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신돈이 실각한 6개월 만인 그 해 12월에는 21개조에 달하는 개혁조서를 발표했다. 조서에는 정치와 군사체제의 정비와 민생안정책이 제시되었다.


또한 공민왕이 설치한 자제위란 기관은 사서가 기록했던 바와 같은, 미소년을 뽑아 공민왕의 남색 욕구를 채우는 기관이 아니었다. 자제위의 책임자였던 김흥경은 대몽항쟁 때 용맹을 떨쳤던 시중 김취려의 증손이었다. 홍륜 또한 시중 홍언박의 손자였다. 홍언박은 김용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하다 살해된 인물이었다. 다른 인물도 아버지가 찬성사, 밀직부사, 판각문사 등 고관이었던 명문가의 자제였다. 김흥경은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이란 경호부대의 간부란 보직을 가졌다. 곧 자제위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명문가의 자제로 구성된 왕의 친위부대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공민왕 시해의 배후세력은?

 

물론 공민왕의 이러한 시도는 뾰족한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신돈의 개혁추진의 실패, 중원의 패자로 등장한 명나라와의 외교갈등으로 일관된 추진력을 가질 수 없었던 탓이다.


이런 가운데 발발한 공민왕의 시해는 단지 이들 젊은 측근들이 일으킨 돌발적 사태라고 볼 수만은 없는 여러 정황이 드러난다. 이미 수차례의 암살 음모를 물리쳤던 공민왕이 이토록 순식간에 죽음을 맞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태의 수습과정을 보면 왕의 시해사건 처리로 보기에는 너무 엉성한 것도 사실이었다. 왕권이 땅에 떨어졌던 무인정권기에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민왕 사후에 진행된 후사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대략 어느 세력이 시해 사건의 배후에 있는지는 추론해볼 수 있다. 당시 공민왕의 후사를 둘러싸고 여러 파벌이 우왕을 추대하려는 이인임 일파와 다른 종실에서 맞이하려는 파, 그리고 북원에 있던 독타불화(충렬왕의 손자인 심왕 고의 손자)를 추대하고자 하던 부원파 등이 그들이었다. 이 중 독타불화를 내세우려는 친원파가 시해자들의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공민왕이 죽기 사흘 전에 북원의 중이 강순룡에게 독타불화를 고려왕으로 책봉하였다는 말을 전했다. 이 일로 두 사람 다 옥에 갇혔다. 원의 왕위 폐립에 신경이 곤두섰던 공민왕으로서는 응당 취할 수 있는 조치였다. 그리고 공민왕이 시해될 무렵 고려에 와 있던 명의 사신 채빈과 임밀이 호송관 김의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사신을 살해한 김의는 본래 원나라 사람으로 친원파와 연결고리가 있었다. 곧 친원파는 공민왕을 살해하고 독타불화를 옹립한 뒤 원과 연합해 명과 일전을 치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 시해 후 이인임이 재빨리 우왕을 세움으로써 이들의 시도는 불발로 그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은 유교국가에서는 더욱 분명했다. 공민왕 말년의 변태적 행위는 조선 측에서 건국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왜곡됐을 가능성은 농후했다. 그럼에도 국왕 친위기구 자제위의 책임자인 김흥경은 간신의 한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왕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농단하는 것은 어느 간신배에게서나 나타나는 용렬한 모습이다. <고려사 간신열전> ‘김흥경조’에는 뇌물을 받고, 공적 권력으로 사적인 원한을 갚는 등의 행각이 잘 나타난다. 여색을 탐한 것은 물론이다. 자제위 책임자로서 김흥경의 행위는 대의보다는 소의를, 주어진 과제보다는 자신의 안녕만을 돌보는 간신의 폐악을 그대로 보여준다.


애초 오헌이란 자는 홍륜 등의 음모를 알고 김흥경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흥경은 이를 공민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홍륜을 총애하고 있어 자칫하면 무고죄로 걸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공민왕 시해사건 후 오헌이 이를 최영 장군에게 보고해 대질하게 되었다. 이때 김흥경은 오헌에게, “너는 내가 선왕에게 천거하였는데 도리어 나를 해치려드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오헌은 “내가 홍륜 등의 역적모의를 그대에게 밀고한 것은 곧 그대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한 것이었소”라고 답했다. 이에 김흥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총애해준 왕의 목숨을 자신의 안녕 때문에 지켜내지 못한 그는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공민왕은 자제위란 친위기구를 중심으로 소극적이나마 개혁을 지속하려 했다. 그러나 친위기구는 왕의 총애를 받는 측근과 총신을 양산해 개혁의 인적 자원을 제한하는 속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농단하던 김흥경은 개혁 대신 권력의 단맛을, 과제 대신 정치적 생명만을 연장하려 했던 것이다.


권력자가 궁지에 몰렸을 때, 혹은 정상적인 정국 운영이 되지 않을 때 권력자는 간신배에게 빠질 수가 있다. 죽음과도 같은 쾌락에 탐닉하기도 한다. 조직이 죽음에 이를 때다. 그때 권력자의 주변에 서식하는 간신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쉽지 않은 문제지만 기본과 원칙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최용범/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