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역사,인물

대마도가 우리 영토라는 역사

풍월 사선암 2007. 9. 6. 04:53

[우리땅 우리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15>대마도의 역사적 진실...



《“통한다!”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 해안의 한국전망대에 오르면 부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해질녘이면 부산의 야경이 빛나고, 카메라 줌을 당기면 광안대교의 불빛까지 선명하게 찍힌다. 여기 저기 휴대폰을 꺼내들고 문자메시지를 받거나 통화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취재팀도 휴대폰을 켜보니 액정화면에 안테나 5개가 기운차게 뻗어 올랐다. “휴대폰이 터지는 곳은 우리의 영토입니다”라는 모 통신사의 광고카피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열차와 배로 6시간 거리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저녁 때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왔던 것을 기억한다. 이후 오랫동안 부산∼대마도 간 뱃길이 끊겼으나, 1999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면서 대한해협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올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취재팀도 서울에서 오전 6시에 KTX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오전 10시반에 여객선으로 갈아탄 뒤 정오쯤 대마도 최북단 히다카스 항에 닿을 수 있었다.

 

 

●한국의 자연과 역사가 숨쉬는 섬

대마도에는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이나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쓰라린 민족사의 현장도 도처에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譯官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틴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島主) 가문으로 출가한 덕혜옹주(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등.

 

 

●본디 경상도 계림에 속한 우리 땅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또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