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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오리 뒤뚱거리게 마련 레임덕은 당연

풍월 사선암 2007. 9. 5. 21:43

[기고] 오리 뒤뚱거리게 마련 레임덕은 당연

  

◀ 최진 고려대 연구교수/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

 

국가 지도자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회피 또는 공격성이라는 양 극단의 형태로 분출한다. 흔히 회피 현상은 복잡하고 골치 아픈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침묵이나 잠행으로, 공격성은 통제 불능의 감정상태를 표출해 내는 과격한 언행으로 나타난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40여 일간 잠행 끝에 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스트레스 분출 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겉으로는 분기탱천, 속으로는 불안ㆍ초조라고 할까.

9월 3일 방송의 날 축하연에서 "솔직히 말해 너무 괴롭다.

너무 힘들다"고 토로한 것은 심리상태의 현주소를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격성은 계속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요즘 각종 비리 의혹과 사건에 대해 옹호와 항변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청와대 정책실장의 신정아 씨 비호 의혹,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세무청탁 알선 의혹, 국정원장의 과잉 노출, 현직 환경부 장관의 대선 캠프행, 취재제한조치 등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잘못을 인정한 것이 없다. 청와대 참모들의 부적절한 처신은 `깜도 안 되는 의혹들`로 치부했고, 취재제한조치와 관련해 "언론사가 아무리 난리를 부려도 임기까지 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지난 8월 31일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행사장에서 행한 노 대통령 발언을 해석해보면 ` 언론=권력=가해자`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지금 불의의 권력에 맞서는 의로운 검투사의 심정인 것 같다.


노 대통령의 공격성은 `기필코 레임덕을 차단하겠다`는 레임덕 강박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트(Freud)에 의하면, 강박관념은 어떤 일이 자꾸 걱정되어 어쩔 줄 모르는 불안심리를 의미하는데, `어떤 일`이 바로 레임덕이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정치 지도자는 △모든 사람을 통제하려는 지배욕구 △사소한 실수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결벽증 △패배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의 징후들이 나타난다. 이를 작금의 상황에 대입하면 지배욕구=언론 지배욕, 결벽증=참여정부 결벽성, 두려움=대선패배 걱정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강박관념이 너무 강하면 자신의 언행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통제하지 못한다. 노 대통령의 과도한 레임덕 차단 의지는 2007년 초에 공개된 여권 핵심부 문건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문건에는 `대통령의 이니셔티브 확대’`대통령정치의 강화’`대통령정치로 중심이동`과 같은 표현들이 등장해 임기 말 대통령의 강한 국정 운영 의지가 읽힌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레임덕 강박감→편집증→이인증으로 인한 민심 이반현상이다. 즉 과잉 권력의지로 인한 강박감이 심화되면 유머감각 결여, 권력구조 집단에 대한 민감성, 중상모략을 받고 있다는 박해망상 징후를 나타내는 편집증(paranoia)으로 연결되고, 이는 다시 현실과 자기 자신 간 괴리로 인해 현실감각이 일시 마비되는 이인증(離人症)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인증에 빠지면 스스로 외톨이라고 생각하고 외부 대상을 모두 적대시하게 된다.


노 대통령이 임기 말 레임덕 현상을 최소화하려면 오히려 레임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유로움이 필요하다. 오리는 뒤뚱거리며 걷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순간까지 민심을 두려워했던 레이건의 리더십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재임 8년 동안 백악관 집무실에서 단 한 번도 상의를 벗지 않았고, 바쁜 와중에도 임기 말까지 매년 1000여 통, 총 9000여 통의 답장을 국민들에게 보냈다. 이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국민에게 위임받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항상 여유만만한 레이건이 유일하게 긴장할 때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받을 때였다고 한다. 지지율이 높아지면 금세 얼굴이 밝아지고, 반대로 떨어졌을 때는 어두워졌다. 요컨대 레이건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권력 누수가 아니라 민심이었다. 이제 노 대통령도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대선정국의 헤게모니 장악이나 언론 제압, 국정 주도가 아니라 `무서운 민심`을 보살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일경제] 2007.09.05 07:0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