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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 죽음을 이긴 사랑

풍월 사선암 2007. 7. 16. 15:53

아펜젤러 - 죽음을 이긴 사랑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서더튼에서 메노파 교도의 가정에서 1858년에 태어나 철저한 성서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78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아펜젤러는 성서를 번역하였으며(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감리교 인쇄 출판소를 확장하여 각종 선교잡지를 발행하기도 했고,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에 힘쓰는 한편 1895년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정동교회에서는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이상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 지회가 결성되었는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고 중요한 인물들이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을 순례하며 구호와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서울, 평야, 인천, 수원, 공주, 대구, 전주 등지로 여행하며 전도활동을 수행하였다. 한국에서의 아펜젤러의 사역은 그의 사역기간 5년동안 체중이 180파운드에서 131파운드로 줄어들었을 정도로 정열적인 것이었다.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 아펜젤러와 그의 조수겸 비서 조한규, 서울에 있던 장로교학생으로서 집으로 돌아가던 한 여학생 등과 함께 목포로 항해하는 오사카 선박회사의 쿠마가와 마루호에 승선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항해하던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나던 중 키소가와로 이름 붙여진 다른 선박과 일행이 타고 있던 배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비서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배는 아펜젤러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펜젤러의 장례식은 1902년 6월 29일 주일에 치뤄졌는데 장례식에서는 이 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 구원을 위한 애국 애족활동을 기리기 위해 애국가가 불려졌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아펜젤러의  장남은 배재학교 교장으로, 장녀는 이화학당 교장으로 봉직하다 한국 땅에 묻혔으며 막내 또한 이화학당의 교수로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1935년에는  아펜젤러 기념비가 정동교회에 세워졌고, 1989년에는 배재학교 총동창회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추모비가 세워 졌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아직 어둠에 잠겨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의 빛으로 밝히기 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사르던 선교사 아펜젤러는 결국 이 나라의 한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의 죽음은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오늘 이 땅에는 1200만이라는 열매가 맺혀졌다. 이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로부터 얻은 빚을 갚을 때이다. 그 빚을 갚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룬 아펜젤러,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편에 앉히시고 그의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우셨을 것이 분명하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하)


'조 대가리론' 으로 유명한 선교사이신 아펜젤러 총장(여사)은 "게으른 농부 밭의 조 대가리는 바람이 불어도 꼿꼿하고, 부지런한 농부 밭의 조 대가리는 바람이 불면 끄덕끄덕한다. 여러분! 우리 모두 부지런한 농부 밭의 조 대가리가 되자."


개화기의 한국 젊은 청년에게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자는 '조 대가리론'은 참으로 의미신장하다. 누구나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남에게 지탄을 받지 않는다. 부지런 농부의 밭 조 대가리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숙이고, 바람이 불면 끄덕끄덕 하는 것은 성실한 사람은 겸손하고 겸허하여 언제나 말없이 자기 일을 철저히 함으로 남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 없고 입에 오르내리지 않으며, 언제나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맞아! 그래! 하면서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리는 심이(心耳)를 가지고 있어 자연의 소리, 소리 없는 소리를 듣게 된다. 국민의 소리가 전○노, 전○조, 무수히 많은 한쪽으로 치우친 NGO 등에 대해 지탄의 소리를 한다. 지탄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남보다 부지런히 일하고, 법과 질서를 지키고, 예의와 범절을 지키면 절대로 지탄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 모두 청무성(聽無聲)을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