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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07] 대선후보의 가족|정동영

풍월 사선암 2007. 1. 2. 19:03

   [선택 2007] 대선후보의 가족|정동영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은 지난 5·31 지방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7월 15일 독일로 떠났다. 통일과 경제 공부를 하고 돌아오겠다며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단기 연수를 간 것이다. 방문 연구원으로 간다고 했지만 사실 현역 의원도 아닌 그가 머물 공간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다.


인천공항에는 두 아들 욱진(23)씨와 현중(20)씨가 부모님을 배웅하러 나왔다. 아버지는 장남을 유독 힘껏 끌어안았다. 미국 스탠퍼드대학(화공학과) 3학년생인 욱진씨는 군 입대를 한 달여 남겨두고 있었다.

욱진씨는 “기분이 어떠냐”는 지인들 물음에 “아버지가(독일에 가시면) 오히려 더 편하실 것”이라며 답했다.


정 전 의장의 부인인 민혜경(50)씨는 “여보, 우리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신 것으로 생각합시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보내다 와요”라고 했다.


독일에 체류하던 두 달 반 동안 두 사람은 늘 함께였다. 민씨는 중소기업, 학교, 공장 등 남편의 방문길을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그는 “모처럼 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정 전 의장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고비에 있거나 결단을 내려야할 때 산이나 강이 있는 지방으로 떠났고, 그럴 때면 아내와 동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랬던 그도 부인에게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민씨는 “원래 남편이 잘나갈 땐 부인이 필요 없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 힘들 때, 아무도 없을 때 부인을 찾게 되는 거지요”라고 했다.


정 전 의장은 참모나 지인들과 ‘효자동 이발사’ ‘태극기를 휘날리며’ 같은 영화를 관람하는 자리에 꼭 부인을 동반한다. 하지만 민씨는 원래 혼자 나서거나 앞장서는 쪽과는 거리가 멀다. 보이지 않게 뒤에서 뒷바라지하는 전통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이다. 열린우리당 의원 부인들의 모임인 ‘우리 가족’에서 참석하라는 연락이 오지만 어쩐지 쑥쓰러워 못간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민씨는 십수년째 해온 종교단체 봉사활동 같은 자리에만 나갈 뿐이다. 남편의 지인이나 당직자들을 만나도, 손을 한참 동안 잡은 채 겨우 몇 마디 던지는 스타일이다.


그런 그도 지난 2월 당 의장을 뽑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선거 운동하는 게 어색하다”면서 “다들 너무 열심이라 저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도 했다. 요즘 그는 다시 바빠졌다. 하루에도 대여섯 군데 되는 경조사나 행사 자리에 남편을 대신해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의 연애 스토리는 유명하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음대생이던 민씨가 살던 서울 청파동 기숙사에 한 복학생이 찾아왔다. 그는 개나리 한 묶음을 들고 가서 “민혜경 나오라”며 고성을 질렀다. 그 뒤로 정 전 의장에겐 ‘개나리 아저씨’란 별명이 붙었다. 그는 민씨의 대학 졸업식장에 꽃다발을 들고 갔지만 또 퇴짜를 맞았다. 2년 뒤 전주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던 민씨를 찾아갔지만 민씨의 부모님이 그를 사윗감으로 탐탁지 않아했다. 민씨의 부친은 전주교대 교수로 있다가 전북사대부고 교장을 지낸 교육자였다.


정 전 의장은 방송국에 사정을 설명하고 사표를 썼다. 그리고는 설악산으로 민씨를 ‘납치’한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민씨는 “숨막힐 정도로 집요했었다”고 당시를 기억한다.


사랑은 뜨거웠지만 신혼생활을 녹록지 않았다. 서울 사근동 셋방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한 뒤 등촌동, 불광동, 도곡동, 하안동, 일산 등으로 이사를 다녔다.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하기 어려울 때 민씨는 집에다 피아노 학원을 차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2004년 총선 직후 대선주자 지지율 1위이던 남편의 지지율이 현재 바닥을 치고 있는데, 아내 마음은 어떨까.


그는 “제가 원래 소심한데 어려운 때일수록 담대해져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정 전 의장과 민씨의 세례명은 각각 다윗과 엘리자베스다. 정 전 의장은 지난 2005년 5월, 자신을 아들이자 남편으로 여기고 살았던 홀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장례식을 마치고 이틀이 지난 뒤, 그는 어머니에게 바치는 눈물의 사모곡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83세로 작고한 그의 모친 이형옥씨는 48세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집안의 가장이 돼 36년간 4형제를 키웠다.


아들이 유신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유치장에 수감됐을 때 이씨는 상경했다. 방 한 칸에 아동복 바지를 만들어 평화시장에 납품하는 가내 봉제업을 시작했다. 아들이 원단과 실을 사오면, 어머니가 꿰매고 다듬으며 마무리 작업을 했다. 모자는 이때를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붓글씨 공부에 재미를 붙여가던 이씨는 갑자기 쓰러진 뒤 일어나지 못했다. 당시 정 전 의장은 “아직 어머니와 이별할 마음의 준비를 못 했는데…”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요즘 정 전 의장은 둘째 아들 현중씨(연세대 경영학과 2년)와 대학 입시와 교육 문제에 대해 새벽까지 토론을 벌이곤 한다. 하지만 이아들도 1월이면 현역으로 군에 입대한다. 두 아들을 군대로 보낸 부부는 곧 이사를 한다. 현재 살고 있는 서초동 전셋집에서 홍은동에 있는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가기로 했다. 정 전 의장네는 서울 도곡동의 사원 주택 한 채를 소유하고 있다.


민씨는 오늘도 매일 아침 건강식으로 청국장을 내놓고, 남편의 성대 보호를 위해 살구씨 기름을 준비한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 coby0729@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