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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

풍월 사선암 2006. 9. 6. 08:11


 

여인천하

 

1.황진이

황진이(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조선시대의 명기(名妓).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 (妓名)은 명월(明月). 개성출신.


확실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나, 중종 때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 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으며, 간접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기생이 된 동기에 대하여도 15세경 이웃 총각이 혼자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당시(唐詩)를 정공(精工)하였다고 한다.


그러한만큼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박연폭포(朴淵瀑布)·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지은 한시에는 〈박연 朴淵〉·〈영반월 詠半月〉·〈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여소양곡 與蘇陽谷〉 등이 전하고 있으며, 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


이 중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이없어〉·〈산은 옛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의 5수는 진본(珍本)《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관련설화 - 지족선사, 서경덕, 벽계수


◎.지족선사

지족 선사는 송도 근교 깊은 산 속 암자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도해온 스님이었다. 송도 사람들은 그를 생불이라고 존경하였다. 그래서 진이는 지족 선사를 택했다. 하얗게 소복한 채 지족선사를 찾아갔다. "뜻하는 바가 있어 불제자가 될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청상과부인데 지족선사 스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슬픈 표정으로 애원하였다. 깊은 산 속 속세와 절연하고 살아온 스님은 난데없는 미녀의 출연에 당황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자신의 수양부족을 탓하며 '나무아미 타불 관세음 보살'을 되뇌이며 열심히 불도만을 닦았다. 풍경소리도 그치고 밤은 깊어갔다. 이젠 할 말이 없었다. 진이의 몸가짐만이 등불 아래서 고요히 흔들릴 뿐이였다. 지족 선사는 자신과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착 달라붙은 비에 젖은 홍시같은 살결을 훔쳐보며 선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요염한 교태 앞에 그만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30년 면벽도 하루아침에 공염불이 된 것이였다. 열반의 세계에 귀의하려던 지족선사는 오욕이 끊는 육체의 야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목적을 달성한 진이는 암자를 빠져나왔다. 지족선사는 법복도 염주도 버리고 황진이를 찾아 헤매었다. 송도 거리의 반광인, 반걸인이 되고 만 것이였다. 그의 생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식소록,조야휘언(識小錄,朝野彙言)에서 황진이가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망치게 한 것도 나 때문이었다"라고 후회하고 있다. 인간의 약점을 찌른 애닯은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서경덕

서경덕은 당시 도학군자로서 학덕과 인격이 널리 알려진 위인이었는데 황진이의 농락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느날 화단정사에 놀러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황진이가 별안간 복통을 일으켜 신음하기 시작했다. 서경덕은 한 채밖에 없는 이불을 펴주었다. 자기는 늦도록 책을 읽었다. 꾀병을 앓으면서도 연방 서경덕의 통태를 살폈으나 일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서경덕은 웃목에 조그마한 포대기를 �전히 개켜놓고 단정히 책상 앞에앉아 있었다. 어제의 자세 그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황진이는 자기의 부질없는 연극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선생님 송도에는 삼절이 있다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서경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첫째는 박연폭포요,둘째는 선생님이시고 셋째는 진이입니다."

"이 비록 아름다운 선학(善謔)이나 또한 진지이니라." 서경덕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서화담은 성종 20년(1489)에 나서 명종 1년(1546)까지 산 당대의 석학이였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에만 전념하였다. 황진이도 서화담에게 글을 배우러 오는 문하생이었다. 진랑이 오는 날이 뜸해졌다. 밤은 깊고 주위는 적막한데 우수수 낙엽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는가싶어 영창을 열고 기울여보았으나 주위는 더욱 적막하기만 하였다.


다시금 영창을 닫았다. 불을 껐다. 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정신은 자꾸만 맑아졌다. 기다려도 진이는 오지 않았다. 서화담은 초연히 앉아 어둠 속에서 이렇게 노래를 읊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귄가 하노라


진랑인들 스승의 인자한 모습, 부드러운 음성을 보고 듣고 싶지 않았겠는가? 진이는 문 밖에 와있었다. 자신의 사무치는 마음을 화담 스승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이었다.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 속 깊이 깔려있던 그 동안의 오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참을 추스렸다.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님을 속여 월침 삼경에도

올 뜻이 전혀 없는가


하고 탄식하고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도 절절할 수 있을까?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였다. 님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님은 올 생각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님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서경덕의 황진이에 대한 연정과 황진이의 서경덕에 대한 연정은 마음 속에다 깊이 간직해두었던 것이였다. 잎지는 소리는 서경덕에게는 환청으로 들려왔고,진이에게는 낸들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였다. 자연의 이치를 서로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화담의 죽음을 진이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명월은 자기 자신을 청산에 비기고


서경덕을 녹수에 비겼다. 녹수는 없고 청산만 남은 것이였다. 물 없는 청산이다. 이 무슨 허무한 인생이란 말인가. 이렇게 인생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꼭이 서화담의 죽음을 한탄하여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청춘 시절에 흠모했던 인물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생무상을 노래한 것이리라.


◎.벽계수

종실 벽계수라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부른 황진이의 시조 한 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종실 벽계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한번 진랑이를 보면 빠져버리나 나는 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아버리겠다.' 이렇게 호언장담하고 벽계수는 송도로 내려왔다.


왕가의 귀족답게 벽계수는 의젓하고 냉정했다. 찬바람이 휙 돌고 매정스러우리만큼 까다로왔다. 그는 가을밤 송도를 구경하기 위하여 나귀를 만월대로 몰았다. 진이의 낭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노래 소리에 뒤를 돌아보다 그만 나귀 등에서 떨어졌다. 진랑이 웃으며 이는 명사가 아니고 한낮 풍류랑이라 하고는 즉시 돌아가 버렸다. 벽계수의 양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못난 벽계수야, 인생은 한번 가면 그만인데 천하의 명기 명월이가 무르녹아 있으니 어찌하여 나와 즐길 줄 모르고 가려고 하느냐. 함께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양반 계급에 대한 지독한 풍자와 야유가 담겨있다. 양반 계급을 우습게 본 것이다. 여기서 남자를 흐르는 물에 비유하고 공산에 뜬 명월을 자기로 비유한 것이 재미있다.


남존 여비의 시대에 더구나 양반 계급이 극심한 때에 기생인 자기를 명월로 비기고 종친의 한 사람을 산골물로 비유했다는 것은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인으로서의 자존심,미인으로서의 자존심일 것이다. 사회적 신분으로 자존심이 상했을 때 느끼는 여자의 분노가 이 시에서 저절로 배어나온 것이다.


 

2.장희빈

조선 숙종의 빈(嬪). 어머니의 정부(情夫)였던 조사석(趙師錫)과 종친인 동평군 항(東平君杭)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고, 1688년 소의(昭儀)로 승진되어 왕자 윤(: 뒤의 景宗)을 낳게 되자 왕은 기뻐하여 세자로 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론·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 정월에 세자를 봉하고, 장소의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하자, 왕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진노하므로,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중로 정읍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하지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 정권의 교체를 기사환국 또는 기사사화라고 한다.


이해 5월에 다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올려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 80여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폐비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민암(閔)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睦來善)·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관련설화

희빈장씨(禧嬪張氏)는 ? - 1701년(숙종(肅宗)27년), 조선(朝鮮) 숙종(肅宗)의 빈(嬪) 본관은 인동(仁東). 역관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어머니는 정부(情夫)였던 조사석(趙師錫)과 종친인 동평군 항(東平君 杭)의 주선으로 궁녀(宮女)로 들어가 숙종(肅宗)의 총애를 독차지 하였다.


1686년(숙종(肅宗) 12년) 숙원(淑媛)이 되고,1688년 소의(昭儀)로 승진되어 왕자(王子) 윤(뒤의 경종(景宗))을 낳게 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권(政權)을 잡고 있던 서인(西人)들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南人)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西人)의 노론(老論), 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王妃) 민씨(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肅宗)은 듣지않고 1689년 정월에 세자(世子)를 봉하고, 장소의(張昭儀)는 희빈(禧嬪)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송시열(宋時烈)은 세자(世子)로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上疏)하자, 왕(王)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진조하므로, 남인(南人) 이현기(李玄紀) 남치훈(南致薰), 윤빈(尹彬) 등이 송시열(宋時烈)의 상고를 논박하여 파직시켜 제주도(濟州道)로 유배하고 다시 사사(賜死)하게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宋時烈)은 중도 정읍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밖에 서인(西人)들의 영수(領首)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하지 못하였고, 반면의 남인(南人)의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 정권(政權)의 교체를 기사환국 또는 기사사화라고 한다.


이때 5월 다시 민비(閔妃)를 폐하고 장희빈(張禧嬪)을 올려 왕비(王妃)로 삼으려 할때 서인(西人)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등 80여명이 상소(上梳)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政國)은 남인(南人)의 세상이 되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肅宗)은 폐비사건(廢妃事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 서인(西人)의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廢妃)의 복위운동(復位運동)을 꾀하다가 고발당한다.


이때에 남인(南人)의 영수(領首)요 당시 우의정(右議政)으로 있던 민암(閔암)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西人)을 완전히 제가하려고 김춘택(金春澤) 등 수십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肅宗)의 폐비(廢妃)에 대한 반성으로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閔암)을 파직하고 사사(賜死)하였으며, 권대운(權大運), 목내선(木來善), 김덕원(金德遠) 등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 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張氏)를 희빈(禧嬪)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은 복작(復爵)되고 남인(南人)은 정계(政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南人)이 물러나게 될때 장희빈(張禧嬪)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민씨(閔氏)에 관련된 문구가 논란이 되어 여러사람들이 장희재(張希載)가 희빈(禧嬪)에게 보낸 서장(書狀)속에 폐비 민씨(閔氏)에 관련된 문구가 논란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張希載)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세자(世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南九萬), 윤지완(尹趾完) 등이 용서하게 되었다.


그런데 뒤에 왕비(王妃) 민씨(閔氏)가 죽은 다음에 장희빈(張禧嬪)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서 신당(神堂)을 설치하여 왕비(王妃) 민씨(閔氏)를 해하려던 사실이 발각되어 장희재(張希載)는 살해되고 궁인(宮人), 무녀(巫女)와 그 족당(族黨)도 화를 입게 되었다.


이것을 무고(巫蠱)의 옥(獄)이라 하는데, 이때에 장희빈(張禧嬪)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취한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유상운(柳尙運)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老論)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肅宗)은 이후 빈(嬪)을 후비(后妃)로 승격하는 일을 없애는 법(法)을 만들었다.


 

3.정난정

조선 11대 중종때 여인으로 첩의 딸로 태어나 자신의 운명에 맞서 처절하게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첩의 딸로 태어난 설움으로 권세를 얻길 원해서 기생이 되었다.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만나 자신의 야망을 불태웠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싸웠으나, 결국엔 야망의 노예가 되어 종말로 치닫는 정난정...


난정의 인생 과정을 통해 天道가 냉혹하게 실현되는 것을 보여줬다. 정난정이라는 한 여인의 비극적 삶을 통해 '사람답게 산다는 것(人之道)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고 조선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삶을 살다갔다. 정난정은 자신의 야망 실현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음모 와 모략으로 정적을 제거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고 정실부인까지 죽여버렸다. 그녀는 시대와 상황이 만들어낸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요녀였다.


정난정은 역사의 실존 인물이였고 동시에 그녀의 삶은 실제 역사적 사건 및 실존 인물들과 긴밀하게 얽혀있다. 혼란했던 시대의 역사적 사건 중심의 정사와 질곡의 시대를 산 한 여인 의 사랑과 삶이였다.


●.관련설화

정난정은 庶女 출생의 비밀을 모른채 관비의 딸로 자라나 천대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뎌내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난정은 차차 자라면서 서자의 몸으로 태어난 한(悍)과 분노로 권세를 휘두리길 원했다. 그리하여 난정은 기생이 됐었고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통해 그 꿈을 이루길 바랬다.


난정을 사모해 온 길상이란 남정은 난정과 사랑의 결실을 맺으려는 순간 난정의 이복형제들에 의해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더더욱 수단과 방법을 가르지 않고 서러운 한(悍)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윤원형의 권력을 필요로 했다. 중종의 계비로 들어가게 된 문정왕후는 윤씨의 누이였다. 이 당시 조광조와 사림세력들이 친위 쿠테타로 축출당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갖바치를 매개로 도학정치의 원대한 이상을 품었던 조광조와 사림세력들이 훈구세력의 친위 쿠테타에 의해 스러져가는 과정에서 행복에 부푼 난정이 잔혹하게 짓밟혔다. 난세로 치닫는 시대와 그 속에서 파란만장 하게 살았던 여인 난정이였다.


여인의 야망으로 기생 노릇을 하던 난정이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결국 윤원형의 소실로 들어갔다. 후에 정경부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문정왕후의 장자방 역할을 하면서 얽히고 �힌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결국은 훗날 자살하였다. 난정은 조선의 양반 중심적인 사회적 배경으로 인한 한(悍)많은 여인이였다.



4.장녹수

연산군의 총희(寵姬). 본래 제안대군(齊安大君)의 가비(家婢)로 대군(大君)의 가노(家奴)에게 출가하여 자식 하나를 두었고, 뒤에는 가무(歌舞)를 익혀 이름을 떨쳤다.


나이 30이 되었어도 용모가 뛰어나 연산군에 발탁되어 총애를 받았고, 내명부(內命婦) 종4품 관작인 숙원(淑媛)에 피봉, 무수한 금·은·주옥·노비·전택(田宅) 등을 하사받았다. 연산군이 비록 격노하였더라도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을 띨 정도였다. 왕을 어린애 다루듯 하였고 모든 상형(賞刑)이 그녀의 입에서 행하여졌다.


1503년(연산군 9) 종3품인 숙용(淑容)에 봉하여지고 이듬해에는 그녀의 집 주변 민가를 모두 철거,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새로이 단장시켰다.


1506년 오빠 복수(福壽)와 자녀들을 모두 양인신분으로 올리고, 관선(官船)을 이용하여 평안도 미곡 7, 000석을 무역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참형(斬刑)에 처하여지고 적몰가산(籍沒家産)되었다.


●.관련설화

장녹수는 전비,김귀비 등과 함께 연산군이 사랑을 기울여 온 여인이었다. 이 가운데에서 연산군은 장녹수를 가장 총애하였는데 폭군 연산의 파멸은 장녹수로 인하여 더욱 빨리 밀어닥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녹수는 요부이자 요화였다. 그녀는 애초에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 대군의 시녀였다.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은 출세욕이 강한 자여서 자기 체제를 제물로 바칠 궁리를 하였다. 그 당시 왕비와 궁인 곽씨, 그리고 윤훤의 딸을 맞아들여 정을 쏟고 있었다. 김효손은 녹수를 그이 계획대로 연산군에게 바쳤다. 녹수와 하룻밤을 지낸 연산군은 완전히 녹수의 포로가 되었다. 본디 녹수는 목소리가 고와 그녀와 한번 얘기를 나눈 사람이면 저절로 정이 기울여지는 마력을 가진 여인이였다. 연산군의 깊은 총애로 장녹수는 차츰 우월감에 빠져 교만해져갔고, 안하무인이 되어갔다. 연산군은 녹수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궁중놀이와 연회에 필요한 시설을 지었는데 그때 부터 연산군의 몰락의 시작인 셈이었다. 그리하자 백성의 원성은 자연히 놓아져만 갔다.


정사는 돌보지도 않고 항상 여자를 끼고 풍류에만 젖어살았다. 전국에서 보아 올린 미희들과 음탕한 생활을 즐기며 연산군은 점점 포악해져 갔다. 연산군때부터 '흥청'이란 말이 생겨나서 '흥청망청'이란 말로 바뀌게 되었다. 장녹수의 치마폭에서 연산군의 방탕은 시들 줄 몰랐고, 국정은 나날이 부패해갔다. 급기야 연산군은 휘숙옹주까지 범하는데, 그녀는 임승재의 부인이자 성종의 서녀였으며 서매이긴 해도 누이뻘이였다. 배다른 누이동생을 범한 연산군은 한 술 더 떠서 백부 월산 대군의 부인, 그러니깐 제 큰 어머니 박씨부인까지 간음해버렸다.

큰 어머니 박씨부인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연산군이 다녀간 뒤로 임신을 했고, 분함과 부끄러움으로 몸져 누워있던 박씨부인은 동생 박원종을 불러 눈물로 하소연하였다. 박원종은 분노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박씨부인은 결국 목을 매어 자살을 하자 박원종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연사군의 제거에 뜻을 같이한 이조참판 성희안과 박원종은1506년 연사군 12년 9월 1일 쿠데타에 의해서 왕의 자리에 물러났다. 그뒤 진성대군을 새임금으로 옹립하였다. 왕위를 빼앗긴 연산군 옆에서 장녹수와 몇명의 여인들만이 슬퍼하였다. 박원종은 떨고 있는 장녹수 앞에 다가가 칼을 뽑아 장녹수를 쳐버렸다. 장녹수는 결국 박원종의 칼에 죽고 말았다.


 

5.명성황후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철종 2)∼1895(고종 32). 고종의 비. 흔히 민비(閔妃)로도 불린다. 본관은 여흥(驪興).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이다.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하여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헌종·철종) 60여 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적은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 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으며, 수완이 능란한 그녀는 수년 후부터 곧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흥선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각기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명성황후와 대원군 사이가 갈라진 것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 공작 때문이라 하나,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의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南人)과 일부 북인(北人)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했다.


명성황후는 갖은 방법으로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공작하여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政敵:趙成夏를 중심으로 한 趙大妃 세력, 趙斗淳·李裕元 등 노대신 세력, 金炳國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 대원군의 장자 載冕과 형 李最應 세력 및 崔益鉉 등 유림세력)과 결탁하고,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하야하게끔 하여 양주(楊州) 곧은골[直谷]에 은퇴시켰다.


대원군의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승인했다.


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俸糧米)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군인(舊軍人)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자, 명성황후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忠州牧)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왕과 연락하는 한편,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여 청국군을 출동하게 하고 일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게 하였으며, 다시 민씨세력이 집권하도록 암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開化派)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 잠시 개화당 정부에 정권을 빼앗겼으나 곧 청국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왕궁에서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Mo"llendorf, P. G.)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면서 유연성 있는 접촉을 유지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침략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거세하려고 공작하였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미는 개화세력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한반도에 진주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정계에 적극 압력을 가하게 되자, 사세가 불리해진 명성황후는 친러정책을 내세워 노골적으로 일본 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침략정책에 정면 대결하는 명성황후와 그 척족 및 친러 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명성황후는 나이 45세로 일본인의 손에 살해되고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이때의 정부는 친일정책을 펴 폐비조칙(廢妃詔勅)을 내렸다.


10월 10일 복위되어 태원전(泰元殿)에 빈전을 설치하고 숭릉(崇陵) 우강에 능호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장을 준비하였다.


그후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되고 난 뒤 11월 양주 천장산(天藏山) 아래 국장되어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 미금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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