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풍월 사선암 2006. 8. 16. 18:14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전혜린과 뮌헨 -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분단된 현실, 분열된 자아 그리고 낯섦으로의 도피한국전 직후의 모순이 뮌헨에 대한 애착 낳아..... 시인도 아니었다. 소설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론가도 아니었다. 굳이 딱지를 붙이자면 번역문학가라고나 할까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그 이름을 뒷받침하는 번역서 목록의 일부다. 번역이 아닌 그 자신의 글이라고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하인리히의 뵐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산문집<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라는 제목으로 묶인 일기가 전부인 여자

 

32세에 요절한 천재

 

근엄한 문학사에서는 그 여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자의 글들은 이른바 문학적 가치나 문학사적 의미와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차라리 사회사적·정신자적 범주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 여자를 형성시킨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상처와 폐허였으며, 그 여자가 형성에 기여한 것은 60년대 한국의 미숙한 실존주의적 분위기였다그리고 그 사이에 50년대 후반 년간의 독일 체험이 놓인다.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조건에 절망하고 삶의 구체적 세목이 보이는평범과 비속을 혐오했던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여자

 

한국이라는 박토에 뿌리내리기보다는 뮌헨의 자유를 호흡하고자 했으며, 여자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보편적 성을 지향했던 여자, 인간이라는 육체적 현존이 아닌 정신과 관념만의 그 어떤 추상적 존재를 열망했던,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마침내는 좌초했던 여자. 그 여자의 이름 전혜린.

 

전혜린(1934∼65)이 단신으로 독일의 뮌헨에 내린 것은 1955년 가을이었다그가 태어난 황해도 해주와 그가 학교를 다닌 서울은 각각 북조선과 한국으로 갈라져 한바탕 피의 제의를 치른 뒤 끝이었다분단 한국의 딸 혜린은 또 다른 분단국 서독의 남부 도시 뮌헨을 찾았고 대학 근처의 동네 슈바빙에 짐을 풀었다.

 

슈바빙은(…) 발전해가는 기계문명 속에 아직도 한 군데 남아 있는 낭만과 자유의 여지가 있는 지대(…).그 속에 한번 들어가서 그것을 숨 쉬고 그것에 익고 나면 다른 풍토는 권태롭고 위선적이고 딱딱하고 숨 막혀서 도저히 못 참게 되는 것인 것 같다.(…)슈바빙은 한마디로 청춘의 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희생도 적지 않게 바쳐지는, 그러나 젊은 목숨이 황금빛 술처럼 잔에 넘쳐흐르고 있는 꿈의 마을이것이 슈바빙이 아닐까.

 

한국 실존주의 형성기여

 

전혜린에게 있어 년간의 슈바빙 시절은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본질적 삶의 세례를 받은 시기였으며, 그는 귀국해서 죽기 전까지 복음의 전파에 주력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의욕을 꺾는가?”를 절감한 그가 언제나 그리워한 그의 도시는 뮌헨이요 슈바빙이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한국에 대한 혐오와 뮌헨을 향한 향수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뿌리 뽑힌 사대주의적 지식인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의 전도된 향수에는 그 나름의 내력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조건에 대해 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전혜린은 그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삶의 일회성이라는 치명적인 화두를 붙잡고 싸움을 벌였다. “죽음을 씨로서 속에 지닌 과실로 의 삶이라고 그가 말했을 때 그것은 전혀 새로운 발견이나 독창적인 수사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도 소박하고 치기만만해 실없는 웃음마저 깨물게 만드는 성질의 발언이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이 60년대 한국 사회와, 그 뒤 90년대에 이르도록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복음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절한 천재의 신화가 그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등생으로 성장해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가 독일 유학을 떠났으며, 오식된 활자, 즉자·대자, 불합리, 자살 다위 실존주의 용어들을 상용했고, 검정 스커트에 검정 머플러를 즐겨 두르고 다니던 사람. 도저한 페시미스트이자 동시에 순간순간을 미칠 듯이 강렬하게 살고자 했던 행의 찬미자. 평범을 경멸한 귀족주의자인가 하면 무수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삶의 패배자.

 

여자라는 옷을 거추장스러워했으면서도 출산과 육아의 경험에서 행복을 느낀 모순의 존재.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광휘처럼 감싸고 있는 것은 서른 둘 젊은 나이에 맞은 성급한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전혜린에게 역사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의 차원으로 떨어졌거나 인간 보편의 차원으로 뛰어올랐다. 그 가운데에 놓인 당대의 민족적 현실이라는 차원은 생략돼 있다

 

*홀로 걸어온 길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아스팔트 킨트(아스팔트만 보고 자란 도회의 고향 없는 아이들)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쓰일 수 있는 명칭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이북의 끝인 신의주(新義州)에서 보낸 이 년간은 내 어린 나이와 함께 잊혀 지지 않는 그리움이기 때문에 고향이라는 글자를 볼 때면, 언제나 내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이 신의주다. 국민학교 일학년을 수료했을 때 나는 서울을 떠나서 그곳으로 갔다.

 

신의주는 소위 신흥 도시로서 일본인들이 계획적으로 만든 합리적이고 관념적인 - 지금 생각하면 숨 갑갑한 도시였는지도 모른다. 도로가 꼭 자를 대고 그린 듯 정확하고 구획이 정연했으며 집의 크기도 똑같았고 재료는 모두 붉은 벽돌이 사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한 것은 그 깨끗하고 체계적인 주택가가 아니었고 중국인 촌과 압록강(鴨綠江)이었다.

 

중국인 촌은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갈대밭이 무성해서 물이 흐르는 것도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폭이 좁은 강이 흐르는 곳에 있었다. 강가의 갈대를 헤치면서 따라 올라가면 중국인들의 오막들이 죽 즐비하게 서있었고 신비스러운 억양의 중국어가 대소음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 갔다 오면 늘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하늘 높이 솟은 포플라 나무 밑에 앉아서 사탕수수를 씹으면서 공상에 잠겼었다. 지식을 높이 평가하는 이상주의자인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귀여워해 주셨다. 아버지는 장녀인 나를 학교에도 종종 데리고 갔고, 이발소에도 꼭 아버지가 데리고 가서 머리를 깎는 것을 지켜보셨다.

 

백러시아계의 양복점에서 꼭 소공녀(小公女 )가 입을 것 같은 흰 레이스 원피스를 사 준 것도 아버지였다. , 사세 때부터 한글 책과 일본어 책을 전부 읽게 손수 가르쳐 주신 아버지는 내가 공부 외의 딴 일을 하는 것을 허락 안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실 때는 나에게 심부름 한번 못 시켰다. 손에 물 하나 안 튀기고 내 방에서 공부만 하는 것 아버지가 한없이 아낌없이 사다 주는 책을 읽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이 유년기의 습관은 중대학생 시절을 통해 죽 견지되었다. 내 한 마디는 아버지에게는 지상명령이었다.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 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 그리고 나를 무제한하게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었다.

 

나는 응석받이 어린애(spoiled child)였다. 나에 대한 편견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주 말다툼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물질, 인간, 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 관념, 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그리고 내부에서의 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그러니까 거의 영아기(兒期)부터 내 속에 싹트고 지금까지 나에게 붙어 있는 병인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나를 데리고 부둣가에 가셨다. 내 눈에는 바다보다도 더 넓게 보였던 압록강이 녹색으로 흐르는 것을 바로 눈앞에 볼 수 있는 곳엔 백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다방이 많았다. 벽돌 페치카가 놓인 다방에서는 축음기를 틀고 금발이 허리까지 오는 러시아 처녀가 음악에 따라서 노래하고 있었다. 스텐카라진 같은 러시아 민요였던 것 같다. 거기에서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어떤 날 나는 부둣가에서 뗏목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본 일도 있었다. 집채보다 더 큰 뗏목에는 수명의 남자들이 타고 있었고, 모두 검붉게 탄 건장한 체구들이었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뗏목이 안 보이게 될 때까지 부둣가의 콘크리이트 바닥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지 전신이 뒤흔들리는 듯한 감동이 내 어린 마음을 찔렀다.

 

먼 데에 대한 그리움(Fernweh), 어디론지 멀리 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싹튼 것 같다. 그때부터 내 눈은 실향병(失鄕病: die heimatlosen)의 눈, 슬픈 눈으로 된 것 같다. 어쩌면 내 천성에 유랑 민족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섞여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이국적(異國的)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로 인해 눈뜨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살고 싶었다. 내 일생을 인식(認識)에 바치고 싶었다. 자유롭게...대학생이 된 후에도 나는 그럴 결심을 되풀이했었다. 그러나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우리가 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기치 않았던, 때로는 소망하지 않는 방향과 형식 속에 생을 형성해 놓는다. 논리의 수미(首尾: konsequentes Leben)가 일관된 생을 우리는 희구한다. 그러나 생의 테제와 안티 테제는 논리에서처럼 당연한 일의적 단계를 밟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생은 너무나 혼돈적이고 어두운 밤의 측면과 꿈과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우연이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glasklar),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향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 속에 담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이 일체가 되고 그와 객체 관계가 지양되는 투명한 순간은 우리에게 그렇게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분열된 의식과 전 우주에 대한 고독감에 앓고 있다. 인식과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와 합하려는 노력만이 우리를 고독에서 구출한다.

 

그러나 우주선이 달세계로 가는 시대에 사는 인간은 영혼의 소박함을 잃은 지 오래 된다. 사랑도 변형된 호기심인 경우가 많고 사랑의 행위에서도 지적인 너무나 지적인 것이 현대인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원칙과 독백 속에 감금되어 있다. 자아에 망집(妄執)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공관 속을 꿰뚫는 것은 현대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기적 같은 희귀한 몇 개의 순간에서만 우리는 변신(變身)을 한다. 헌신과 희생이 가능해진다.

 

그 순간이 지나면 생은 다시금 어두운 것, 무표정한 것이 된다. 그 속에서 아무 관련도 없이 제각기 인간은 산다. 고독한 탐구를 계속한다. 죽음을 과학적으로 탐구한다. 몽상한다. 생은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회한(悔恨), 모든 후회는 결국 존재의 후회(Seinsreue)로 귀결한다.

 

태어났음의 비극은 피조물성 속에 있는 균열, 즉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된 일정 기간의 생명이 신비한 힘에 의해서 우리의 의식없이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불가지성(不可知性) 속에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짧은,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지루하게 긴 우리의 생에서 그래도 진주빛 광채를 지닌 기간이 있다면 그것은 유년기이리라. 유년기 - 그것은 누구에게나 실락원(失樂園)이다.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라고 어떤 시인은 말했다. 어린 시절은 의외의 놀라움, 신비와 호기심, 감동에 넘친 지루하지 않은 한 페이지다. 그리고 우리는 몇 살이 되어도 그 장을 펼쳐보고 싶어진다. 영원한 그리움 - 그것은 고향에 대한 것이다. 원류(源流)에 대한 동경... 영원의 고향에 대한 거리감에 앓는 것, 그리고 그곳으로 귀향하려는 노력을 플라톤은 향수(鄕愁)라 했다.

 

어릴 때 우리는 모두 초시간적(超時間的)이고 불사신이었다. 존재의 상처를 모르는 이상주의자였다. 성장한 뒤에도 어린 마음을 상실치 않는 이상주의자, 즉 영원한 유아는 현실과 부딪칠 때 늘 생사를 건 모험을 하게 된다. 키에르케고오르는 말했다. '어린애로서 즉 이데알리스트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일 뿐더러 종종 카타스트로프(破局)를 가져온다.'

 

생에 좌초한 '어린애들' 위에 디디고 서서 개가를 올리는 것은 어느 세대에나 영원한 속물들, 인간을 목적으로 알지 않고 수단으로 아는 바리새인들, 현명한 준법자들, 투철한 리얼리스트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이데아가 없다. 따라서 유년기가 없다.

 

(1964, 서울法大學報 Fides)

 

- 전혜린, 수필 '홀로 걸어온 길'(<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全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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