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역사,인물

광개토대왕 정복영역은 과연?

풍월 사선암 2006. 7. 12. 17:10

  "대륙에 우리의 역사가 있다! 고구려 최대의 부흥을 이룩한 광개토대왕의 정복은 어디까지였는가?"


광개토대왕의 주변국가정복은 단순히 영토를 넓히고 세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는가?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대업적은 주변국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으며 어디까지 그 세력을 확장했는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고구려의 위대한 영웅 광개토대왕의 정복루트인 대흥안령산맥을 향해 가면서 여러 기록과 현장답사를 통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479년 고구려는 유목민족인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분할했다” 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가장 멀리 진출한 기록이다. 그런데 지형을 살펴보면 지도에서와 보이는 바와 같이 지두우와 고구려 사이에는 대흥안령산맥이라는 거대한 산줄기가 가로놓여 있다. 이 산맥은 고구려와 지두우를 가로막는 천연장벽의 역할을 하였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고구려는 어떻게 산맥을 넘어 지두우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인가?

 

 


인구 30만의 작은 도시 환인에서 2000년 전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마치 작은 서울을 연상시키는 배산임수지역의 환인에서 서쪽 산 위에 서있는 고구려 첫 도성인 오녀산성이라는 웅장한 고성이 있다. 고구려 700년의 역사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KBS 탐사단은 오녀산성으로의 접근을 거부당해 먼 발치에서 바라본 후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이렇게 전한다. “북부여에서 온 주몽은 비류골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광개토대왕비문-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는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건국초기부터 부여정벌에 나선다. 무려 50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정벌은 고구려의 북진을 의미했다. 송화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여의 옛 수도인 중국 길림이 나온다. 길림 안에는 부여의 옛 수도임을 말해주는 부여 왕궁터가 남아있고 그 뒤에는 고구려의 옛 성인 용담산성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현재 길림시 최대의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바로 이 성의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에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이 축조한 성이라 쓰여져 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은 과연 어디까지였던 것인가? 광개토대왕에 의해 북부여로 파견되었던 귀족 모두루의 묘지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KBS 탐사단은 그 흔적을 찾아 농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이 거의 사라져 성벽만이 남아있었고 그 속에서 고구려의 성이었음을 말해주는 붉은 기와조각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왔다는 건국신화를 뒷받침해주는  유물의 발견

-북진을 위한 전진기지인 고구려 용담산성과 동단산성 

-광개토대왕의 명을 받아 북부여 수사로 파견되었던 모두루 묘비의 기록



농안의 북쪽은 드넓은 평원지대이다. 과연 고구려는 눈앞에 펼쳐진 평원을 두고 보기만 했을까? 고구려는 부여를 정복했고 농안은 그 중심지였다. 따라서 부여지방의 끝을 알면 고구려가 어디까지 진출했는지 알 수 있다.

“부여는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음루, 서쪽으로는 선비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다.“


-삼국지-    

이것은 부여의 끝 지역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록에 쓰여있는 ‘약수’라는 지역이 지금까지 정확히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어디까지 진출했는지 기록상으로는 알 수 없음을 뜻하는 듯 했지만 탐사단은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 중국 농안의 북쪽으로 향했다.



고구려는 176개나 되는 성을 가진 ‘성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탐사단이 찾은 중국 요영성 등탑현에는 고구려의 백암성이 있다. 이 곳은 전형적인 고구려 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며 최대한 자연지형을 이용하고 성벽을 쌓은 방법 또한 과학적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또한 요동반도에는 커다란 바위산처럼 자연지형을 십분 활용한 철옹성인 고구려 해양 방어의 최 전진기지였던 비사성이 있다.

 

 

 



탐사단은 고구려가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지두우로 진출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답사를 떠났다. 대흥안령 중턱마을 수목구에 도착해 하루를 꼬박 달려도 산맥은 넓은 초원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정상 또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나 돌들이 가로막는 것이 아닌 드넓은 평지로 이루어진 특이한 지형이었다. 따라서 1300년전 고구려의 기마군단이 이 산맥을 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예부터 지두우는 명마의 산지였고, 말이 고구려군사의 핵심이었던 만큼 지두우는 광개토대왕에게 꼭 필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초원의 길이 열려있는 이곳은 고구려의 북진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이기도 했다.


출처 : KBS 역사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