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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이은주, 다시 그녀를 기억하며

풍월 사선암 2006. 2. 15. 00:33

  

(이은주가 있는 파주의 청아공원)


벌써 1 년이 다 되었다, 영화배우 이은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TV에서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을 본 건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던 날이었다. 연예 관련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은데 인터뷰 요청을 뿌리치고 매니저와 재빨리 차에 오르는 장면이 잠깐 화면에 나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녀의 자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짧은 프로필

생일 : 1980년 11월 16일

사망 : 2005년 2월 22일

데뷔연도 : 1997 년

데뷔/작품 : KBS 2TV 학교 드라마 <스타트>

출신학교 : 군산초등학교, 군산여자중학교, 영광여자고등학교,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그녀의 죽음 이후 문득 내가 알게 모르게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많이 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직업적으로, 개인적으로 전혀 알 지 못하고 관심도 없었던 나는 그저 나름의 색깔있는 연기와 고운 얼굴선 그리고 약간 보이시한 목소리를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를 보고 단 한 순간이라도 즐거워했던 관객으로서 그녀를 추모하고 싶었다.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추모 방법은 영화 관객답게 영화로써 그녀를 추모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출연작을 돌이켜보며 내가 알고 있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혼자 버티고 이겨보려 했는데… ”…故이은주씨 유서내용

[연예부 3급 정보] “일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돈때문에 참 힘든 세상이야”

 

 

○22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이은주씨는 자살하기 전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아쉬움 등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떠났다. 이날 이씨의 방에서 발견된 혈서 2장에는 “엄마 미안해 사랑해”,  “엄마…안녕”이라는 글이 적혀있었고 노트 3장에는 “일이 너무나 하고 싶었어. 안 하는게 아니라 못하는게 되버렸는데 인정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힘듦을 알겠어…” 라며 그동안의 심적 고통이 그대로 적혀있다.


유서에는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어. 혼자 버티고 이기려 했는데…” 라며 자살을 앞두고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한 흔적이 남아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또한 “돈이 다가 아니지만 돈 때문에 참 힘든 세상이야. 나도 돈이 싫어”라고 말해 금전적인 문제로 고민해왔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씨는 또 “일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맨날 기도했는데 무모한 바램이었지. 일년전이면 원래 나처럼 살수 있는데 말야” 라고 적어 지난 1년간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왔음을 토로했다. <국민일보 김나래 기자>


◇ 다음은 이씨가 남긴 노트의 메모를 경찰이 정리해 공개한 내용.


엄마 사랑해. 내가 꼭 지켜줄거야. 일이 너무나 하고 싶었어.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게 돼버렸는데 인정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에게..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힘듦을 알겠어..


엄마 생각하면 살아야 하지만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내가 꼭 지켜줄거야. 늘 옆에서 꼭 지켜줄거야.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어. 혼자 버티고 이기려 했는데..


안돼..감정도 없고..내가 아니니까..일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맨날 기도했는데 무모한 바램이었지 일년 전이면 원래 나처럼 살 수 있는데 말야.


아빠 얼굴을 그저께 봐서 다행이야. 돈이 다가 아니지만 돈 때문에 참 힘든 세상이야. 나도 돈이 싫어.


하나뿐인 오빠, 나보다 훨씬 잘났는데 사랑을 못받아서 미안해. 나 때문에 오빠 서운한 적 많았을거야.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먹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가족끼리 한 집에서 살면서..한 집에서 살면서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다 해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가장 많이 사랑하는 엄마,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내가 꼭 지켜줄게.


마지막 통화, 언니 고마웠고 미안했고 힘들었어. 꼭 오늘이어야만 한다고 했던 사람. 고마웠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날 사랑해줬던 사람들, 만나고 싶고 함께 웃고 싶었는데, 일부러 피한 게 아니야. 소중한 걸 알지만 이제 허락지 않아서 미안해.

 

 

 

송어 (1999년)

 

이 영화는 강수연 때문에 봤다. 당시엔 내게 존재감도 별로 없었던 설경구도 나오고 특색있지만 적용 범위는 좁은 연기를 하는 김인권도 나오고 어린 이은주도 나왔다. 다른 장면은 잘 기억나지 않고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피하다 눈이 맞아 이은주와 남자 주인공이 한바탕 정사를 치른 후의 장면이 기억난다. 푹 젖은 동생의 등에 남은 흙자국을 보고 언니 역을 맡았던 강수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오! 수정 (2000년)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 <극장전>의 포스터를 보자마자 '아, 이은주인가'라는 착각을 했다. 홍상수 감독 영화의 여성성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생활의 발견>이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도 그러하다. 현실과 꿈의 중간에서 왔다갔다하지만 결국 현실을 선택하는. 어쨌든, <오! 수정>은 흑백 영화다. 영화 스토리는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하고 이리저리 꼬여 있어서 기억력이 좋아야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속 이은주는 내 주변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어떤 여성의 이미지와 맞 닿아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도록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사람은 여관에서 문성근이 이은주의 옷을 벗기는 장면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여성을 비하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오! 수정>은 이은주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 영화였다. 그러나 사건 이후 그녀가 출연한 다양한 영화에서 늘 희생되거나 고통 받는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출발로 <오! 수정>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2002년 9월 씨네21과 나눈 인터뷰에서 그녀는 "또래 아이들과는 뭔가 달라진 느낌을 갖게 됐어요. 어른들은 저렇게 사랑을 하나, 저렇게 뒷골목에서 여자를 꼬시나…. 전혀 그런 것을 몰랐던 저는 그때 고민을 많이 했고, 선배 연기자들하고 인생 얘기를 하면서 내 고민은 얘기해도 잠깐 동안의 슬픔의 전염밖에 안 되겠구나, 이런 기분이 들었어요."라고 당시의 감정을 밝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수정>은 잘 만들어진 영화고 이은주의 야릇하고 복잡한 느낌의 캐릭터가 드러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수 많은 장면 중 정보석과 키스를 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한 겨울 바람막이도 없는 동네 놀이터에서 두 사람의 나누던 키스는 건조함과 조급함의 만남 같았다. 한 여자는 건조할 정도로 침착했고 한 남자는 소유하려는 조급함이 있었다. 키스의 로망은 없었다.

 

 

결단코 일반적 재미는 없는 이 영화를 사건 이전에 서너 번을 봤고 사건 이후에 또 서너 번을 봤다. 사건 전에는 영화가 좋기 때문이었고 사건 후엔 이은주를 보기 위해서였다.

 

해변으로 가다 (2000년)

 

<나는 아직도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류의 피 튀기는 청춘 호러물이었던 이 영화에 이은주는 우정출연(까메오)을 했다. 당시 무슨 생각인 지 이 영화를 보긴 했지만 이은주가 출연했는 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고 알려 주신 분이 있는데 이 영화의 테잎을 구해서 이 장면만 다시 뽑을 정도로 부지런하지는 못하다. 피튀는 장면에서 하품을 하며 본 영화인데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속해 있는 바람에 제목을 기억하게 된 뜻 깊은 영화이기도 하다.

 

번지점프를 하다 (2001년)

 

이 영화가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국판 스펙타클 어드벤처 무비가 나오는 줄 알았다.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건장한 남성들이 떼거리로 등장하여 이리 저리 날아다니고 거대한 댐 위에서 번지 점프를 하는 (007 시리즈를 생각해 보라) 그런 영화를 생각했다. 영화의 시놉시스도 보지 않았으니 내 무지함을 탓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영화가 개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특별한 제목의 이 영화에 대한 뉴스가 나왔고 결국 영화를 보러 갔다. 당시에 나는 이병헌과 이은주 콤비가 무슨 색깔을 보여줄 지 꽤나 궁금했다. 그러나 스토리가 환생으로 흘러가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 영화가 게이 영화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이 영화가 판타스틱 로망스인지 게이 영화인지 아니면 그냥 추억과 꿈과 사랑에 대한 것인 지 헷갈린다.


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는 장면과 대사가 있다. 이병헌(인우)이 이은주(태희)에게 뛰어가 사랑을 고백하는 대신 운동화 끈을 묶어 주는 어설픈 대쉬 후 돌아서 가는 그녀에게 외친다,


"그거 아세요? 제가 태희씨한테 마법 걸었어요! 물건 쥘 때, 새끼 손가락, 이렇게 펴라구요-!"

 

 

그리고 그녀는 커피를 마실 때 자신의 새끼 손가락이 들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연애소설 (2002년)

 

차태현과 손예진 그리고 이은주. 세 명의 스타가 출연한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주목을 받았다. 발랄한 이은주와 수줍은 손예진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사랑과 우정을 나누던 차태현. 비오는 날 윗옷을 벗어 세 사람이 함께 쓰고 있던 장면은 영화의 포스터와 스틸컷으로 자주 사용되었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다. 혹자는 여전히 이은주가 이 영화에서도 비련의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2005년 가을,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다. 글쎄, 나는 이 영화에서 비로소 나이에 맞는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비록 이번 영화에서도 완결된 사랑을 만나지 못했지만. 한 가지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왜 그녀의 역할은 항상 사랑의 주변에서 겉도는 것이었을까? 감독이나 관객들은 그런 이미지를 그녀에게서 발견했던 것일까?

 

하얀방 (2002년)과 하늘정원 (2003년)

 

 

호러물은 돈을 주고 보라고 해도 보지 않기에 <하얀방>은 볼 기회가 없었다. <하늘정원>은 솔직히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취향과 별개로 이 영화들의 흥행 성적도 과히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망했다. 그러나 <하늘정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은주의 사진을 한 장 건질 수 있었다. 그게 위로가 조금 된다.


인기 배우가 연속으로 두 번 흥행에 실패한 영화에 출연하면 슬럼프에 빠졌다고 언론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이은주는 2003년 11월 한석규와 함께 스릴러 물인 <소금인형>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크랭크 인에 들어갔지만 결국 제작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듬 해 이은주는 MBC 미니시리즈인 <불새>에 출연한다. 2004년 4월부터 6월까지 방송된 <불새>에서 그녀는 다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년)와 주홍글씨(2004년)

 

 

이은주는 천만 관객 돌파라는 기록을 수립한 <태극기 휘날리며>와 다시 한석규와 함께 <주홍글씨>에 출연한다. 2004년은 그녀에게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두 영화에 대한 평가나 특히 <주홍글씨>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당시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온 말과 말에 대해 언급은 해야겠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나 기사 만들기에 급급한 몇몇 언론들은 <주홍글씨>의 노출신을 언급하며 비난을 퍼 부었다. 심지어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 그녀가 목숨을 끊지 않았냐는 추측성 보도도 있었다. 이 영화가 개봉관에서 내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비보가 날아 들었다. 덕분에 <주홍글씨> DVD 타이틀이 날개 돋힌 듯 판매되었다 한다. 이것도 기사화되어 사람들의 말놀잇감이 되곤 했다.


돌이켜 보건데 이런 것이야말로 고인을 욕되게 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리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내 뱉았던 일년 전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안녕! 유에프오 (2004년)

한 순진한 버스 기사와 젊고 아름다운 맹인 여성의 사랑 이야기. 여기서 이은주는 사랑으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변두리로 숨어 든 역할로 나온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그녀는 다소 위로를 받는다. 다른 영화에서 늘 사랑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채이고 상처 받았던 것과 달리 <안녕! 유에프오>에서 그녀는 상처를 치유 받는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태생이 맹인인 역할이지만 맑은 눈망울을 그대로 내보인다. 그녀가 떠난 후에야 이 영화를 비디오로 봤다. 멋진 스토리 라인도, 감동적인 장면도, 기억할만한 연기력도 없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가 우리 곁에 있을 때의 감상이다.


영화란 참 좋은 것이다. 그녀는 이미 태어난 별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영화 속의 그녀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그녀가 떠난 후 <안녕! 유에프오>를 보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안녕, 이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