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39세 보수당 당수 가능했던 이유

풍월 사선암 2020. 4. 23. 09:25

[서소문 포럼] 39세 보수당 당수 가능했던 이유

 

통합당 안팎에서 캐머런 주목

젊은 지도자가 변화주도 취지

인적·정치적 여건인지 미지수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도 30대에 보수당 당수(黨首)에 오르지 않았느냐.”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미래통합당 안팎에서 나오는 주문이다. ‘30대 당수’, 좋은 발제다. 다만 그게 가능했던 맥락에 대한 이해는 없다. 30대를 물리적 나이로 받아들인다. 당수가 되면 누구든 할 수 있다고 여긴다(황교안 대표 시절을 겪고도 그런다는 게 놀랍지만 정치인들은 원래 희망사고의 대가들이다). 과연 그럴까. 캐머런의 자서전(For the Record)에서 단서를 얻어보려고 한다.


좋은 지도자는 뚝 떨어지지 않는다

 


캐머런은 39세에 보수당의 당수가 됐다. 정치연령으로 보자면 정계 입문 17년 차였다. 스스로 토리(Tory·보수당)의 아파라치크라고 규정한 데서 드러나듯, 일종의 당료 출신이다. 보수당의 싱크탱크격인 CRD(Conservative Research Department)의 모집 공고에 응모하면서 발을 들여놓았다. 6년 후 홍보회사로 옮겼고 7년 후 의원 배지를 달았다. 재선 첫해이던 2005년 당수가 됐고 그로부터 5년 뒤 총리가 됐다.


그 사이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치렀다. 5명의 당수를 겪었는데 정점에 선 마거릿 대처를 시작으로, 13년 야당 시절의 3명도 있다. 대처는 CRD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캐머런에게 특유의 레이저 눈빛을 던지며 무역적자 수치를 물었다고 한다. 당일 나온 거라 못 본 상태였던 캐머런은 그 순간을 모면할 수만 있다면 즉사, 아니 고통스러운 죽음마저도 자비롭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적었다. 그는 대처에 마지막까지 충성한 이들과, 대처를 몰아낸 이들 사이의 갈등을 치유하는 게 후임자들의 책무가 됐다고 썼다.


그는 정치가 소명(vocation)이면서 또 직업(profession)이라고 인식했다. 숙달해야할 기예가 있다는 뜻이다. 정치에 있어 타이밍과 운이 절대적이란 것도 깨달았다. 상대가 하필이면 최정점일 때의 토니 블레어여서, 보수당 당수(윌리엄 헤이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당을 깨지지 않게 하는 것만일 수도 있다는 점을 말이다. 리더 선출 과정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고 리더십의 중요성도 직시했다.


집권은 세력이 한다


CRD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의 성장사를 함께했다. 1992년 총선 캠페인 때 하루 12~20시간 일한 일군의 선거전략가들(brat pack·꼬맹이들)이었으며 2000년대 들어선 노팅힐파(Notting Hill set)’로 이어졌다.


초선 의원 시절, 그는 보수당이 변해야 이긴다는 걸 절감했다. 그의 말이다. “97년 참패 이후 유권자들은 투표용지에서 토리를 지웠다. 우리 얘기를 듣지 않았다. 듣더라도 흘려 넘겼다. ‘빌어먹을 토리(effing Tories)’가 한 얘기여서다. 설령 노동당 정부가 실패하더라도 우리에겐 기회를 주지 않을 터였다. 노동당이 아무리 못한들 우리가 대안일 순 없었다.”


그는 명석한 젊은 보수 성향 인사들과 만나 토론하고 또 했다. 세 가지 방향을 잡았다. 바로 현대적이면서 온정적(compassionate) 보수당이다. 현대적이란 21세기 영국의 오늘을 직시한다는 의미다. 법과 범죄 등 전통적 이슈 외에 교육·이민 등도 핵심 과제로 다루겠다는 의미다. 온정적이란 그간 기회를 덜 가졌던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면서도 가정 중시, 개인의 책임, 자유기업 등 보수당의 원칙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캐머런 당선을 가능케 한 요소들


보수당은 20055월 총선에서 다시 참패했다. 대단히 안정적이고 열정적이면서도 변화를 말하던 당수(마이클 하워드)였는데도 졌다. 변화를 상징하진 않아서였다.


당수 경선이 12월로 잡혔다. 10월 추계 당 대회 후였다. 새 인물이 떠오를 시간을 준 셈이다. 기존 후보군을 보곤 캐머런은 직접 나서기로 했다. 동료들의 강권도 있었다. 그의 메시지는 이기기 위해선 변해야 한다(Change to Win)’였다. “우린 이길 수 있다. 이 나라를 더 나은 나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가 변해야 한다. 이걸 4년 후로 미루지 말자. 진심으로 변화를 믿는 이를 지지해달라. 그러면 우리가 이긴다.” 보수당의 의원들과 당원들은 캐머런을 선택했다.


오늘의 통합당


통합당의 현재 움직임을 보면 당수를 그저 얼굴(또는 이미지) 바꾸기로 이해한다. 대선으로 가는 길목의 자리다툼 정도다. 골수 지지자의 시선은 밖, 또는 미래가 아닌 안을 향했다. 그렇다면 ‘30대 캐머런은 그저 주문(呪文)일 뿐이다.


고정애 정치에디터

[중앙일보] 입력 2020.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