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MBC사우회

​4월혁명은 진리의 승리

풍월 사선암 2020. 4. 20. 22:17

<고대 4.18의거 60주년 특집호에 실린 글 (2020.4.15일 발행)>

 

*희미한 기억으로 더듬어 본 4 .19 *

4월혁명은 진리의 승리

 

우리들은 그때 병아리 대학 신입생 말 그대로 Freshman들이었다. 그래서 뭘 스스로 알아서 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누가 이래라 하면 이렇게 했었고 누가 저래라 하면 저렇게 했었다. 참으로 순진했었다. 불의(不義)에 물들어 있질 않았었다.

 

1960418일 풋내기 신입생들이었던 우리들은 오전 교양과목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운동장에서 교가와 응원가를 배우기로 되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몇 몇이 잔디광장에 앉아 담소하고 있는데  핸드폰 마이크를 통해 다급히 학생들은 仁村동상 앞으로 모이라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웬 일인가 싶어 가보니 신입생들에게 주려고 만든 타월을 나누어 주며 3. 15 부정선거를 규탄하자는 것이었다.

 

"민주역적 몰아내자!"란 플래카드가 긴 빗자루 막대기에 매여져 있었다. 그것을 선두로 하고 학생들이 교문을 나섰다.

 

우리들은 안암동 입구 신설동 로터리 동대문 종로 광화문 네거리를 거쳐 현재 조선일보 옆에 있는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앞에 모두 모였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고 시위를 하고 있는데 당시 실력자였던 張澤相의원이 학생들에게 해산을 설득하려 했으나 야유만 받고 사라졌었다. 그 때 이미 정치인들을 불신하고 혐오 했었다. 兪鎭午총장이 학생들의 희생이 발생할 수 있으니 해산하라고 종용했었다. 학생들이 쉽게 받아들이질 않았었다.


그 때 李哲承의원이 "나는 여러분의 선배다.어떻게 총장님의 말씀을 안 듣느냐. 우리들은 인촌 김성수 총장님의 말씀을 거역 한 적이 없다. "는 설득에 해산한 게 아니라 모두가 학교로 향했었다. 밤이 어둑해 지고 있었다.


청계천 4가 천일극장 앞에 이르렀을 때 창경원에서 벌이는 벚꽃 놀이 폭죽이 하늘 높이 치솟는 게 눈에 들어왔었다.

 

바로 그 때였다. 웬 낯선 사람들이 선두 학생들을 폭행하고는 길가 상점들 유리창을 부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려 그랬듯 싶었다. 동대문에서 악명 높았던 林和秀.柳志光수하의 깡패들의 습격이었다.

 

그 당시 신문이 조석간으로 발행 했었는데 아침신문에 고대생들이 피습당해 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것으로 보도 되었다. 신문은 동아일보, 경향신문, 방송은 CBS기독교 방송이 제 역할을 했었다.

 

미국에서 발행됐던 'LIFE"지에 고대생들의 데모 화보가 대대적으로 실렸었다. 한결같이 T.S 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에 나오는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고 인용 보도들 했었다.

 

데모를 한 그 다음날 우리들은 정상적으로 등교하여 학교 수업을 받고 있었다. 홍릉에 있던 서울대 상대학생들이 데모하러 나가며 공부하고 있는 우리들더러 동참하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수업을 받다말고 다시 데모를 하러 시내로 갔었다.

 

1960419일 서울 시내 대학생 수십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었다. 오후 늦게 경무대 쪽에서 총성을 들렸고 희생자자들이 앰블런스에 실려 가는 게 보였다. 학생뿐 아니라 시민들도 흥분하기 시작했었다.

 

4.19 후유증이 있었으나 학생들은 등교하며 다시 공부를 했고 거리청소 등 질서회복에 참가들 했었다. 전국적으로 데모가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의 아무런 대책이 없자 이번에도 대학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시위를 했다. 그게 425일이었고 그 다음날 42610:30분 이승만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하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하야 했었다.

 

그 분은 '君舟民水(임금은 배 ,백성은 물))의 뜻을 알고 있었다. 강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

 

2020년이 되면 4.19의거 60주년이 된다. 4.19 전후의 수많았던 시위는 정권욕이 낳은 부정에 대한 민심의 항거였었다. "총은 쏘라고 준 것'이라 했지만 무력이 정의를 이기지 못했다.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도 주저 없이 하야 했었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을 존경했고 스승은 제자들을 사랑했었다.

 

民心이 하나였던 4.19 의거는 누가 뭐래도 참으로 순수했었다.

그 때 우리들의 모습이 趙芝薰애 그대로로 담겨져 있다.

 

<自由! 永遠活火山이여!>

 

邪惡不義抗拒하여

壓制의 사슬을 끊고

憤怒의 불길을 터뜨린

! 1960418!

天地를 뒤흔든 正義喊聲을 새겨

그날의 噴火口 여기에 돌을 세운다.


-趙芝薰-

 

그 당시 주요대학 교훈을 보면

서울대학교 : 眞理는 나의 빛.

연세대학교 : 眞理. 自由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화여대 : ..옅다.

 

우리들이 다녔던 고려대학교 교훈은 自由.正義.眞理이다.

어느 하나 버릴게 없다. 그중에 '眞理'를 음미해본다.

 

성경에 의하면 유대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며 "진리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예수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리를 우리들이 배운 존 키츠(John Keats)에서 찾아본다.


'Beauty is truth, truth beauty - that is all, Ye know on earth, and all ye need to know."

(眞理, 진리는 아름답다. 그게 전부- 그대가 이 세상에서 알고, 그대가 알아야한 모든 것이 진리이다."

 

참으로 명쾌한 답이다.

그때 4월 혁명은 진리의 승리였다.

 

그런데 왜 그로부터 60년 된 오늘 

見利思義 見危授命 -論語-

(를보면 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던져져야 한다.)란 말이 떠오를까?


<글 이종민 전 대전 MBC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