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정보,상식

냉장고와 세탁기

풍월 사선암 2020. 4. 16. 20:18

[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27] 냉장고와 세탁기

 

냉장고와 세탁기 모두 대표적인 가전제품이다. 백화점 매장에도 함께 진열되어 있다. 마치 대학 입시에서 음악, 미술, 무용, 체육 전공을 편의상, 그리고 무식하게 '예체능계'라고 분류해 놓은 것 같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세탁기는 수작업이나 가사노동을 도와주는 도구, 그게 다다. 전자계산기나 탈곡기, 진공청소기, 전기면도기 같은 것이다. 냉장고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자연에서 나온 유기적 재료들을 보관하고 끄집어내서 '요리'라는 창작을 유도하는 수납공간이다. 아틀리에의 서랍장이나 장인 공방의 선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한때 냉장고를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바로 요리사의 창의력과 순발력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의 기능이 확연히 다르다. 이 때문에 매장에서 냉장고의 위치는 전자제품 코너가 아닌 요리책과 그릇, 주방 도구들과 같이 진열·판매되어야 한다. 요리의 라이프스타일을 편집하고 제시하는 패키지로 말이다.



1862년 영국의 제임스 해리슨에 의해서 발명된 냉장고는 20세기 중반 가정용으로 보편화하면서 주방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사진. 1970년대 우리나라의 단골 경품 메뉴이기도 했다. 냉장고는 차갑지만 그 안에 '공간'이 존재한다. 방이 나뉘어 있고 기능에 따라 위치, 모양, 크기, 수납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마치 서랍과 같은 우리 뇌의 기억체계를 연상시킨다. 정리된 기억의 구조에 따라서 문학과 예술 활동이 펼쳐지는 것처럼, 필요한 식재료가 구역마다 잘 정돈되어 있어야 창의성이 발휘되기 좋다. 냉장고는 곳간과 같은 저장고는 아니다. 오래된 식재료가 가득 차서 유동적 공간이 없으면 창의성이 제한된다.


유효기간이 만료된 제품은 과감히 버리고 분류를 잘해 놓아야 한다. 컴퓨터의 오래된 파일을 폴더에 정리하고 휴지통을 종종 비워줘야 하는 원리와 같다. 근래에 사물 인터넷과 연결되어 유통기한이나 요리법 등을 알려주는 냉장고도 등장했다. 그동안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방법은 충분히 연구했다. 레스토랑 방문이 제한된 요즈음은 집에서 냉장고를 열어 창의성을 발휘해 보기 좋은 시기다.

 

입력 2020.04.16 03:13 조선일보 박진배 뉴욕 FIT 교수·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