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의자
식당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의자 몇 개를 옥녀 할머니가 빌라 입구 느티나무 아래에 가져다 둔 지 일 년도 넘었다. 낡고 허름한 그 빌라에는 옥녀 할머니 같은 어르신이 많이 살았는데, 등받이가 있는 의자는 허리를 받칠 수 있어 그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 의자 때문에 옥녀 할머니는 난생처음 '피고인'이 되었다. 같은 빌라 이웃인 정순 할머니가 의자 하나를 가져다 자기 집에서 쓰는 걸 보고 따지자 정순 할머니가 “그 의자가 원래 니 것도 아니잖아. 어디서 훔쳐온 거 아니여?”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옥녀 할머니가 '나를 도둑년 취급해?' 하며 순간적으로 밀쳐 정순 할머니가 넘어지고 만 것이다.
폭행죄로 벌금 오십만 원의 약식 명령을 받은 옥녀 할머니는 도둑 취급당한 것도 억울한데 벌금이 웬말이냐며 정식재판 청구를 했다. 옥녀 할머니의 국선 변호인이 된 나는 바로 그 의자에서 할머니를 만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북에서 태어나 전쟁 때 삼팔선을 넘은 사연, 몇 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이 애를 많이 먹여 늘 미웠는데 요즘엔 꿈에서나마 보고 싶다는 이야기, 먹고살기 바쁜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가 미안해 빈 병을 모으고 폐지를 줍는다는 이야기 등 등.........
“할머니, 살면서 앉아서 쉴 만한 의자가 별로 없으셨네요. 과묵하면서도 정직하게 사셨는데, 의자를 훔쳤다고 하니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내 말에 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내가 민 건 잘못이긴 하지!"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옥녀 할머니 손을 잡고 정순 할머니 집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다.
"내가 밀어서 미안하네.” 옥녀 할머니의 진지한 사과에 정순 할머니도 못 이기는 척 토라진 얼굴을 풀고 “심한 말 해서 미안해!"라고 했다. 두 할머니는 어색하게 미소 짓다 이내 환하게 웃었다. 나는 정순 할머니로부터 합의서를 받아 법원에 제출했고, 폭행 사건은 '공소 기각'으로 무사히 마무리 되있다
두 할머니는 전처럼 다시 의지에 나란히 앉아 느티나무 잎이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는 걸 보고 있겠지. 각각 혼자 남은 두 할머니는 아마도 서로에게 좋은 의자가 되어 줄 것이다.
정혜진/수원고등법원 국선전담변호사
- 월간 좋은 생각 4월호(2020)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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