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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엔에서 123층 롯데타워까지…'神격호'로 불렸던 재계 거인

풍월 사선암 2020. 1. 19. 19:27

83엔에서 123층 롯데타워까지'격호'로 불렸던 재계 거인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명예 회장이 19일 별세했다. 98. 신 명예회장은 맨손으로 재계 서열 5, 글로벌 그룹 롯데를 일군 대표적 창업 1세대다.

 

신격호, 시게미쓰 타케오(重光武雄), 롯데그룹 창업주.

 

|작가 꿈꾼 문청, 풍선껌 사업 신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매료

|주인공 샤롯데 애칭 '롯데'

|2013년부터 두 아들 경영권 분쟁

 

19일 별세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선구적 경계인이다.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롯데라는 제국을 일궜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와 모국어만큼 편한 일본어를 섞어 썼다. 양쪽에서 환호와 의심을 동시에 받았다. 신격호의 99년 삶엔 빛과 그림자, 그리고 모호한 회색지대가 공존한다.


맨손으로 국내 그룹 재계 5위 롯데그룹을 일군 1세대 창업자로 한창때는 홀수달에는 한국에서, 짝수달에는 일본에서로 요약되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그룹을 지휘했다. ‘대한해협의 경영자’ ‘()격호등의 별칭을 얻었지만, 불명예 퇴진했다. 모국어보다 일본말에 능숙했지만, 한국 국적을 바꾼 적은 없다.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직원을 떨게 한 제왕적 경영인인 동시에 댐 건설로 수몰돼 사라진 고향인 울산 둔기리 사람들을 위해 43년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위로 잔치를 열기도 한 재계의 거인이었다.


83엔 들고 밀항선 탄 '문청 

 

신격호 회장은 1921104일 영산 신씨 집성촌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신진수(1973년 작고)5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넉넉한 편이었다고 전해지지만, 당시 넉넉하다는 것은 굶지 않을 정도를 의미했다. 신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73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 세 번째 부자였지만 논 열다섯 마지기에서 나온 것을 식구들이 먹고 나면 조금 남는 정도라고 회고했다. 10~20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 통학하는 열정을 보여주었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일본으로 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자랐다.


숙부의 도움으로 2년제 농업 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41년 단돈 80엔을 들고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신문·우유 배달을 하며 와세다대학 이학부인 와세다 고공 야간부 화학과를 마쳤다.


보통학교 졸업사진. 맨 윗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신 명예회장이다.

 

결국 문학의 꿈은 펼치지 못했다. 대신 문학에 대한 동경은 롯데그룹 명칭으로 남았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좋아해 여주인공 샤롯데(롯데는 애칭)에서 기업명을 따왔다. 이 작명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내 일생 일대의 최고의 수확이자 선택이라는 말을 남겼다.


롯데그룹 그 시작, 풍선껌


신격호 신화의 시작은 풍선껌이다. 486월 종업원 10명과 함께 설립한 기업 롯데의 첫 제품은 하필 일본인이 서구 문물이라며 반감을 보인 껌이었다. 배고픈 시절 밥도 안되는 간식으로 성공할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롯데 풍선껌은 줄 서 사는 제품에 올랐다. 껌 포장지에 거금(1000만엔)을 상금으로 내걸고 경품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소공동 롯데호텔 34, 신 회장의 집무실엔 당시 판매된 롯데 그린껌사진이 붙어있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이후 롯데는 초콜릿과 과자 등 사업 영업을 확장하면서 일본 대표적인 식품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껌시장에서 성공은 초콜릿과 캔디류, 빙과류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새로 추가하는 품목마다 실패 없이 단기간에 시장을 장악하는 뛰어난 능력과 수완을 발휘했다. 롯데는 식품을 기반으로 상사(1959), 부동산(1961), 물산(1968) 등으로 확대하며 급성장했다. 88년 일본 경기 호황으로 신격호 회장은 포브스 선정 세계 부자 4위에 올랐다. 53년이 지난 현재 롯데는 계열사 95, 자산 규모의 115조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좌)청년시절 일본에서 신격호 명예 회장 (우)첫째 아들 신동주를 안고 있는 신격호 명예회장 오른쪽은 부인 하츠코 여사

 

한일 수교 뒤 역진출 

 

65년 한일 수교로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신격호는 한국에 역진출했다. 그가 김포공항에 첫발을 디딘 장면은 2017년 출간된 '롯데 50년사'에 인상적인 사진 한장으로 남아있다. 약관의 나이에 건너가 40대 중년이 돼 돌아오면서 오른손엔 서류 가방을 꼭 쥐고 있는 들뜬 모습이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하자 귀화하라는 권유도 빈번했다. 한국 사람이 일본에서 돈만 벌어 간다는 조롱과 비방을 듣기도 했다. 귀화가 가져다줄 유무형의 혜택을 암시하는 끈질긴 유혹을 받기도 했다. 신 명예회장은 이후 인터뷰에서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의 진행 과정을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서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롯데관계자는 신격호의 모국에 대한 투자계획은 1950년대에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사업이 시작하자 숙원이 이루어진 기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곧바로 한국으로 건너와 투자 방안을 모색했다. 제과 창립 직후 주요 일간지에 낸 광고엔 “ ‘품질본위, 박리다매, 노사협조를 바탕으로 기업을 통해 사회 및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기업이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67년 자본금 3000만원으로 창립한 롯데제과는 70~80년대를 거치면서 롯데그룹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1965년 김포공항에 입국하는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당시 서울에 동양 최대의 마천루를 짓겠다는 발상은 무모해 보였지만, 신 회장은 감행했다. 지하 3층 지상 38층의 롯데호텔을 6년간 지으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와 맞먹는 15000만 달러가 투입됐다. 호텔업은 이후 유통업과 리조트업과 면세점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한류 붐을 타고 2000년대 초부터 급성장할 수 있었다.


롯데 50년사(2017) 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는 신격호 회장이 유통업과 관광업에 관심을 둔 이유는 특별한 자원을 들이지 않고도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유통업이 활발해지면 산업 전반에 걸쳐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 구조가 형성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소공동 호텔부지 부속 건물 일부를 백화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유통 현대화를 끌어내겠다는 복안을 제시했다. 75년 제출된 보고서에는 이미 10층 규모의 백화점을 세우고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면세점을 포함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통 명가 롯데의 계획은 이미 이때 태동했다. 791217일 롯데쇼핑센터(현 백화점) 개관일엔 서울시민 30만명이 몰렸다. 수도권 인구가 800만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흥행이었다. 롯데쇼핑센터는 개점 100일 만에 입장객 수 1000만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우면서 한국 유통산업사에 랜드마크가 됐다.


90년대 중반 외환위기 여파로 구조조정 국면에 들어간 국내 석유화학산업 부문에서 적극적인 인수에 나서면서 현 롯데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 화학부문 기틀을 세웠다. 79년 공기업이었던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한 것으로 시작으로 신 회장의 기간산업 투자는 계속됐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젊은 시절 일본 도쿄 시부야 자택에서 어린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왼쪽)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안고 있는 모습

 

왕자의 난, 어둠 속 말년


초고층 건물에 대한 신 회장의 집념은 '서울의 랜드마크'로 짓고자 했던 롯데월드타워 건설로 이어졌다. 88년부터 2롯데월드 사업이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초고층 프로젝트는 수차례 백지화됐지만 신 회장은 미련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2011년 최종 승인, 2017년 완공됐다. 그러나 롯데월드타워 건설 허가에 대한 특혜 시비를 시작으로 롯데그룹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 수사가 시작됐다.


롯데그룹 '형제의 난'이 최고조이던 20178.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격호 명예회장이 서울 중구 롯데호텔 집무실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생전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후계 구도는 긴 불화의 씨앗이 됐다. 결국 2013년께부터 신 회장의 치매가 진행되면서 신동빈 현 롯데그룹 회장과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형제의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롯데그룹의 거미줄 지배구조 등이 드러나면서 창업 이래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신 회장은 법원으로부터 한정 후견인을 지정받아 지내다 영면했다.


2017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를 둘러보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중앙일보] 입력 2020.01.19 16:45 전영선 기자



[신격호 별세] 재계 5위 성공신화껌부터 123층 롯데월드타워까지


19일 별세한 고()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한국 유통 산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크게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돈 83엔 들고 일본 건너가 사업재계 5위 유통 기업 만들어

 

신 명예회장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2년 경상남도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빈농 집안의 55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울산농고를 졸업하고 돼지 사육을 했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1941년 사촌형이 마련해 준 노잣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그의 일본 이름은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

 

청년 신격호는 일본에서 낮에는 우유와 신문을 배달하고 밤에는 대학에 다니며 학업에 정진했다. 우연히 만난 일본인 사업가 하나미쓰는 신격호를 높게 평가해 사업자금으로 5만엔을 빌려준다. 신격호는 이 돈으로 1944년 도쿄 인근에 윤활유 공장을 세운다. 하지만 공장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가동도 못하고 불타버린다. 5만엔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는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에 머물던 한국인이 대거 귀국했지만, 신격호는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을 두고 갈 수는 없다, 우유 배달을 하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해 사업 밑천을 마련했다. 그는 당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경우에도 배달 시간을 어겨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배달 시간이 정확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신 명예회장 앞으로 우유 배달 주문이 크게 늘었다.

 

이렇게 모든 돈으로 그는 1946년 도쿄에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공장을 짓고 비누 크림 등을 만들어 팔았다. 사업이 잘 되어 1년 반 만에 빚을 다 갚았다. 신격호는 자신을 믿고 기다려 준 하나미쓰에게 빌린 자금을 모두 돌려주면서 고마움의 표시로 집까지 한 채 사 주었다고 한다.

 


이후 승승장구한 신격호 명예회장은 1948년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회사를 설립하고 롯데간판을 처음으로 내걸었다. 껌 회사인 롯데를 창업하면서 '롯데 신화'의 막을 올렸다.

 

회사 이름 롯데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왔다. 한때 작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던 신격호 명예회장이 롯데가 샤롯데처럼 사랑받는 기업이 되기를 바랐던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롯데는 껌에 이어 초콜릿, 캔디, 비스킷 등 사업 영역을 넓혔고, 일본 굴지의 종합 제과기업으로 입지를 굳혔다. 롯데는 1959년 롯데상사, 1961년 롯데부동산, 1967년 롯데아도, 1968년 롯데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사업을 다각화하며 일본 1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신격호 회장이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갈 때 가져간 83, 롯데제과 최초의 껌과 지금도 나오는 껌들, 롯데칠성사이다의 옛날 병들(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일본에서의 사업이 자리를 잡자 신 명예회장은 고국으로 눈을 돌렸다. 신 명예회장은 1966년 한·일 수교로 투자의 길이 열리자 사업을 한국으로 확장해 1966년 롯데알미늄과 1967년 롯데 제과를 설립했다. 롯데는 쥬시후레쉬, 스피아민트, 빠다쿠키 등 히트 상품을 앞세워 빠르게 성장했다. 음료·빙과회사를 인수하는 한편, 관광·유통·건설·석유화학 사업에도 진출했다.

 

1973년에는 서울 소공동에 지하 3, 지상 38층 규모의 롯데호텔을 준공했다. 1974년과 1977년에는 칠성한미음료와 삼강산업을 각각 인수해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현 롯데푸드)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79년에는 롯데호텔 옆에 롯데백화점을 열고 유통업에도 진출했다. 평화건업사(현 롯데건설)와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한 것도 이 즈음이다. 이후 1980년 한국 후지필름, 1982년 롯데 캐논·대홍기획 등을 설립하며 사업 영역을 넓혔다.

 

롯데그룹은 1980년대 고속 성장기를 맞았다. 연이은 인수·합병(M&A)을 통해 오늘날 국내 재계 서열 5위 기업이 됐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이런 고속 성장 덕에 1990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 9위에 오르기도 했다.

 

서울 잠실에 위치한 롯데월드타워.


2017년 초에는 숙원사업이었던 롯데월드타워도 개장했다. 롯데월드타워 프로젝트는 신 명예회장이 1987"잠실에 초고층 빌딩을 짓겠다"며 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됐다. 신 명예회장은 20175월 롯데월드타워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형제의난 계기로 경영에서 물러나

 

하지만, 신격호 회장의 시대는 20157월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경영권 분쟁을 벌이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신 명예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신동빈 롯데 회장, 신동주 롯데홀딩스 전 부회장.


신 명예회장은 2016년 호텔롯데 대표와 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 사내이사에서 물러났고, 2017년에는 롯데쇼핑·롯데건설(3), 롯데자이언츠(5), 일본 롯데홀딩스(6), 롯데알미늄(8)이사직을 내려놓았다. ·일 롯데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한국에서 50, 일본에서 70년 이어진 '신격호 시대'에 마침표를 찍힌 것이다.

 

신 명예회장은 지난해 6월 법원 결정에 따라 거처를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소공동으로 옮겼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면서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19일 오후 영면에 들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1.19 1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