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 상생하는 길..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게 혈육이고 천륜이기 때문이며, 지금도 위급한 경우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던지는 모정이 있는 게 사실이다.
모든 것이 해체되는 시대라 해도 가족의 끈이 튼튼한 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그 내용에서 변함이 없으며 변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특히 그러하다.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 적극성 때문에 맹목적이 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사랑하는 방법여하에 따라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자식을 망칠 수도 있다. 방법은 그 결과 때문에 그렇게 중요하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도 시대에 따라, 환경과 조건에 따라 변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제는 부모의 사랑도 유연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은 지금 우리사회의 풍속도부터 살펴보자. 모든 부모들은 자식의 교육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그것이 신분상승을 위한 것이든, 계층이동을 위한 것이든 목표는 자식의 성공에 있다.
어려서부터 각종 선행학습은 물론, 학교는 빠져도 학원은 빠질 수 없는 거대한 사교육 시장에 편입한다. 거개의 가정이 그 수입의 절반이상을 교육비로 쓰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공교육이 아니라 사교육에 지출된다. 심한 경우 엄마들이 알바를 해서라도 자식의 사교육비를 조달하는 정도다. 첫 관문인 대입준비를 위해서는 모든 엄마들이 입시전문가가 되어야하고 최신정보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게 현실이다. 고3이 있는 가정은 기침소리까지 죽이고 산다. 학생 본인도 가족도 모두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대학입학에서 자식들은 두 부류로 갈라지는데, 소위 말하는 일류대학과 기타가 그것이다. 이게 중요한 것은 졸업 후의 취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기타가 불안한 것은 그게 자칫 백수로 들어서는 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취업이 되는 대학에 들어간 자식부터 추적해 보자.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 엄청난 등록금은 물론 책값, 옷값, 용돈까지 집안의 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 경사가 난 것처럼 온 집안이 즐거워한다. 그리고 결혼, 거개의 부모들은 천문학적인 결혼비용을 감당하며 집 장만을 위해 스스로의 실력을 벗어나는 무리를 감행한다.
그 자식이 결혼해 분가한 후, 부모의 가정에 남는 것은 쓸쓸해진 부모와 아무 준비도 못한 노후가 코앞에 와 있는 현실이다. 분가한 자식에게서는 문안전화도 오지 않는 소원한 관계가 된다. 단연코 대부분이 그렇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이제 독립했으니 자기를 위해 희생한 부모는 용도폐기인 것이며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에게 올인 하는 동안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는 아무 준비도 못한 현실이 빚쟁이처럼 와 있는 것이다. 자식은 성공했고, 부모는 위기 앞에 서 있다. 이 풍속도가 지금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기타와 낙방생의 케이스를 보자. 기타에 속하는 자식들은 '학벌'때문에 취업이 안 되고, 백수가 되어 부모에게 얹혀산다. 대학입학에 낙방한 자식은 '재수'라는 방패 뒤에서 부모의 모든 것을 하나씩 빼먹는다. 자식이자 또 커다란 짐이 된 것이다. 이런 경우가 어려운 것은 해결의 방법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다 큰 자식이지만 직장이 없으니 돈 벌이가 없고, 그러다 보니 여자를 만나 교제할 수도 없고, 결혼도 하지 못한다. 물론 제 집 마련은 언감생심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이 자식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다. 소꼬리를 버리고 닭벼슬을 택하면 좋으련만 죽으면 죽었지 중소기업엔 안 간다. 엄격히 말해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자리가 없다.'가 옳다. 귀납법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당초에 기타대학에 간 것이 잘못된 길이었다. 누구나 대학에 간다는 것, 그 결과는 이렇게 참담하다. 백수는 결국 백수로 남는 것이다. 그들에게 물리적으로 돌파구가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그게 냉엄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부모도 자식도 살 수 있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좁고 좁은 나라에 대학입학정원이 56만 명이다. 무슨 얘긴가, 매해 같은 숫자의 졸업생이 쏟아져 나온다는 뜻이다. 2013년 말 기준, 통계청 집계에 의하면, 대졸이상 학력을 가진 사람 중 307만 8천명이 비경제활동인구다. 전체 비경제활동인구의 18.9%라고 한다. 반면 대졸이상 학력보유자 중 취업자는 2000년이 520만 명, 2012년이 1천만명, 2013년이 1천 55만 9천명이다. 따라서 307만 명은 취업이라는 경쟁에서 실패한 낙오자들이다. 더 시급한 문제는 307만 명의 앞에는 매년 새롭게 대학문을 나서는 새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경쟁에서는 새 졸업생들이 백번 유리하다. 307만의 앞날은 그래서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비경제활동인구 라는 말은 '포기한 사람들'이란 뜻도 포함된다. 부모도 자식도 그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이 악순환은 끊임없이 대를 이어 되풀이된다. 생각을 바꿔야 하는 쪽은 부모가 더 시급하다. '노후'가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100세를 사는 고령화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신문에 나는 부고를 살펴보면 이미 거의가 80-90세 사이에서 사망하고 있다. 말하자면 현역에서 은퇴하고도 20-30년을 더 사는 것이 현실이 됐다는 얘기다. 그 긴 시간을 돈 없이 버틸 수 있는 장사는 없다.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식이 아니라 제 코가 석자나 빠져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어리석은 인간만이 제 앞을 보지 못하고 자식에게 올인 하고 있을 뿐이다.
성공한 자식도 제 부모를 몰라라 하는 세상인데, 백수에게 무엇을 바랄 것인가. 가망 없는 얘기다. 그게 누구든 아무리 자식이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해도 자기의 노후문제는 자기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준비 없는 노후는 가혹하고 비참하다. 그걸 알아차렸을 땐 손발이 잘려나간 다음이니 방법이 없게 된다. 그래서 더 비참하다.
자식들도 생각을 바꿔야 된다. 이미 자기 스스로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일류대학, 즉 취업이 될 수 있는 학교에 갈 실력이 없다면 진로를 빨리 바꿔야 한다. '학벌사회' 때문에 기타대학에 간다면 '대졸자'라는 간판은 땄지만 평생의 백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한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가 ‘대졸자’ 라는 딱지를 위해 그 일생을 건다는 것은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도박이다. 일단 학교를 졸업하면 성인이다. 그 젊은이가 취직을 못하니 돈을 못 벌고, 여자도 만날 수 없고, 결혼도 못한다. 평생을 백수로 늙은 부모에게 얹혀서 살수도 없다. 그럴 수 있다 해도 그 바늘방석에서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생각해 보면 그런 비극이 없다. 그러나 그 인생도 사실은 본인이 선택한 것이니 그 책임을 회피할 수도 없다. 열등감과 후회를 안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젊은이 300만이 지금 그렇게 생존하고 있다.
원칙적인 문제는 이렇다. 모든 국가는 땅과 인구에서 규모를 가진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땅 크기로는 109번째의 작은 나라이며, 인구는 5천만이다. 한 국가의 내수시장을 위한 최소한의 인구가 1억 명이다. 이 얘기는 우리의 산업규모가 지금의 수준에서 더 늘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대학문을 나서는 56만 명의 절반만 흡수할 수 있는 크기라는 의미다.
지금의 비참한 현실을 경제용어로 풀면 '수요와 공급의 문제'이며,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넘쳐나기 때문에 백수가 생기고 있으며, 이는 경제의 원칙이기도 하다. 사발크기의 그릇에 양동이의 물을 붓다보니, 담지 못하는 나머지는 쏟아진 물이 되는 법칙이기도 하다.
산업의 규모가 갑자기 늘어나는 법은 없다. 오히려 더 기계화-자동화 되며 기업은 그 속성상 인건비-임금이 싼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어있다. 그게 외국이라도 상관 안한다. 따라서 공급이 스스로 자기조절을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이 문제는 구조적이기 때문에 개선될 가망이 거의 없다. 일자리가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이며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구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점을 당사자들은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기가 처한 심각한 조건을 깨닫게 된다.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 받는다.’ 이게 체면문화의 주문(呪文-주술가가 술법을 행할 때 외는 글귀)이다. 여기에 잡히면 자칫 그 일생을 종칠 수 있다. 대학을 나와 사람대접은 받는데 그게 백수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제 정직한 질문을 하나 해 보자. ‘그렇다면 백수는 사람대접을 받는가?’ 아니라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체면이 밥을 먹여주지 못하니 말짱 헛것이다.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명분은 세웠는데 실속은 없으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애초에 기타에 속한다면, 그쪽에서 갈 길을 찾는 게 참 지혜다.
지하철 어떤 역에 작은 빵집이 하나 있는데 늘 긴 줄이 서 있고 한 사람 앞에 5개씩만 판다. 그날 준비한 재료가 바닥나면 그대로 문을 닫는다. 잠깐 지켜봐도 돈을 쓸어 담고 있다. 그 빵가게 주인은 이미 오랫동안 빵집에 근무한 경력가이며 제빵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기타대학의 길이 아닌 자기의 길을 갔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렇게 성공한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를 지금이라도 깨닫는다면 두 번째 문은 확실히 열려있는 셈이다.
시대적으로 지금과 같은 나쁜 구조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명한 부모라면, 자식이라면 제각기 자기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 모든 젊은이들에 겐 반드시 자기가 잘 하는 일이 있다. 그게 무엇이든 망설이지 말고 그 길로 나가야 한다. 체면은 좋은 것이지만 밥은 주지 않는다. 밥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건 언제나 실속이다. 자기가 잘하고 좋아 하는 분야를 찾아 바닥부터 시작하는 게 옳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현대는 기회의 시대이며 누구에게나 문은 열려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기들의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준비가 부실하면 말도 못하는 고생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게 부모도 살고 자식도 사는 길이다. 절대로 딴 길은 없다. 있었다면 백수가 이렇게 많을 리가 없다. 더 이상 체면문화의 허상을 쫓아가면 안 된다. 그건 부모, 자식 모두가 망하는 길이다. 실속을 차려야 한다. 그게 부모도 자식도 사는 길이다. 시루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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