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렌의 애가(哀歌) - 모윤숙

풍월 사선암 2019. 5. 12. 00:10

그토록 사모했던 '시몬'은 누구일까, 혹시 춘원은 아니었을까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모윤숙(1910~1990)



나는 일제하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태어날 때 이미 조선은 사라지고 일본만 있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해외에 망명 중이던 김구, 이승만과 국내에서 투쟁한 이상재,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등 애국지사들을 존경하면서 젊은 날을 보냈다. 해방이 될 때 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도 내 눈으로 지켜보았고 견디다 못해 38선을 넘어 월남하였으며 지금도 살고 있는 신촌의 이 집에서 6·25 사변을 겪었다. 조국의 현대사와 더불어 고생하며 살다가 나는 이제 나이 90이 되었다. 어찌하여 이런 불필요한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따질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이제는 몇 남지 않은 한 시대의 증인임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설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708명의 친일 인사 명단을 발표했다고 들은 지는 오래지만 들춰 볼 겨를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려고 하는 시인 모윤숙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있다고 하기에 거기에 실린 700여 명의 명단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일제시대부터 우리가 훌륭한 인물로 여겨온 많은 명사의 성함이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정부가 수립되고 반민특위가 생겨 반민족 행위자로 지목되었던 친일 인사들이 일단 고발되고 조사를 받고 구속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런 절차를 밟으며 그들이 무죄판결을 받기도 하고 사면을 받기도 하여 일단 그 업무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대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후배들이 나서서 낡은 신문과 잡지들을 뒤져가며 단 한마디라도 일본 제국주의에 유리한 말을 하였다면 사회적 신분을 따지지 않고 정죄하고 그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경솔한 처사다. 군사재판에도 피고의 최후 진술은 있게 마련인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한마디 해명도 들어 보지 않고 민족 반역자로 몰아붙여도 된다는 말인가.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이 강행되던 그해,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였다. 거기서 소학교를 마치고 함흥에 가서 성장하였으며 그 뒤 개성에 있던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에 이화여전 문과에 들어가 3년 뒤 졸업하였다. 모윤숙은 만주 북간도 용정에 있는 명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고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1년 잡지 '동광''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 발표하여 문단에 이름을 올렸고 그 뒤에 서울에 돌아와 배화여고의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어떤 분의 주선으로 철학박사 안호상과 결혼을 하였으나 곧 그만뒀다. '결혼과 동시에 이혼'이라는 표현도 지나친 말이 아닐 텐데, 신랑에 대하여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그 남편이 결코 이상적 남성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모윤숙은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강한 여성이어서 남북한 동시선거를 꿈꾸던 UN이 메논을 단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서울에 파견했을 때 메논 단장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북의 김일성은 남북한 동시선거를 거부하였다. 부산 피란 시절에는 광복동에 '필승각'이라는 집을 마련하고 김활란과 합심하여 대한민국의 승리를 위해 외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 한 수도 모윤숙의 애국심이 아니고는 세상 빛을 볼 수 없는 걸작이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나는 죽었노라, 25세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거두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오늘도 이 시 한 수는 6·25의 경험을 가진 모든 한국인을 눈물짓게 한다.

 

꿈을 잃고 일제하에 신음하던 우리 젊은이들을 모두 감동시킨 산문시가 모윤숙의 '렌의 애가'였다. 우리는 그가 '시몬'이라고 부른 그 남성이 과연 누구일까 궁금하게 여겼다. 1937년에 모윤숙이 이 땅의 한 젊은 여성으로 그토록 사모했던 그 '시몬'은 누구일까. 혹시 춘원 이광수가 아니었을까. "시몬! /당신의 애무를 원하기보다 당신의 냉담을 동경해야 할 저입니다. 용서하세요 /그러나 당신의 빛난 혼의 광채를 벗어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알려 준 인생의 길, 진리, 평화에 대한 높은 대화들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지각없는 사람이 모윤숙에게 질문하였다. "선생님, 시몬은 누구입니까." 모윤숙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동경한 오직 한 사람의 남성이 누구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윤숙이 그 짧은 결혼 생활에서 매우 총명한 딸을 하나 낳아 아름답게 키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자상하고 다정한 어머니이기도 했다면 믿기 어렵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윤숙은 여장부였고 여걸이었고 뛰어난 시인이었고 훌륭한 어머니였다. 고혈압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소생하여 요양 중이던 모윤숙의 자택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젊은 날의 패기는 사라졌으나 80을 바라보는 노인답지 않게 그는 당당하고 엄숙한 모습의 할머니였다. 그의 밝은 미소와 통쾌한 웃음소리가 그리운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배달의 딸 시인 모윤숙.


<좌측부터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

 

- 렌의 애가(哀歌) -

 

1(第一信)

 

시몬!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나는 홀로 작은 책상을 마주 앉아 밤을 새웁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작고 큰 별들이 떨어졌다 모였다 그 찬란한 빛들이 무궁한 저편 세상에 요란히 어른거립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는 무한한 암흑 속에 꼭 파묻혔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허공중에서 마치 나는 당신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려는 듯이 조용히 꿇어앉았습니다. 광명한 밤하늘 저편으로부터 어둠을 멸하려는 순교자의 자취와 같이 당신은 지금 내 적막한 주위를 응시하고 서신 듯도 합니다.

 

이 침묵의 압박을 무엇으로 깨치리까? 밤바람이 주고 가는 멜로디가 잠깐 램프의 그늘을 흔들리게 합니다. 아직 나는 뜰 앞의 장미를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심어 주신 그 장미를! 여름 신의 애무가 있기 전에 장미는 나에게 향기를 전할 수 없을 줄 압니다. 이런 밤 장미가 용이하게 내 곁에 가까이 있다면 나는 그 숭고한 향기로 당신을 명상하기에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책을 몇 페이지 읽으려면 자연 마음이 흩어지려 합니다. 그것은 책 속에 배열해 놓은 이론보다 당신의 산 설교가 더 마음에 동경되는 까닭입니다.

 

시몬!

그러나 저는 책보다 당신을 더 동경하여서는 안 될 것을 알아요. 저 하늘에 윤회하는 성좌의 비밀을 알기 전에 당신이란 환상의 비밀을 알려고 고민함이 의롭지 못함인 줄 잘 압니다.

 

시몬!

당신의 애무를 원하기보다 당신의 냉담을 동경해야 할 저입니다. 용서하세요. 그러나 저는 당신의 빛난 혼의 광채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이 알려 준 인생의 길, 진리, 평화에 대한 높은 대화들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때로 내 생명을 장성시켜 주는 거룩한 사도이기도 합니다. 신에게 향한 이 신앙의 비애를 마음속으로부터 물리치려고 때로 노력합니다. 당신은 저에게 고독의 벗이 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감정을 초월한 곳에 우리 인생이 들여다볼 수 있는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인생을 젊음으로 사귀지 말라시던!

 

시몬!

죽음 위에 이 생명을 빛나게 조각할 수 있도록 순결한 몸과 마음으로 인생의 관문을 지나치고 싶습니다.

 

종교. 예술. 철학이 설명하는 진리의 일부분이나마 이 뇌수로 해득하여 그것으로 평생의 양식을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저의 가장 큰 욕망이요 소원이 최후입니다.

 

이 소원을 이루는 데에 당신은 큰 도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씀과 같이 저는 제 자신을 바르게 하는 데 힘쓰고 제 의무에 노력하다가 세상을 마칠 수 있도록 힘써 보오리다. 램프는 피곤한 듯 좁니다. 벌써 새로 두 시.

 

시몬!

들으세요. 성당에서 부활제의 종이 웁니다. 불안한 육체 속에 폐쇄되었던 영혼이 천성문의 암시를 기다리듯 창문 옆에 가까이 기대었습니다. 저는 오늘밤 침상으로 가기보다 저 거룩한 음향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내 운명의 암시와 함께 탁자에서 밤을 보내렵니다.

 

시몬!

당신이 좀 더 내게 가까이 계셨다면! 그리고 숭엄한 저 종소리를 함께 들으셨다면!

 

그러나 시몬!

당신은 너무 제게서 멀리멀리 계십니다. 내 창문은 너무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 새워져 있어요. 두 번째 종이 웁니다. 빈 벌판에 유랑의 나그네가 되어 가던 카츄샤의 애처로운 심정도 이 새벽종이 다시금 알려주는 애련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몬!

당신이 걸어 주시고 가신 수정 십자가를 만져 봅니다. 검은 구름이 가까운 하늘에 돌고 있습니다. 이제 창문을 닫습니다. 오늘밤 당신을 연상함으로 어두운 밤 시간을 행복으로 지냈습니다. 날이 오래지 않아 밝아올 테니 아름다운 수면으로 이 밤을 작별하소서.

 

: 모윤숙 선집. 렌의 애가 (P.9~14)


*‘(ren)’이란 아프리카 밀림지대에서 홀로 우는 새의 이름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애타는 내면을 이 새를 통하여 토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