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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법원행정처, 대법원장만 사람이냐

풍월 사선암 2018. 12. 4. 06:40

[만물상] 법원행정처

 

조선일보 이명진 논설위원 / 입력 2018.09.22 03:12

 

영장실질심사제를 놓고 법원과 검찰이 한창 대립할 때였다. 대법원에서 회의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던 검사들을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붙잡았다. '사무실에서 술 한잔 하자'는 거였다. 판사·검사 넷이 둘러앉은 탁자에 양주 두 병, 생수통이 놓였다.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 제 주량을 넘어선 검사는 희미해져가는 정신 줄 붙잡으며 간신히 적진(대법원)을 벗어났다. 담장 하나 사이 아군 진영(대검)에 들어서자마자 고꾸라졌다. 나중에 검사가 그때 일 떠올려 '술고래들'이라고 판사들 흉을 봤다.

 

행정처 판사들은 뭐든 잘했다. 야근하다 술자리로 이어져도 자세 흐트러지는 사람을 별로 못 봤다. 회식 때 행정처 판사가 음식점 종업원처럼 접시를 나르는 모습도 보았다.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마주칠 때마다 '폴더 인사'를 하는 행정처 고위 간부에게 국회의원이 "당신 법원 직원이냐?"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엄살도 섞였겠지만 검사들이 "우리 로비 능력은 판사들한테 못 미친다"고도 했다.




행정처는 법원 인사와 예산, 사법 제도 연구, 송무(訟務), 등기, 공탁 등을 담당한다. 기본적으로 재판 지원 조직이다. 유럽에선 법무부가 그 일을 하는데, 우리와 일본은 대법원 산하에 따로 조직을 뒀다. 재판뿐 아니라 행정 업무도 독립적으로 맡겨 '사법부 독립'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엔 군인이나 검사들이 10년 넘게 행정처장을 했지만 지금은 대법관이 처장을 맡고 그 밑에서 30여 판사가 근무한다.

 

그제 김명수 대법원장이 행정처를 폐지하겠다고 했다. 행정처가 관료 조직처럼 변하면서 소수 엘리트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그들만의 리그'가 됐다는 비판이 있었다. 지난해부터 불거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폐지론에 불을 붙였다. 대법원장은 행정처가 법원 위기를 불러온 문제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조직을 여럿으로 쪼개고 핵심 권한은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위원회에 넘긴다고 한다.

 

행정처 판사들이 만든 문건을 보면 납득이 안 가는 게 많다. 뛰어나다는 판사들이 굳이 이래야 했나 싶다. 그러나 재판 거래가 없었다는 것은 대법원장도, 의혹을 주장하는 판사들도 다 알고 있다. 모르는 척할 뿐이다. 법원 불신을 불러온 걸로 치면 자기 편 챙기기 코드 인사만 해온 대법원장 책임은 없나. 요즘은 재판받는 원고·피고가 판사가 어느 서클 소속인지부터 알아본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재판 거래일 수 있다. 행정처 해체를 보며 세월호 때 해경 해체가 떠오른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만물상] '대법원장만 사람이냐'

 

조선일보 이명진 논설위원 / 입력 2018.11.30 03:16

 

어느 일본 작가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사과'의 사례를 분류했다. 변명과 반론이 섞인 사과, 얼버무리는 사과, 안이한 배상을 내세우거나 잘못에 대한 처분이 없는 사과. 엉뚱한 사람에게 하는 '머리 숙이는 방향이 틀린 사과'도 있다.

 

청와대 직원들의 비위가 잇따르자 며칠 전 비서실장이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사과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께 면목 없고, 무엇보다 국민에게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청와대 직원들이 잘못했으면 대통령이 사과를 해야지 왜 사과를 받나. '무엇보다'라고는 했어도 대통령 뒷자리에 국민을 놓은 비서실장의 사과를 국민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제 행정안전부 장관과 경찰청장이 출근길 화염병 테러를 당한 대법원장에게 사과한 일을 놓고도 뒷말이 적지 않다. 장관과 청장은 테러 바로 다음 날 대법원으로 찾아갔다. 취재진 앞에서 '경호 실패'를 자책하며 연신 90도로 조아렸다. 대법원장이 "법치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라고 하자, 수사 상황을 보고하고 '가차 없이 대응하겠다'며 재발 방지 대책까지 살뜰히 챙겼다. 사과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경찰이 수수방관하는 가운데 민노총에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폭행당한 기업 임원에 대한 대접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전국에서 법치가 매일 엉망이 되는데 대법원장이 한마디 한 적이 없다. 그러다 자신이 폭력을 당하니 법치 근간이 흔들리는 걸 안 모양이다.

 

'대법원장만 사람이냐' '힘없는 국민이어서 서글프다'. 여론이 들끓자 어제 행안부 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영 개운치가 않다. 장관은 '책임을 느낀다'면서도 "처음 출동한 경찰은 4명이었는데 (폭행 현장에) 접근할 형편이 못 됐다"고 했다. "개별 사건에까지 장관이 개입한다는 오해 때문에 (직접 사과를) 못하고 있지만"이라고 토를 달았다. 변명 섞인 사과, 머리 숙이는 방향이 틀린 사과,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사과가 이런 것인가 보다.

 

정부의 최우선 임무는 국민이 안전하게 일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다. 그런데 현실에선 백주 대낮에 민노총이 조폭처럼 폭력을 휘둘러도, 회사 대표 사무실과 관공서를 제집처럼 점령해도, 일용직 노동자 일자리를 빼앗아가도 경찰이 팔짱만 끼고 있다. 기업인들은 '공포감을 느낀다'고 하고 '정권이 민노총 조폭을 비호한다'는 인식까지 퍼지고 있다. 국민을 폭력으로부터 지키지 못하고 그럴 생각도 없는 공권력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