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실수로 겪은 일이란 - 나희덕「종점 하나 전」
◀나희덕(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지금부터 살펴볼 내 실수로 겪은 일(사건)이란 대개는 내가 원인자이고 그로 하여 내가 겪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진탕 먹고 정신을 잃어서 겪게 되었던 일이나 차를 타고 졸다가 정류장을 지나쳐 되돌아오면서 겪었던 일 등은 내 실수로 겪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생에 대해 어떤 감정세계가 열었을 때는 그 감정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 일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인 제공을 하여, 내가 겪은 일로 하여, 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어떤 감정세계가 열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내게 있었던 일을 말하는 형국이 됩니다. 그래서 있었던 일 시로 쓰기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맛을 주는 서정의 영역을 엽니다. 이유는 그 일이란 것이 주로 혼자 겪은 일이고, 주로 실수(그게 부주의함에 의한 것이든 욕심에 의한 것이든 오해에 의한 것이든)와 관계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혼자 있었던 일이 생에 대한 깊은 이해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우연찮은 일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시 쓰기에서 다음 사항은 필수적입니다.
1) 실수로 겪은 일의 줄거리.
2) 그것이 불러일으킨 감정세계와 구체적인 감정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종점 하나 전 - 나희덕
집이 가까워 오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깨어 보면 늘 종점이었다.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 속을 내딛듯 골목으로 사라져 가고
한 정거장을 되짚어 돌아오던 밤길,
거기 내 어리석은 발길은 뿌리를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늘 막다른 어둠에 이르러야 했던,
그제 서야 터벅터벅 되돌아오던,
그 길의 보도블록들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그래서 길은 기우뚱거렸다
잘못 길들여진 말처럼
집을 향한 우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종점 다방의 불빛과
셔터를 내린 세탁소, 쌀집, 기름집의
작은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낮은 지붕들을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지붕들 사이로 숨은 나의 집이 보였다.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늘 타는 버스인데도 묘하게 집에 가까이 올수록 졸음이 쏟아져 깜박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렸던, 그래서 한 정거장을 되짚어 왔던 경험. 그래서 사실 쉽게 흘려 버릴 수도 있는 그런 경험인데, 시인은 그 일로부터 뭔가 의미심장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예 타자마자 잠이 들어 종점까지 왔다면 피곤해서 그랬거니 하고 말 텐데, 꼭 집에 가까이 올수록 졸음이 쏟아지고 내려야 할 곳에서 깜박 졸다가 한 정거장 더 간 종점에서 깨인다는 것이, 또 그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 묘하지 않습니까? 뭔가 내 마음을 찌릿찌릿하게 합니다. 특히 막차를 탔을 경우에는 다시 나가는 버스도 없고 해서 길을 되짚어 걸어올 때! 그런 일과 되짚어 오는 밤길의 면면이 생의 조건에 대한 어떤 암시처럼 느껴집니다. "이상하게도 - 늘 - 어리석은 발길 - 보도블록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기우뚱거렸다 - 우회 -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처럼 '이상하게도', '어리석게', '기우뚱거리는', '우회'를 조건으로 하는 길이 우리의 인생만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고 구체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실제로는 실수로 겪은 우연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생에 대한 깊은 이해를 찾아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연찮은 일이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내가 원인자인데, 내가 일을 겪으며 깨달음을 얻어낸다면 그 일은 분명히 '우연찮은' 일입니다.
- 글 / 오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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