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풍월 사선암 2018. 9. 1. 12:23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화려했던 시절도, 초라했던 시절도,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물처럼 흘러갑니다. 과거는 정말 꿈과 같습니다. 과거가 꿈과 다를 바 없다면 과거가 될 현재도 꿈과 다를 바 없는 거지요? 톨스토이가 말했습니다. 우리 생은 죽음으로 잠을 깨는 긴 꿈인지도 모른다고. 문득문득 묻습니다. 꿈같은 인생,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얼마 전 우연히 1920년대 미국이 배경인 고전 영화, '초원의 빛'을 보았습니다. 젊은 날에는 그 영화가 그리 좋은 영화인 줄 몰랐습니다. 그저 가부장적이고 청교도적인 윤리에 희생된 젊은 날의 초상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면서 온전히 함께 할 수 없음에 괴로워하는 남자와, 결혼 전에는 잘 수 없는 여인의 성적 억압이 어떤 파장을 불러오는 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만 생각했던 거지요. 그런데 그 영화를 슬픈 영화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장면의 쓸쓸함이 강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열과도 같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재회하는 사랑하는 남녀의 잔상이 너무나 인상적인데다 거기 입혀진 워즈워스의 '초원의 빛'이 매혹적이어서 언젠가는 그 영화를 찬찬히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저 문장들이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그 다음 문장이 확, 들어오네요. "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니."

 

고등학교 동창인 디니와 버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매일매일 붙어다는 그들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연인들입니다. 그런데 키스밖에 할 수 없는 것이 괴로운 버드와 청교도적 윤리 속에서 청순한 디니는, 빛이고 영광이었던 사랑이 괴로움이 되고 어두움이 되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나이가 시선을 바꾸지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장면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그 전엔 잔상으로도 남아있지 않았던 버드의 누이였습니다. 그녀는 청교도적 윤리가 엄혹했던 마을에서 한 때의 사랑이 "방탕"이 되어 "쉬운 여자"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뭇남자들의 성희롱 대상이 될 뿐 존중받지 못하는 그녀가 악에 받쳐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그녀를 그렇게 취급하는 세상에 대해 냉소와 자포자기로 저항하다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무서운 세상이었지요?

 

또 한 포인트는 디니와 버드의 부모입니다. 그 전에도 그 부모들을 보았을 텐데 어쩌면 그리 새로울 수 있는지요. 자식 교육에 올인하는 그들은 자식의 삶이 자기의 삶이 되는 우리 시대의 부모 같았습니다. 누구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버드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아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자기가 정한 기준에만 맞춰 아들에게 요구하고 아들을 압박하는 이 땅의 많은 아버지를 빼박았습니다. 아들은 숨이 막히는데 그럴수록 조급해져서 아들의 속 표정은 아랑곳없이 밀어붙이는 아버지는 아들의 울타리가 아니라 벽이지요? 심하면 절벽입니다.

 

당신은 아들을 이해하고 아들에 공감하고 아들을 믿는 아버지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기대에 맞춰 아들이 자라주기를 바라다 때때로 아들을 윽박지르고 몰아붙이는, 공감을 전혀 하지 못하면서 자식을 사랑해서 자식을 위해 돈을 버는 데 자식들이 나를 쓸쓸하게 한다고 믿는 집착의 아버지입니까?

 

버드의 아버지는 계속 예일대학을 고집하고, 디니의 어머니는 계속 바른 몸가짐을 강조합니다. 농부가 되어 디니와 살고 싶은 버드의 꿈은 명문 예일을 고집해서 도시로 나가 폼나게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로 인해 깊은 좌절을 맛보고, 청교도적 윤리를 벗어나면 주홍글씨를 입혔던 시절은 버드와 살고 싶은 디니의 꿈을 정신병원에 가둡니다.

 

모두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이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거지요? 우리 모두 좋은 인격을 갖춘 상태에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러나 아버지 때문에 괴롭고 어머니를 이기지 못해 괴롭다 해도 삶은 고스란히 ''의 몫이어서 그 괴로움을 부모 탓으로 돌리거나 사회 탓으로는 돌리는 자는 결국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법입니다. 더 이상 부모 탓 하지 않는 것이 어른의 시작이니까요.

 

부무 탓하지 않는 시기를 지나 보면 알지요? 청춘을 짓누르는 것은 바로 청춘이었다는 것을. 사랑하고 괴로워하며 열정을 앓던 시절의 청춘의 빛, 빛의 영광, 영광의 소멸, 소멸 뒤에 남는 것까지 나탈리우드가 분했던 디니의 독백처럼 젊은 날의 사랑은 우리를 휘몰아치는 소나기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삼켰던 열정의 시기를 지나 평온해진 상태에서 디니는 버드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결심합니다. 디니를 돌봐주었던 정신과 의사가 그를 사랑하냐고 묻자 디니는 버드에게 느꼈던 감정과는 다르지만,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 때 의사가 다시 묻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버드를 볼 수 있겠느냐고. 디니가 모르겠다며 머뭇거리자,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느 정도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야만 한다고, 두려움에 당당히 맞서라고 조언해줍니다. 참 좋은 의사고, 참 좋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당히 맞설 수 있지요? 초원의 빛이고, 꽃의 영광이었던 그를 잃어버린 아픔을 심장이 기억해서 그만 보면 자꾸 그 시절로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이제는 자기도, 그도 돌이킬 수 없는 곳에 서있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과거에 발목을 잡히는 거지요? 언제나 내 발목을 잡는 것은 내 과거고, 과거에 사로 잡혀 있는 내 자신입니다.

 

소화하지 못해 흘러가지 못하고 체증으로 남아있는 시절과 대면해야 하는 때가 옵니다. 디니에게 버드처럼, 버드에게 디니처럼. 대면은 그 시절 혹은 그 사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시절을, 그 사람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내 사랑이, 내 가치가, 그리고 바로 내 존재가 존중받지 못하고 존재가 죄인 양 안절부절못하거나 존중받기 위해 기를 써야만 했던 시절이 없으셨는지요? 살면서 잃어버린 것, 누리지 못한 것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면서 그를, 혹은 그 시절을 잘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거기서 누렸던 것, 배웠던 것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고, 괴롭고 아파 소화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통해 한 뼘 자란 나를 긍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과거에 끌려 다니지 않고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초원의 빛, 꽃의 영광이 남긴 오묘한 힘을 이해하는 것이겠지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하지 마라!

 

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