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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관련]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 초청강연

풍월 사선암 2018. 8. 4. 10:11

[한일회담 관련]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 초청강연


일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사장 겸 주필 와타나베 스네오(渡邊恒雄))은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인 2005. 6金鍾泌 전 국무총리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를 함께 초청하여 한일 간의 어제와 오늘제목의 강연회를 개최했다.

 

다음은 2005. 6.3 일본 경단연(經團連)회관에서 일본의 정·재계 인사, 언론사 대표 등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행한 전 총리의 강연문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이 강연 전문을 6.11일자로 보도했다.


JP(왼쪽)1962년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한일 국교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귀국해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을 만나고 있다. 대일 굴욕 협상 파문으로 결국 ‘2차 외유를 떠나야 했다.


존경하는 나카소네(中曾根) 총리 

와타나베(渡邊) 사장, 

그리고 내외 귀빈 여러분,

 

금년은 1965년 일본이 한국과 보호조약(保護條約)을 맺은 지 100, 2차 세계대전이 종전(終戰)된지 60, 그리고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 한일 국교정상화에 일조(一助)를 했던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과의 상관관계도 언급하고자 합니다. 물론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제와 오늘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육사(陸士) 동기생 약 40%1950년의 한국전쟁 때 잃은 전중세대(戰中世代)입니다. 우리 육사 전우들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毛澤東)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한국전쟁 때 소대장·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우리들은, 후손들에게 더 이상 분단과 가난과 예속의 짐을 물려줄 수 없다고 다짐하면서, 국가개조(國家改造)의 꿈을 안고서 朴正熙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고 1961516일 군사혁명을 일으켜 산업화와 민주화를 핵심으로 한 조국근대화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전중세대(戰中世代)로부터 근대화의 성공이란 유산을 이어받은 오늘의 젊은 세대는 한반도의 자유통일과 국가선진화로 나아가는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21세기 어느 시기에 한반도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치(旗幟)아래 통일된 인구 7천만 명의 선진국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올해 해방 60년을 맞은 한국의 번영은 1953년의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한미안보동맹과 1965년의 수교(修交)에 의한 한일우호관계를 토대로 하여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분단으로 사실상 섬이 되어 대륙과 단절되었지만, 더 넓은 자유진영과 해양문화권(海洋文化圈)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을 한반도의 중간선(中間線)에서 막아내고 일본의 안전과 번영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것입니다.

 

저는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에 관계하여 40년 전 오히라(大平) 당시 외상(外相)과 함께 -오히라 메모라고 불리는 합의를 했었습니다.

 

그즈음 제가 만났던 일본의 지도자들도 태평양전쟁을 경험한 전중세대였습니다.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양국의 전중세대는 두 나라 사이에 건설적인 협력관계를 정립함으로써,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여 후손에게는 반드시 항구적인 번영의 유산을 물려주자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우리 두 이웃나라는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빈번한 문화적, 인적교류을 통해서 동양문명의 일원이 되어 세계사에 남을 만한 창조와 건설의 업적을 이루었습니다만, 침략과 지배, 전쟁과 반목(反目)의 시기도 길었습니다.

 

1965년 한일수교(韓日修交)로 시작된 새로운 40년은 양국 간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협력기(協力期)였다고 평가될 것입니다. 그 성공의 가장 확실한 물증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나게 확대된 양국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졌던 1965년 양국의 상호방문자는 연간 1만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작년 양국 간 상호방문자는 하루에 1만 명을 넘어 섰습니다. 올해는 양국 방문자 수가 5백만 명을 돌파할 것입니다.

 

양국 무역규모는 작년에 678억 달러에 이르렀고 일본은 244억 달러의 대한(對韓) 무역흑자를 가록했습니다. 한국에 있어서 일본은 제1의 수입국이고 제3의 수출국입니다. 또한 지금 일본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되고 한국의 배우(俳優)가 일본에서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시마네현()다케시마(竹島, 독도)의 날 조례(條例)’ 제정으로 비롯된 양국 사이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지난 40년간 착실하게 성장한 양국 국민들 사이의 교류와 협력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반일시위(反日示威)가 일어나고 있던 지난 상반기의 관광통계에 따르면, 일본인 입국자 수는 줄기는커녕 전년 동기(同期)보다도 20%이상 늘었고, 일본으로 간 한국인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정부 대 정부의 관계를 뛰어넘는 이런 국민과 국민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야말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할 한일 두 나라의 공동자산입니다.

 

양국의 지도층은 정치나 외교보다도 앞서 가고 있는 두 나라 국민 사이의 경제적, 문화적, 인적인 친선협력의 바탕을 깨뜨리지 않고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국의 지도층부터 먼저 정확한 역사의식을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한다. 그런데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과거를 직시(直視)함으로써만 미래를 투시(透視)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독도문제 발신지인 일본 시네마현 이즈모 대사(出雲大社)가 모시고 있는 신() 스사노오 노마고도는 신라에서 건너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는 고대에 신라 주민들이 일본의 산음(山陰)지방에 많이 건너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백제의 고도(古都)였던 부여 출신으로서 수년 전엔 규슈의 미야자키 난코무라(南鄕村)를 방문하여 서기 663년의 백촌강(白村江)전투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족의 도래(渡來)유적지 안에 있는 백제관(百濟館)에 졸필(拙筆)을 남긴 적도 있습니다. 일본 천황께서도 자신이 백제 왕족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대에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 기술, 문화가 일본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저는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가 최근 저서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종적으로 몽골과 한국은 일본인의 본가(本家)이다. 분가(分家)인 일본인은 항상 본가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본가의 한국인은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찬란한 문명을 만든 분가 사람들의 진취성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양국민의 인종적, 지리적, 역사적 밀접성(密接性)이 그러한 상호존중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 측의 노력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올해 일본인들은 일러전쟁(日露戰爭) 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여러분의 그 승리가 식민지로 직진(直進)하는 분수령이 되었었습니다.

 

나카소네 총리께서도 최근 요미우리신문 기고문에서 지적하신대로, 일본은 이 전쟁의 승리에 취하여 명치시대(明治時代)의 신산(辛酸)을 잊고 교만해져 결국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은 일러전쟁이 끝난 5년 뒤에 일본에 합병되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倂合)한데 이어 만주로 진출하였고, 그 침략의 관성(慣性)을 통제하지 못하고 중국대륙으로까지 전선을 확대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지도부는 일러전쟁 때 자국을 지원하였던 영국, 미국과는 멀어지고 나치 독일과 파쇼 이태리와 가까워졌습니다. 이 외교의 실패는 태평양전쟁을 자초(自招)함으로써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적 규모의 패전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일본인들을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일련의 아시아 침략과정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그릇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은 아시아 최초의 자주적 근대화라는 의미가 있으나, 동시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한 일본이 제국주의 노선으로 흘러가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끼친 계기였습니다.

 

일본이 이런 실패의 길을 걷게 된 근본원인은 고대사의 기억과 문화적 본가(本家)인 한국, 중국에 대한 가치를 잊어버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이 아시아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던 한국의 이해를 얻지 못한다면 아시아와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 것이며, 국제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오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웃나라의 존중도 받지 못하는 국가가 어떻게 세계의 지도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의 일부 인사들은 일본의 한반도와 만주 지배가 불가피했다는 이유로서 조선과 만주가 일본의 생명선(生命線)’이었다느니, 조선에 대한 개입이 청()으로부터 한국을 독립시켜 주려는 의도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고, 이웃나라의 내정(內政)에 부당하게 간섭해도 무방하다는 이런 생각은 바로 가해자의 논리입니다.

 

식민지배와 침략행위로 해서 피해를 입은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이런 식의 변명은 아픈 상처를 더욱 도지게 할 뿐입니다. ‘일본의 생명선이란 관념 때문에 왜 이웃국민들이 죽어가야 하며 왜 국가의 자주성을 빼앗겨야 합니까?

 

일본은 외부의 지배와 침략을 당해본 경험이 드물기 때문에, 특히 지도층 인사들은 강자, 지배자, 가해자의 시각과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각은 일본이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고 지도적 역할을 짊어지는데 있어서 큰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四鄕隆盛)는 여러분의 영웅이겠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침략의 발상자(發想者), 즉 정한론자(征韓論者)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과 아시아 국가 사이엔 국경을 넘으면 영웅이 역도(逆徒)가 되고 역도가 영웅이 되는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오래 전 한국기자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손자를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이 손자는 한국기자에게 지금도 서울 남산에 박문사(博文寺)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박문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이토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절입니다. 이 절은 해방 직후 파괴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에겐 명치(明治)의 원훈(元勳)이지만, 한국인에겐 침략의 원흉(元兇)으로 불립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해방 뒤까지도 한국인의 추모를 받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있다면, 일본의 가혹한 한반도 통치를 상기시켜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써 한국인들이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성()을 빼앗아 갔고, 한글을 못 쓰게 함으로써 민족의 혼을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많은 일본인들은 우리는 과거사(過去事)에 대해 이미 사과할 만큼 했지 않은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천황과 총리의 사과에 대해서는 평가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회수(回數)가 많았던 소위 망언(妄言)시리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총론은 사과, 각론은 변명이란 것이 한국인의 느낌입니다.

 

나카소네 총리께서는 1986년에 후지오 문부상(文部相)이 한일합병(韓日合倂)을 옹호하자 그를 파면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천황과 총리 등의 진실된 사과를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일부 지도층 인사들의 발언이 계속되는 한, 진정한 한일협력은 어려울 것입니다.

 

후지오 문부상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다 해도 러시아가 결국은 한국에 손을 댔을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는 침략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변했던 것입니다.

 


올해는 마침 고종(高宗)의 황후인 민비(閔妃)가 일본의 미우라(三浦梧口) 공사 일당에 의해 참살된 지 110년이 되는 해입니다. 미우라 공사의 지휘 하에 일본 폭도들은 왕궁으로 쳐들어가 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습니다. 한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흉포함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는 민비 살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침략외교에도 없었던 포학(暴虐)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은 반일투쟁이 민중 속으로 확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본의 황거(皇居)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시면 한국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역사적 분노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날 민비 시해(弑害)에 가담했던 일본인의 후손들이 한국을 찾아와서 민비 묘소에 참배하여 눈물을 뿌리며 사죄하는 것을 볼 때 일본인의 양식(良識)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는데, 일본의 일부 지도자들이 계속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하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과거 100년을 뒤돌아보면 한일 양국은 상극(相剋)의 역사에서 시작하였지만 1965년의 한일수교를 계기로 하여 갈등하면서도 상생(相生)하는 단계로 발전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주도하였던 朴正熙 대통령과 저는 한국이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군사적 외교적으로도 자립· 자주하는 나라로 우뚝 서는 것이 대등하고 생산적인 한일관계를 지속시키는 열쇠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국내외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우선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결국은 튼튼한 안보를 뒷받침했고 민주화의 토양을 마련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은 북한에 대해서 결정적 우위에 서게 되었고, 마침내 북한의 지원세력이던 소련 공산제국도 결국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1965년의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극빈국(極貧國)이었으나. 오늘날의 한국은 GDP 기준으로 세계 11위의 경제규모, 연간 25백억 달러를 수출하는 세계 12위의 무역강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국민들의 희생적인 합심 노력으로 곧 재기하여 지금은 외환보유고가 2천억 달러를 상회하는 세계 제5위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朴正熙 대통령이 오일쇼크를 극복하면서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던 중화학공업화 전략이 성공하여, 지금 한국은 첨단정보산업 부문에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반도체 D램 생산량, 선박 건조량(建造量), 초고속 인터넷 가입비율은 세계 제1, 인터넷 이용률은 세계 제2, 전자제품 생산량은 세계 제3, 철강 생산량은 세계 제5, 자동차 생산량과 국가정보화지수는 세계 제6, PC 보급대수는 세계 제8위에 도달하였습니다.

 

이런 경제적 성취와 함께 한국은 정치적 자유부문, 국가의 투명성, 삶의 질 부문에서도 선진국 수준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미 일류 수준으로 진입한 경제· 과학· 군사부문에 이어서 정치적 정신적 부문의 선진화까지 이룩함으로써, 일본에 이어 비()서구국가로서는 두 번째로 세계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한국인 모두의 비전이 되고 있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이 이룩한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 등소평(鄧小平)의 중국 개방정책과 함께 아시아의 3대 성공사례로 꼽힐 것입니다.

 

· · 중의 이 성공적 개혁은 이 세 나라의 지도층이 서구에서 발전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무조건적 수용을 거부하고 동도서기(東道西器), 또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철학으로써 선진문물을 동양의 토양 속에서 주체적으로 소화시키고 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춘추시대 제()나라 관중(管仲)에서 시작되는 이러한 동양적 실용정치의 사상은 놀라운 합리성과 과학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미래에도 유효한 동북아의 위대한 정신적 자산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김정일 정권만은 지금도 실패한 공산주의를 교조적(敎條的)으로, 또 사대적(事大的)으로 수용하여 전제적(專制的) 후진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주민들을 굶기고 핵무기를 강행함으로써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유지되면 동북아에서 평화가 보전되어 활발한 교류 하에 문화와 예술이 꽃 핀다는 역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7세기 말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와 임신(壬申)의 난()을 통해 집권한 천무(天武) 천황 하의 일본은 과거의 적대관계를 버리고 긴밀하게 교류하였습니다. 일본이 대보율령(大寶律令)을 반포하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데는 먼저 고대국가를 완성했던 신라로부터 배운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한반도가 분열되거나 취약해지면 주변국의 개입과 침략을 불러 한반도가 국제전장(國際戰場)이 되고 동북아에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을 한국전쟁과 일러전쟁 등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이 자유진영의 전초기지이자 일본안보의 방파제(防波堤) 역할을 했던 60년 동안 한국의 발전에는 일본의 효과적인 협력이 있었습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의한 대일(對日) 청구권자금 8억 달러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한국의 기간산업(基幹産業)과 인프라 건설에 투입되었으며, 일본 기업으로부터 들여온 선진기술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조력(助力)이 되었습니다.

 

포항제철의 경우 초기에 투자된 약 13천만 달러의 청구권자금은 민족적 혈채(血債)’로 불리면서 이 회사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인하여 양국 사이의 무역량도 늘었고 일본은 큰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한일관계는 시혜(施惠)니 종속이니 하는 일방적 낱말로서는 설명될 수 없는 양면성을 띠게 되었고, 결국은 양국의 상호이익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에 이어 중국이 놀라운 고도성장을 계속하면서, 이제 동북아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이 되었습니다. 구매력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 일본· 중국 이 세 나라의 국민총생산은 약 12조 달러에 달해 11조 달러의 미국을 능가하게 된 것입니다. ·(日中) 무역액은 약 2천억 달러로서 사상 최초로 일·(日美) 무역액을 앞질렀습니다. ·중 무역액도 794억 달러에 달해 한미 무역액을 초과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일본은 250억 달러의 대중(對中) 무역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미국도 중국에 대해서 1,650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보았습니다. 한편 한국은 중국에 대해서 약 2백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일본에 대해서는 240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한··중 아시아 3국은 밀접한 관계로 발전하였고, 여기에 미국을 더하면 이 4국은 일종의 태평양 4국 경제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韓美日中) 네 나라의 GDP를 합산하면 세계 전체의 반을 넘어섭니다.

 

올해 악화된 한·, ·중의 외교관계는 이렇게 밀착된 경제구조를 뛰어넘을 수 없어 그 긴장이 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중국도 연간 약 2천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자국에 선물하는 일본과 미국을 상대로 적대자세(敵對姿勢)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아시아의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작업으로 총리시절, 아시아를 위한 금융기구 즉 AMF(Asia Monetary Fund)의 창설을 제의한 바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태평양 4개국 경제공동체의 지속적 번영을 위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동북아의 한··중 세 나라의 공존공영(共存共榮)을 위해서는 반드시 미국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미국을 제외한 채 동북아의 번영과 평화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한미동맹과 일·(日美) 안보협력체제는 한반도의 통일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대전(大戰) 전의 유럽 열강들은 경제적 교류는 밀접했지만 이를 관리할 안보협의체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이란 예기치 못한 불상사(不祥事)가 발생하자,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들이 원하지 않은 전쟁에 연쇄적으로 휘말려들었던 것입니다.

 

이 교훈을 바탕으로 한···중의 태평양 4대국 사이에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기구가 존재해야 하며, 특히 국가 지도부 사이의 정기적인 대화체제가 견고하게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셋째, 지난 150년간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고 합니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이 지속되려면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가 더욱 성숙하면서, 중국의 민주화가 자리 잡고 북한의 독재정권이 변해야 합니다. 미국· 한국· 일본이 역내(域內)의 민주화를 촉구하고 이를 지원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동북아의 평화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최근 반일시위(反日示威)에 대해서 한일 양() 국민들이 여유 있는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양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반일운동은 민주주의의 원칙이 작동하는 가운데서 이뤄졌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獨島) 영유권 주장에 분노하면서도 정부의 세련되지 못한 대일정책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일 두 나라 국민들은 정부 간 외교마찰을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교류와 협력을 유지해가고 있습니다.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는 북한의 민주화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에 결정적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은 북한의 반인류(反人類), 반평화적인 도발행위입니다.

 

김정일 정권의 핵무기 개발과 인권탄압, 그리고 일본인 및 한국인 납치행위는 이 정권의 본질인 상습적 위약(違約)과 그 무법성(無法性)이 초래한 것입니다.

 

위험천만한 북핵(北核)문제는 그들이 핵개발을 파기(破棄)하는데 있습니다. 러나 김정일 정권은 그렇게 쉽사리 변질되거나 종식(終熄)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어려운 그들을 상대로 해결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해결방법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 세계의 고민이 있습니다.

 

지금 6자회담은 회담을 위한 회담에 그치고 있습니다. 핵을 무기로 세계를 가지고 놀고 있는 북한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고 대화에 의한 평화적 해결에 모두 합의했다.’라고 하는 관용구(慣用句)를 되풀이하면서, 그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허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어느 날 북한으로부터 결정적인 결단의 선택을 강요받는 사태를 자초(自招)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의 핵문제는 가능한 한 빠른 장래에 유엔 안보리로 가져가서, 국제사회가 단합하여 ()과 코란양수(兩手)로써 해결해 나가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했던 한국전쟁이 한국의 힘만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과 같이, 한반도의 통일은 한국인의 힘만으로써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반도 분단과 남북 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참화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 처리가 불러온 결과이므로 일본 측에 책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한국이 주도할 남북한 통일과정을 일본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빚을 갚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와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멸감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던 1965년에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국가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국교정상화에 일조(一助)한 사람으로서 저는 당시 국교정상화에 즈음한 朴正熙 대통령의 담화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나는 우리 국민 일부 중에 한일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低姿勢)니 심지어 매국적(賣國的)이라고까지 극언(極言)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隸屬)이 될까 걱정을 한데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은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 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야말로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한마디 밝혀둘 일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과(罪科)들이 일본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하는 대일(對日) 불신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 속에 또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 거듭 밝혀두는 바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행히도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의식은 이제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의 지도자 중에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써, 일본을 불신케 하는 발언과 행동을 끊임없이 내어놓았습니다.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일본어 사용 강요에 대한 변명, 강제 동원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의 존재에 대한 부정, 징용· 징병자들에 대한 무시, 한중 양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전범(戰犯)들의 위패(位牌)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神社)에 대한 지도부의 참배, 그리고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의 침략행위를 변명하는 교과서의 검정문제 등등 일본은 아직도 동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아물지 않고 있는 역사적 상처를 도지게 하는 언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 시마네현()다케시마의 날 조례(條例)’를 제정하여 한일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의 사려 깊은 행동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이번 교과서 검정과정에서 일본정부는 교과서 제작에 일체 간여할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공무원들이 개입하여 교과서 제작자 측이 기술한 독도가 한일 간의 분쟁지역이란 표현을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식으로 바꾸도록 했다는 말도 들었지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도문제를 깊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몇 가지 지적해 두고자 합니다.

 

일본이 1905년에 와서 이 섬을 자국(自國)의 영토에 편입했다는 주장은 다시 말해 그 전에는 일본영토가 아니었다는 자백에 다름 아닙니다. 일본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역사란 것은 1905년 이후를 말합니다.

 

한국은 6세기 신라 때부터 독도를 영유, 관리했기 때문에 별도로 영토편입을 선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쓰다가 개척정책으로 바꾼 1900년에 대한제국은 칙령(勅令) 41호로써 독도(당시 명칭은 석도(石島))를 울릉군수의 관할범위로 명시하였습니다. 일본의 영토편입 조치보다도 5이나 빨랐습니다. 이에 따라 1906년에 일본의 시마네현 측이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통보해 왔을 때 대한제국은 이 칙령에 따라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備邊司) 등록(謄錄)과 같은 국가 공문서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명기되어 있고, 관찬(官撰) 영토지도에도 나타납니다. 1877년 일본 명치(明治)정부 태정관(太政官) 문서의 기록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또는 일본영토 이외의 지역으로 적혀 있습니다. 일본의 관찬(官撰) 영토지도에서도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일본이 일러전쟁 중에 독도를 빼앗아간 것은 5년 뒤 완결되는 한일합병의 첫 조치였습니다. 일본은 일러전쟁을 개전(開戰)하지말자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외교권을 박탈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시킨 행위는 한반도 병합의 일환이었다고 한국은 이해합니다.

 

따라서 일본이 독도영유권(獨島永有權)을 제기하면 할수록 한국인들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불행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독도의 한국 영유(永有)는 이처럼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문헌적으로 확실합니다. 일본은 한국과 전쟁을 하지 않는 한,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빼앗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이 한일친선에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또 일본의 국가이익에 무엇이 합치되는 것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일본의 국가이익을 생각하고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지도자가 있다면, 독도영유권 주장을 포기함으로써 한국인들의 불신감을 씻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지금처럼 미해결(未解決)로 놓아두는 것이 차선(次善)의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저는 2001년 한일 양국정상회담에서 합의하여 양국 학자들 사이에서 진행 중인 역사 공동연구가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기간 내의 합의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이런 대화의 지속 자체가 양국 간의 이견(異見)을 좁히고 역사관을 공유시켜 가는데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저는 야스쿠니 신사(神社)에 안치된 태평양전쟁 전범(戰犯)의 위패(位牌)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을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요인들은 전범들에 대한 참배가 아니고 애국자들에 대한 참배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전범들의 위패를 분리하여 다른 곳에 수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날 일본이 전시 총동원체제를 강화하면서 한국인에 대해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징용· 징병, 그리고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 동원 등이 조선인들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하는 것보다도 더 지독한 모욕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젊었을 때 저의 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조선 농촌의 가난한 처녀들이 일본의 공장에서 일한다는 말에 속아서 끌려간 뒤에 종군위안부가 되어 돌아왔다가 가문(家門)에서 버림받은 실화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德)라는 전사(戰史)작가가 쓴 책에도 조선인 출신의 종군위안부들이 뉴기니아까지 끌려갔다가 죽어가는 대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과 중국은,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먼저 근대화했던 일본인들의 우월감과 자존심을 만족케 했던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과 대등한 좌표에 위치하여 일본을 대하게 이른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나폴레옹의 침공, 보불전쟁(普佛戰爭), 1· 2차대전 등 네 차례의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舊怨)을 넘어서 화해 협력하여 EU의 경제권에서 번영을 함께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일본은 문록경장(文祿慶長)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고통을 한국인들로 하여금 잊게 해줘야 합니다.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을 일본은 성의껏 협조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에 영원한 평화와 번영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할 것입니다.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을 여행한 서양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은 부드럽고 겸양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의 일본인에 대해서도 외국인들이 이런 인상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이 먼저 주변국들을 대하는 자세부터가 부드럽고 겸양하며 여유 있는 모습이어야 할 것이고, 이런 노력은 여러분을 존경받는 세계인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19458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이후 북한에서는 잔류(殘留) 일본인들에 대해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북한과는 반대로 이들을 평온무사(平穩無事)하게 귀국시켰습니다. 이러한 남과 북을 비교하면서 일본국민 여러분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류작가 후지와라 데이의 흐르는 별은 살아있다.’라는 소설 속에 당시 남북한의 현황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일독(一讀)해 보십시오.

 


관동(關東) 대지진 때 재일(在日) 한국인들이 당했던 일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최근 문예춘추(文藝春秋) 6월호에 어느 정치인이 한 말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센가쿠 열도(尖閣列島)에 자위대(自衛隊)를 상주시켜야 하며 중국에 대한 분열정책을 써야 하고, 중국인의 DNA 속에는 돈 숭배사상밖에 없다고 극언(極言)하면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나는 금후(今後)에도 중국인들이 싫어하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할 것이고, 그리하여 악명 높은 일본인의 역할을 오히려 명예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문예춘추의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후보 제1위로 뽑혔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우여곡절(迂餘曲折)과 기복(起伏)도 많았지만 이 세상은 나쁜 사람들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아서인지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지는 발전의 도정(途程)을 걸어 왔습니다. 특히 여기서 다 거명(擧名)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본의 양식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저 자신의 삶에서 보람도 있었습니다.

 


오늘 저에게 이런 발언의 기회를 주신 주최 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와 같은 전중세대(戰中世代)는 거의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였습니다. 넘어야할 고지는 아직도 많이 있으나 그 일은 저와 같은 노병(老兵)의 임무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남은 생애 중에 우리가 졌던 역사의 짐을 다음 세대에게는 넘기지 않도록 저의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여러분, 한일(韓日) 일한(日韓) 양국이 영구히 변함없는 우정과 협력과 평화와 번영이 함께하는 장래를 약속할 수 있도록 노력과 전진을 계속하지 않겠습니까?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623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별세했다.

현대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