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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환 MBC 보도본부장, "6.25 때 인민군의 반동처형과 지금의 적폐청산"

풍월 사선암 2017. 11. 11. 05:42

오정환 MBC 보도본부장, "6.25 때 인민군의 반동처형과 지금의 적폐청산"

 

온라인서 뜨거운 반응 "끌려나가 짓밟히더라도 생물학적인 생명만 붙어있으면 부정한 저들에 맞설 것" 다짐


| 오정환 MBC보도본부장


MBC 오정환 보도본부장이 쓴 글 한편이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급속히 퍼지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오정환 본부장은 지난 8월에도 MBC 기자·PD 200여명이 공정방송과 경영진의 사퇴를 요구하며 제작을 거부했을 때 "지금의 경영진은 그런 압력으로 물러나지 않는다""사내 특정단체는 외부세력과 정치권력의 지원 속에 분규를 일으켜 회사업무를 마비시키면 경영진이 무너질 것으로 조직원들을 설득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오 본부장은 "지난 1988년 노조원들이 사장실에 들어가 끌어낸다고 김영수 사장이 사퇴하지 않았다면 MBC의 운명도 지금과 달랐을 것"이라며 "끌려나가 짓밟히더라도 생물학적인 생명만 붙어있으면 부정한 저들에 맞설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 오 본부장의 글 전문을 소개한다.


20179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에서 노조원들이 총파업 출정식을 갖고 있다./ 조선DB

 

제 할아버지는 반동이었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반동분자였습니다. 과수원집 아들이고 교사이며 조만식 선생의 조선민주당 당원이었으니 공산주의자들 기준으로는 죽어야 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내무서원들은 할아버지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하고 목숨이 거의 끊어지게 되자 손수레에 가마니를 씌워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혐의를 씌워 수사를 가장했지만 의도는 살인이었습니다. 그래도 제 할아버지는 모질게 살아남아 월남하셨고 당신을 핍박하던 체제의 추락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7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야만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 믿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저와 동료들을 적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청산하겠다고도 감옥에 보내겠다고도 위협했습니다.

 

적폐라는 단어를 공들여 골랐겠지만, 제게는 그 옛날 할아버지를 옥죄었던 반동이라는 말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해방 후 북한 주민들을 숨죽이게 만들었던 반동 숙청은 권력을 등에 업은 횡포, 표적 사찰, 거리낌 없는 폭력, 생존권마저 박탈하려는 적개심, 법치주의 무시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한 조롱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제 곁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적폐 청산에서 저는 이 가운데 아닌 것을 고르기가 힘이 듭니다.

 

정권은 노동부 감독과 검찰 수사의 형식으로 회사 경영진을 쑤셔댔습니다. 노조 간부는 방문진 이사의 뒷조사를 하며 폭로를 막으려면 사퇴하라고 협박했습니다. 정권과 노조의 MBC 장악은 그런 과정을 거쳐 이제 막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이 극악스럽습니다. 노조가 파업을 마치고 복귀하면 현재 간부진을 무시하고 별도의 지휘체계를 만들려 한다는 말이 나돕니다. 법률과 사규를 모두 짓밟고 노조가 회사를 직접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러시아 혁명 직후의 직장 소비에트나 조폭이 업소를 접수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좌파는 법을 어겨도 된다고 믿는다면 이를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명백한 업무방해임에도 불구하고, 법집행기관들이 노조의 폭력을 감싸주는 느낌이 드는 시대라 그렇습니다.

 

파업불참자들을 특정 부서에 몰아넣은 뒤 온갖 수모를 주고 인사고과를 나쁘게 평정해 해고하려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과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설치한 부서들을 모조리 노조 탄압용이라며 없앤다 하니 회사 미래가 걱정이지만, 무소불위의 정권을 등에 업고 벌이는 일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 파업이 시작되자 원래 놀던 사람들이 정의를 위해 놀게 됐다는 우스개 소리가 퍼졌듯이 노는 자들이 일하는 자들을 인사고과로 내치기가 그렇게 쉬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회사에 적폐 청산 위원회를 만들어 눈엣가시 같던 사람들을 처벌할 거라는 말도 있습니다. 6.25 때 인민군이 들어간 지역마다 인민위원회를 설치해 반혁명 세력의 색출, 인민재판과 즉결 처분, 집단 처형 등을 수행했다는 역사가 떠오릅니다. 아마도 적지 않은 회사 간부들의 잘못을 찾아내거나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위해를 가할 것으로 우려됩니다. 나는 누구처럼 작가를 성희롱하지 않았다, 누구처럼 해외출장에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누구처럼 굴착기 기사 머리를 소주병으로 가볍게친 적이 없다, 누구처럼 근무시간 중에 몰래 집에 가지 않았다고 항변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원이 지난 수년간 MBC 관련 징계무효소송에서 취했던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면, 부당한 처분은 언젠가 시정될 것으로 믿습니다.

 

공포와 인권유린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미래를 가늠하기 힘듭니다. 법의 이름으로 정적의 씨를 말리고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거리로 내모는 이른바 적폐 청산이 언제쯤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모든 언론이 입을 모아 정권을 찬양하고 권력자를 비판하려면 뒤를 돌아봐야 하는 사회가 있을까 정말 두렵습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아직은 희망의 불씨가 살아있다고 믿습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이고 북한은 항일투쟁에서 기원하는 민족주의 정통성을 갖은 나라라고 믿는 좌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 선배들은 피를 흘리고 목숨을 던졌습니다. 그러한 좌파의 모순 속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고 믿습니다.

 

2012년 파업이 끝난 뒤 벌어진 집단 만행에 차라리 죽고 싶다고 오열했던 경력사원들처럼 지금 많은 동료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립됐던 그때와는 달라야 합니다. 연대하고 저항하고 폭로합시다. 그리고 아직은 세상 전체가 시대를 퇴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등록일 : 2017-11-10 10:40 | 수정일 : 2017-11-10 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