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redible India, 깊이와 폭, 스케일과 정교함
인도의 건축과 예술은 스케일과 정교함을 겸하고 있다. 거대한 인구와 엄청난 생산성에서 나온 國力의 뒷받침이 있었고, 다양한 종교의 열정과 집념이 건축과 예술에 투입되었으며,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과학과 기술이 있었다.
매년 네덜란드만한 인구가 늘고 10년마다 멕시코 규모의 인구가 더해지는 나라,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자이나교 시크교가 공존하는 세계 최대의 민주국가. 가이드는 "알함브라 같은 궁전은 400개나 있다"고 말한다. 스케일과 정교함, 다양성과 깊이, 세속과 정신이 융화된 인도는 대리석과 砂岩(사암)의 건축문화 대국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탈리아가 세계문화유산 최다보유국이지만 종국엔 인도가 1등이 될 것이다. 수십년 안에 인도는 중국을 젖히고 인구 1등이 된다. 젊은 인구가 많고 학생이 6억이나 되어 생산성이 높은 인구구조이다. 인도는 수학 종교 철학의 나라이다. 생각을 많이 깊게 히는 습관이 붙었다. IT의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인도인이 앞서 가는 이유이다.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오토릭스로 불리는 3륜 택시가 질주하는 인도 라자스탄 주의 조드푸르 시장통. 차량과 인파와 동물들이 뒤섞인 거리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이런 택시를 타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동이다.
인도는 면적이 약330만 평방킬로미터로서 남한의 약33배이다. 인구는 약12억4000만 명, 남한의 약24배이다. 인도 國土의 약52.5%는 耕作 가능 農地이다. 이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든다. 유럽의 穀倉(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와 비슷하다. 한국은 경작 면적 비율이 약16%, 이란은 약11%이다. 서구의 농업대국 프랑스는 33.4%. 인도 간지스 강 流域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토질에 생산성이 높다.
인도의 구매력 기준 GDP는 약5조 달러로서 한국의 약3배이며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약4000달러, 한국의 8분의 1이다. 인구 구조를 보면 젊고, 학생수가 많아(6억) 잠재적 생산성이 높은 편이다. 핵 및 항공모함 보유국이다.
매년 약1500만의 인구가 늘어난다. 네덜란드(인구 약1600만) 같은 나라가 매년 하나씩 생기는 셈이다. 몇십 년 안으로 중국을 앞서 세계 1등 인구 大國이 된다. 영국이 다스렸던 舊인도는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포괄한다. 이 3국의 인구를 합치면 16억을 넘는다. 1700년 인도를 통치하던 무갈 제국의 인구가 약1억5000만 명이었다. 당시 淸의 인구는 약1억2000만 명. 예나 지금이나 인도 주변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 그것도 인종과 종교를 달리하는 이들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 및 시크교 등 여러 종교와 철학과 수학이 발달하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종교 철학 수학의 공통점은 생각이다. 생각을 깊게 하는 곳이 인도이다. 인도 여행을 하면 극단적인 가난과 극단적인 사치, 극단적인 紀律과 극단적인 향락, 극단적인 평등과 극단적인 차별, 그 차별 속의 공존을 만나면서 생각이 깊어진다.
1. 인도의 국가적 민족적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큰 변수는 약80%의 인구가 믿는 힌두교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간의 본능에 대한 억압이 적다. 기독교, 유교, 회교엔 禁忌가 많은데 이 종교에선 그게 적다. 이런 포용적 생각은 경제 건설보다는 민주주의 발전에 더 적합한 면이 있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국가이다. 미국 인구의 약4배이고, 인종적, 계층적, 지역적 갈등과 지도자 암살 및 대사고가 끊이지 않는 속에서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여 간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2. 인도의 건축물은 石造가 많다. 그리스 로마가 대리석 문화라면 인도는 砂岩(사암)이다. 황토색이 도는 사암으로 된 성, 궁전, 모스크, 寺院, 탑, 미나렛 등이 파아란 하늘과 대조를 이룬다. 石造 건물이 많아 보존이 잘 되어 있다.
3. 3500년 전 인도의 원주민(드라비다 인)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北인도를 차지한 이후 인도 역사의 주도권을 잡은 인도-아리안 족은 유럽의 主流 인종인 게르만 족과 親緣性이 있다. 인도는, 오래 된 인더스, 간지스 문명을 품고 서쪽의 페르샤 문명과 교류하였으며, 기원 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 이후엔 그리스-로마-비잔틴-이슬람 세계와 섞이면서 세계사의 흐름에 동참하였다. 1492년, 콜럼부스가 인도 航路를 찾기 위하여 항해하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듯이 인도는 늘 유럽 문명과 연결되어 있었다.
4. 기원 전 3세기, 불교를 진흥시킨 아쇼카 大王, 16~17세기 힌두교와 이슬람을 다 포용하여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룬 아크발 大帝가 4000년에 걸친 인도 역사의 대표적인 영웅이다. 인도도 중국처럼 북방에서 내려온 세력, 즉 아리안 족, 알렉산더 대왕, 이슬람 세력, 투르크 계통의 노예왕조, 징기스칸 기마군단, 무갈제국(투르크 계통의 이슬람 戰士들)에 의하여 정복되었으나 힌두교를 핵심으로 하는 인도문화는 정복되지 않고 오히려 이들 외부세력을 동화시켜 오늘의 주인공이 되었다.
5. 무갈제국 시대와 영국 통치 시절에도 인도에는 수백 개의 지방 왕국이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存續하였다. 이들 王權이 경쟁적으로 세운 성과 궁전 및 사원이 많다. 중앙집권적 권력이 강하고 지방 사이의 경쟁이 약했던 중국에 비교하여 더 찬란하고 다양한 건축물들이 남았다.
6. 인도의 건축과 예술은 스케일과 정교함을 겸하고 있다. 거대한 인구와 엄청난 생산성에서 나온 國力의 뒷받침이 있었고, 다양한 종교의 열정과 집념이 건축과 예술에 투입되었으며,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과학과 기술이 있었다.
7. 인도는 그동안 세계문화유산 등재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등재 대상이 될 수 없는 개인 소유의 城과 궁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올리기 시작하면 종국엔 인도가 중국을 누르고(현재는 이탈리아가 最多 보유국) 1등이 될 가능성이 높다.
(좌)궁전 벽의 정교한 문양. 인도 건축물은 스케일과 예술성을 겸했다.(우)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 성은 무갈-라자스탄 혼합건축양식이다.
(좌)인도 서부 라자스탄 주의 조드푸르에 있는 메헤랑가르 성. 궁전을 겸했다. 수백 개나 되었던 인도 지방왕국의 궁전이 유럽의 왕국 궁전처럼 거창하고 아름답다. (우)砂岩으로 된 거대한 성채의 높이는 70m. 메헤랑가르 성의 돌출부 건축기술은 불가사의하다.
(좌)쿠툽 미나르 승전탑 부근은 이슬람, 힌두교 複合建物群이다. 투르크 계 戰士집단이 세운 노예왕조가 건설한 인도 최초의 이슬람 모스크와 4세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7m 높이의 鐵棒(철봉)도 있다. 요사이 製鐵 기술로도 만들기 어려운, 굉장히 높은 純度를 가진 쇠막대기가 어떻게 썩지 않고 내려왔는지 미스터리이다. (우)인도 서부 라자스탄 주의 조드푸르에 있는 메헤랑가르 성. 궁전을 겸했다. 수백 개나 되었던 인도 지방왕국의 궁전이 유럽의 왕국 궁전처럼 거창하고 아름답다.
(좌)人波가 몰린 타지마할. 무갈제국의 샤자한 황제가 아이를 낳다가 일찍 죽은 아내를 위하여 지은 무덤. 1632년에 착공, 20년 만에, 페르샤 기술자가 중심이 되어 半투명 대리석을 사용, 완성한 寶石 같은 건물이다. 철저하게 대칭이다. 네 개의 미나렛(탑)은 넘어질 때를 대비하여 바깥으로 약간 기울게 세웠다. 샤자한은 이 건물을 완성한 직후 아들(아우랑제브)의 쿠데타로 인근 아그라 성의 한 방에 유폐되었다. 7년간 창 너머로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어 아내 옆에 묻혔다. 거창하고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의 결과로 지금 인도인들은 많은 관광수입을 올린다. 예술적 건축은 당대엔 낭비 같지만 길게 봐야 한다. (우) 인도는 건물 사람 역사가 colorful.
(좌)인도인의 정신적 고향 바라나시의 아침. 화장을 하고 뼈가루는 강에 버린다. 간지스 강가는 생명과 죽음의 공존터이다. (우)아그라의 호텔 옥상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17세기 무갈 건축의 걸작이자 최고의 호화분묘이다.
(좌)인도 카주라호의 힌두교 사원.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11세기 작품. 모래돌로 만들었다. 에로틱한 조각으로 둘렀다. 이런 사원이 수십 개다. (우)인도 올차에 있는 무갈시대의 분델라 왕국 궁전. 자항길 궁전으로도 불린다. 1600년대에 건축되었다. 사암으로 만들어진 6층 건물이다. 페르샤식, 이슬람식, 힌두식이 혼합된 무갈건축은 장중하면서도 풍성한 느낌을 준다.
(좌)인도 기차역의 짐꾼 (우)구걸하는 가족
(좌)인도 올차 무갈시대 궁전의 창문장식. 돌을 깎은 것이다. (우)암베르 궁전 천장의 내부 장식. 페르샤-이슬람 식 紋樣(문양)이다.
*印度엔 人道가 없다.
인도(印度, India)엔 人道(인도)가 없다. 대부분 대도시의 大路(대로)에도 인도가 없다. 어제 찾은 간지스 강가의 힌두교 성지인, 인구 150만 명의 바라나시(Varanasi)도 그랬다.
車道(차도)엔 중앙선만 있고 신호등도, 차선도, 횡단보도도 없다. 포장된 공간일 뿐이다. 이곳으로 인파가 쏟아져 들어온다. 사람, 자전거, 오토바이, 인력거, 소, 개가 뒤범벅이다. ‘빵- 빵- 빵-’ 하는 소음은 충돌을 피하려는 몸부림인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길가도 인간, 동물, 기계, 상점의 공존장이다. 오늘 아침에 보니 길가에서 담요를 뒤집어쓴 사람과 소떼가 함께 자고 있었다. 인도에선 힌두교도, 이슬람신도, 기독교도, 불교도, 시크교도가 공존할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도 같이 산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도 심하지 않다. 북새통 속에서 인구 13억이 세계 최대의 민주국가를 유지한다. 약 80%의 힌두교가 민주주의의 핵심인 다양성과 포용력 및 관용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덕분이다.
사람, 기계, 동물로 가득 찬 바라나시의 大路를 소음 속에서 걷는 건 평생 잊을 수 없는 체험이 된다. 아수라장이 이런 곳이구나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 기적이 있다. 시끄러움 속에서 싸우는 소리가 없다. 뒤범벅된 가운데서도 사고가 거의 없다. 빵빵거리며 질주하다가도 충돌 2초 전에 서로 양보한다. 무질서 속의 질서이고 아수라장의 구원이다. 인도엔 人道가 없지만 인도인의 마음속엔 人道가 있다.
*어떻게 이슬람을 믿는 몽골系가 인도를 다스렸나?
무갈제국의 창설자 자하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483년 2월24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父系(부계)로는 티무르 大帝의 5代孫, 어머니 쪽 혈통으로는 징기스칸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는 투르크語와 페르시아語를 배웠고 戰時(전시)에도 詩를 지었으며 감동적인 회고록을 남겼다.
11세에 왕이 된 그는 20代에 지금의 우즈벡을 통일하여 티무르 제국을 회복하려다가 우즈벡族에게 쫓겨 아프가니스탄으로 피해 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만2000명의 기병이 그를 따랐다. 카불에 본거지를 구축한 그는 북쪽으로 재진격하여 失地(실지)를 회복하려 했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그는 고향 페르가나를 못 잊어 하였다. 땅이 비옥하여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는 곳이다.
1512년 北進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방향을 돌렸다. 지금의 파키스탄, 인도 쪽으로 南進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南征(남정)의 피날레는 1526년 4월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이때 바부르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나 전형적인 유목 기마전술에다가 총포부대를 결합시켜 10만 병력의 敵(적)을 섬멸했다. 이 전투는 인도의 역사를 바꾸었다. 몽골系 무갈제국을 탄생시킨 전투였다. 무갈은 이란어로 몽골이란 뜻이다. 바부르는 인도 북부를 점령했으나 더운 날씨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부하들도 시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페르시아式 정원을 만들어 그들이 두고 온 녹색지대를 再現(재현), 스스로를 달랬다.
이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교양 있는 영웅이었다. 47세에 죽은 그가 남긴 회고록은 솔직하고 정확하며 문학적이고 드라마틱하다. 겨울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부하들과 눈보라 속을 헤쳐 나가다가 동굴을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동굴은 너무 작았다. 나는 동굴 입구에서 삽으로 눈을 파고 앉았다. 몇 사람이 나만 동굴에 들어가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내 부하들이 눈보라를 맞고 있는데 나만 동굴에 들어가서 잔다는 것은 남자답지도, 동지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페르샤의 속담이 생각났다. '친구와 함께 하는 죽음은 축제이다.' 눈보라는 계속되었고 나의 등과 귀는 눈에 덮였다. 귀는 凍傷(동상)에 걸렸다. 이때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부하가 소리쳤다. '동굴이 아주 큽니다. 모두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눈을 털고 부하 戰士(전사)들을 불러 모아 굴 속으로 들어갔다. 40-50명이 편하게 앉을 만한 넓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식량과 휴대품을 갖고 들어왔다. 심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을 발견하다니!>
바부르(호랑이란 뜻)는 아들 후마윤이 重病(중병)으로 死境(사경)을 헤매자 매일 그 病床(병상)을 돌면서 알라神에게 “아들의 병을 저에게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소원대로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고 아들은 나았다고 한다. 2代 황제 후마윤은 아버지가 건설한 제국을 다 잃어버리고 한때는 페르시아王의 보호 속에서 延命(연명)하기도 했었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가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약 320만 평방킬로미터를 정복, 너그럽게 다스렸다. 전성기인 1700년 무갈제국의 인구는 약 1억5000만 명으로서 중국(당시 청, 1억2000만)보다 많았다. 國力과 인구 면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무갈제국의 판도를 지금에 대입하면 인구가 16억쯤 되어 역시 중국보다 많다. 무갈제국을 세운 사람들은 투르크-몽골族의 피가 흐르는 이들이었으나 이 제국을 다스린 세력은 페르샤 관료들과 이슬람 文化였다. 수니派 이슬람에 속했던 무갈의 왕들은 힌두교 등 他종교를 존중하고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정착시켜 수많은 종족들을 잘 다스리면서 다양성이 풍부하고 활력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무갈제국의 전성기는 아크바르 大王 시절부터 약 150년간이다.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만든 샤자한은 4代 王이다. 그는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세 번째 부인을 위하여 세계에서 가장 호화판 무덤인 타지마할을 건설하였다. 흰 대리석으로 빛나는 보석 같은 건물이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공된(1653년) 직후 아들에 의하여 廢位(폐위)되어 2.5km 떨어진 아그라 요새의 한 건물에 幽閉(유폐)되었다. 발코니에서, 사랑한 王妃(왕비)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어 왕비 옆에 안장되었다.
파키스탄의 古都(고도) 라호르에도 무갈제국의 城 안에 궁전과 모스크가 있다. 궁전은 동시대의 베르사유에 못지않은 규모이다. 아우랑제브 황제가 건설한 바드샤히 모스크도 장대하다. 주황색 砂岩(사암)으로 만든 이 모스크는 1678년에 완공되었다. 정원은 170×170m의 정사각형으로서 10만 명의 수용능력을 가졌다. 1986년까지 313년 동안 세계 최대의 모스크였다. 지금은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파이잘 모스크가 가장 크다.
인도의 타지마할과 파키스탄의 라호르城이란 2대 볼거리를 만든 나라의 이름이 몽골(무갈)제국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17세기 세계 6大 강국은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몽골계 북방 기마민족이 건설한 오스만 터키, 淸, 무갈제국이었다. 몽골계 騎馬(기마)군단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소총이 발명되고 艦船(함선)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해양세력의 대표인 영국이 19세기 중반 무갈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다. 그때부터 중국, 인도가 100년 이상 서양 제국주의의 東進(동진)으로 온갖 수모를 겪는다. 이제 30억 인구를 가진 두 巨大 국가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말을 잘 타던 민족이 세계를 정복한 뒤엔 배를 잘 모는 이들이 나타나 바다를 장악, 육지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지금은 하늘을 지배하는 시대를 거쳐 사이버 세상이 각축장이다.
무갈제국은 이슬람을 믿는 몽골-투르크族의 군사집단이 토착국가를 점령하고 인도에 건설한 나라였다. 그런데도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에서도 무갈帝國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인도 사람들은 많지만 몽골(무갈)의 식민지였던 시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인도인은 만날 수가 없었다. 異敎徒(이교도)의, 異民族(이민족)의 지배를 왜 그리워하고 자랑하는가.
인도 뉴델리 시내 네루대학의 무갈제국 전공 역사학자 하즈반스 무키아 교수를 만나 물어보았다.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무키아 교수는 『무갈제국의 창건자 바부르는 「원래 우리 할아버지 티무르大帝가 인도를 점령했었는데 그 뒤를 이어받아 내가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제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3代 아크바르 황제는 정복이 아닌 문화적인 기반에 제국의 정통성을 뿌리박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정의, 화목, 평화가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원래 무갈제국의 지배층은 57%의 몽골-투르크族과 나머지는 이란人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아크바르는 지배층을 확대 개편하면서 어떤 종족도 4분의 1이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슬람을 힌두교도에게 강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힌두교의 문화와 관습을 궁정에서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인도를 통치했던 前 왕조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현지화(現地化)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통합과 폭넓은 참여 위에서 문화가 꽃피게 되었습니다.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시인이자 작곡가로, 또 작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명문입니다. 그를 이은 무갈제국의 황제들도 문학-학술-그림-건축에 대단한 열정과 재능을 가진 교양인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경쟁적으로 건축한 놀라운 모스크, 정원, 기념물들이 지금도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런 文化的 건설이 또한 무갈제국의 정통성을 강화시켰습니다. 영국통치 시절인 19세기에 인도에서 反英(반영)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정신적인 지주는 무갈王祖였습니다. 그때는 허수아비가 돼 있었지만…』
2007년 新세계 7大 불가사의가 세계 네티즌들의 투표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 중국의 만리장성 ▲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 ▲ 멕시코 치첸이차의 마야 유적지 ▲ 로마의 콜로세움 ▲ 인도의 타지마할 ▲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
스위스의 영화제작자인 베르나르드 베버가 주도하는 재단은 21개 최종 후보를 선정했었고, 이들을 대상으로 세계적인 범위에서 인터넷 투표가 진행되었다. 21개중엔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터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 러시아의 크렘린궁과 聖 바실리 성당,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 칠레 이스터섬 石像,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등도 포함됐었다.
서양의 古代에 선정된 7大 불가사의는 ▲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 ▲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공중정원 ▲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靈墓(영묘) ▲ 로도스 항구의 크로이소스 巨像(거상) ▲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등이다. 이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기자 피라미드뿐이다. 2007년에 선정된 7大 불가사의 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브라질 리오데 자네이로에 있는 1930년대에 세워진 그리스도像이다. 산꼭대기에 있는 38미터의 石像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어 유명하지만 제작기술이나 완성도에서 결코 불가사의하지는 않다.
기자는 7개중 4곳을 구경했다. 페트라, 치첸이차의 마야유적, 만리장성, 그리고 콜로세움. 2007년 3월에 요르단의 페트라에 갔더니 7大 불가사의 선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현장에서 펼치고 있었다. 뽑히면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기 때문이다. 페트라는 돌산의 狹路(협로)를 지나 만나는 1700~2000년 전의 신전 건물터인데 자연경관은 경이롭지만 건물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 '인디아나 존스' 라는 영화에 등장하여 더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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