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부원병(夫源病)과 취사기(炊事期)

풍월 사선암 2016. 6. 26. 00:18

부원병(夫源病)과 취사기(炊事期)

 

일본 사람들은 최근에 '부원병(夫源病)'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병명(病名)을 지었다. 정년퇴직한 남편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병이라고 한다. 은퇴한 남편이 집에 눌러앉으면서 시시콜콜 참견하고 삼시세끼 밥 차려 달라고 하면 60대 이상 부인들은 십중팔구 병이 든다. 남자들의 평균수명 50세 시대에는 이런 병이 없었다. 전쟁·전염병·기근이라는 '3()'가 없어지면서 인류는 경험해보지 못한 장수(長壽) 시대에 돌입하였다.

 

아프리카 사자(獅子) 무리의 습성을 보면 수사자는 자리에서 은퇴하자마자 곧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관례이다. 젊은 수사자의 도전을 받고 무리에서 쫓겨나면 혼자서 광야(?)를 헤매다가 굶어 죽는 것이다. 평소 암사자가 사냥해 오는 먹이를 편안하게 먹다가 집단에서 추방되어 혼자가 되면 사냥이 어려워진다. 늙은 수사자는 이런 방식으로 가차없이 도태된다.

 

생태계는 비정하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50세가 넘은 남자는 임서기(林棲期)로 진입하게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동안 가족을 부양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했으므로 50세부터는 가정을 떠나 숲 속에서 혼자 살라는 지침이다. 동네 뒷산의 원두막 같은 데서 혼자 거지같이 산다. 아니면 지팡이를 짚고 거지가 되어 떠돌이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바라나시에 도착해서 장작으로 화장하여 뼛가루를 갠지스 강에 뿌리는 것이 소원이다. 자기를 되돌아보는 수행을 하라는 종교적 의미도 있지만 생식과 사냥의 임무가 끝난 늙은 남자는 가정에 짐이 된다는 현실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나 싶다.

 

고건 전 총리의 부친이 청송(聽松) 고형곤 박사이다. 대학총장까지 지냈다. 학교를 퇴직한 이후로 청송은 집을 떠나 정읍 내장산(內藏山)으로 혼자 들어갔다. 고내장(古內藏) 옆의 조그만 토굴 같은 집에서 혼자 밥 끓여 먹으며 지냈다고 들었다. 물론 가족이 반찬과 먹을거리를 가지고 왕래는 하였지만 청송은 인생 말년의 상당 기간을 내장산의 적막강산 속에서 보냈던 것이다.

 

'임서기(林棲期)'가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하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취사기(炊事期)'가 대안이다. 부엌에서 앞치마 두르고 밥과 설거지를 하는 취사기 말이다.

 

임서기(林棲期)의 삶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사람의 일생을 4단계로 설명한다. 태어나서 25세까지는 학습기(學習期)로 공부하는 시기를 말한다. 26세에서 50세까지는 가주기(家住期)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도 키우고 사회적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50세에서 75세까지는 임서기(林棲期)로 집을 떠나 숲 속에서 사는 기간이다. 자식도 키워놓고 사회적 역활도 했으니 이제부터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삶을 말한다. 76세부터는 유랑기(流浪期)로 접어든다. 거지처럼 여기저기 유랑하다가 길에서 죽는 시기를 말한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무소유(無所有)의 체험을 위하여 빌어먹는 거지 생활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 힌두교 가르침이다.

 

일본 여행가 후지와라 신야는 자신의 여행 철학을 '생사봉도(生死逢道)' 라고 정의한 바 있다. '길바닥에서 생사를 맞는다' '생사봉도' 는 힌두교 유랑기의 신념과 맞닿는다. 힌두교 4단계 가운데 문제는 세 번째의 '암서기' 이다.

 

50대 중반 직장을 그만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시기에 대하여 답을 알려 줄 수 있는 현대 철학자도 없다. 힌두교는 집을 떠나 숲으로 가라고 하는 것은 '나의 인생은 어떻게 마감 될 것인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의미는 무어일까? 인생은 결국 실패도 성공도 없다는 이치를 명상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숲으로 갈 수 있는가? 수행자들에게는 가능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법정 스님 같은 분) 인도의 브라만은 50세가 되기 전 자신이 은퇴 이후에 머무르게 될 아사람(수도원)과 미리 인연을 맺어둔다고 한다. 한달에 1~2번씩 정기적으로 아사람을 방문하면서 스승에게 인사도 하고, 필요한 생활용품을 제공하기도 한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이 불쑥 찾아가서 임서기를 보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평소에 미리 적절한 투자와 물품 거래가 이루어져야 정년퇴직해서 아사람에 들어가 공동생활의 계율을 지키기 쉽다는 것이다. 일단 아사람에 들어가 임서기를 보내게 되면 경전 공부도 하고, 고행도 하고, 명상도 하고, 봉사도 하며 산다. 봉사는 재능기부도 있고, 육체노동도 있는데 하루 6~8시간 정도는 봉사시간이다. 한국의 종교단체도 은퇴자를 위한 임서기를 보낼 수 있는 수도원 운영을 기린다.

 

-조용헌 원광대학교동양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