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동탄성심 중환자실서 메르스와 싸우는 김현아 간호사 편지

풍월 사선암 2015. 6. 12. 21:48

저승사자 물고 늘어지겠습니다 내 환자에게는 메르스 못 오게

 

메르스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첫 사망 환자 보며 사죄” / 동탄성심 중환자실서 메르스와 싸우는 김현아 간호사 편지

중환자실 병실째 봉쇄 코호트 격리’ / 다행히 다른 입원자는 모두 음성

 

한림대 동탄성심병원에는 의료진 95명과 환자 36명이 함께 격리돼 있다. 평택성모병원에서 온 메르스 환자 때문이다. 이 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는 김현아(41·사진) 간호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환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곳곳에 묻어있다.

 

저는 전국을 뒤흔들고 있는 메르스라는 질병의 첫 사망자가 나온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중환자실 간호사입니다.

 

제 옆에 있던 환자도, 돌보는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가래를 뽑고 양치를 시키던 환자는 황망히 세상을 떠났고, 나중에야 그 환자와 저를 갈라놓은 게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의 병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심폐소생술 중 검체가 채취됐고, 그녀는 사망 후에도 한동안 중환자실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그녀를 격리실 창 너머로 바라보며 저는 한없이 사죄해야 했습니다. 의료인이면서도 미리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더 따스하게 돌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낫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20년간 중환자를 돌보며 처음으로 느낀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조차 미안하고 죄송스럽던 시간들.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로 저는 격리 대상자가 됐지만 남은 중환자들을 돌봐야 했기에 코호트 격리라는 최후의 방법으로 매일 병원에 출근합니다. 누가 어느 부위에 욕창이 생기려 하는지, 누가 약물로도 혈압 조절이 되지 않는지, 누가 어떤 약에 예민한지 중환자실 간호사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송이 간호사 시절, 심폐소생술 때문에 뛰어다니는 제게 어느 말기암 할머니는 저승사자와 싸우는 아이라는 표현을 해주셨습니다. 그 말처럼 지금까지의 시간은 정말 악착같이 저승사자에게 내 환자 내놓으라고 물고 늘어졌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요즘은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 환자의 메르스 확진 판정과 동시에 전 메르스 격리 대상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으려 숨어서 출근하고 숨어서 퇴근합니다. 퇴근 후에는 바로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격리합니다. 출근 때마다 따듯한 차가 담긴 보온병을 들려주시던 엄마는 제가 격리 판정을 받은 날 이모 집으로 가셨습니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든 N95 마스크를 눌러쓰고 손이 부르트도록 씻으며 가운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고 나서야 남은 중환자들을 돌봅니다. 마스크에 눌린 얼굴 피부는 빨갛게 부어 오릅니다. 비닐로 된 가운 속으로는 땀이 흐릅니다. 다행히 중환자실의 모든 환자와 의료진은 2차 검사까지 모두 음성 판정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다른 병원에서 잠복기가 끝날 무렵에 증상이 발현된 환자가 나왔다는 점을 떠올리며 느슨해진 마음을 다시 조입니다.

 

며칠 전에는 한 환자의 보호자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코호트 격리 때문에 잠복기가 끝나는 2주 동안에는 전원이 되지 않는다고 하자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메르스 환자가 나왔으니 중환자실을, 더 나아가 병원을 폐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호통을 듣는 순간 참고 있던 서러움이 왈칵 밀려왔습니다. 온몸의 힘이 빠지며 무릎이 툭 꺾였습니다.

 

중환자실로 격리된 간호사들은 도시락 힘으로 버팁니다. 끼니마다 의료진 수만큼의 도시락이 자동문 사이로 전달됩니다. 직원 식당조차 갈 수 없는 신세가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모 집으로 간 엄마에게는 오늘도 용돈을 부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래도 이 직업을 사랑하느냐고. 순간, 그동안 나를 바라보던 간절한 눈빛들이 지나갑니다. 어느 모임에선가 내 직업을 자랑스럽게 말하던 내 모습이 스쳐갑니다. 가겠습니다. 지금껏 그래왔듯 서 있는 제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메르스가 내 환자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맨 머리를 들이밀고 싸우겠습니다. 더 악착같이, 더 처절하게 저승사자를 물고 늘어지겠습니다. 저희들도 사람입니다. 다른 격리자들처럼 조용히 집에 있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병이 무섭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기에 병원을 지키고 있습니다. 고생을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병원에 갇힌 채 어쩔 수 없이 간호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게 저희들의 바람입니다. 차가운 시선과 꺼리는 몸짓 대신 힘 주고 서 있는 두 발이 두려움에 뒷걸음치는 일이 없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세요.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외과중환자실 간호사 김현아 올림>

 

코호트 격리=병원에서 감염병 환자가 발생했을 때 추가 감염을 막기 위해 병동 전체나 일부 병실을 의료진, 입원 환자와 함께 봉쇄하는 것을 일컫는다. 코호트(cohort)비슷한 특성을 가진 집단이라는 뜻이다. 입원 환자는 잠복기가 끝날 때까지 외부로 못 나가지만 의료진은 자가 격리 형태로 퇴근 뒤엔 집에서 생활할 수 있다.

 

사진 설명 병원 내에 격리된 경기도 화성시의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의료진. 이들은 평택성모병원에 간 적이 있던 입원 환자(15번 확진자)와의 접촉 가능성 때문에 지난달 29일부터 환자들과 함께 격리됐다. 이 병원에서는 지난 1일 첫 메르스 사망자(25번 확진자)가 나왔다. 그는 평택성모병원에서 감염된 상태로 이 병원에 입원했다.

 

[중앙일보] 입력 2015.06.12 02:28

 

[동탄성심병원 김현아 간호사 인터뷰]

소독제로 병실 매일 닦아 격리 이해해 준 환자 참 고맙다

 

방호복 입고 화장실 가는 것 고역 / 간호사 부모 찾아와 딸 데려가기도

격리 해제 0시 땡 하자마자 한 일 음식물쓰레기 버리러 밖 나간 것

간호사 시작부터 중환자실 지원 / 생사 갈림길 뭔가 할 수 있다 생각

 

지난달 31일부터 메르스 잠복 기간인 14일 동안 격리됐던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김현아 간호사가 15일 중환자실에서 나오며 마스크를 벗었다. 환자들을 돌보고 나온 그의 이마에 땀이 배어 있다.

 

저승사자를 물고 늘어지겠다’ ‘메르스가 내 환자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맨머리를 들이밀고 싸우겠다던 이다. 하지만 마주 앉은 그에게서 여전사 이미지는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침착한 말투와 온화한 미소가 빛났다.

 

경기도 화성시 동탄성심병원 외과중환자실의 김현아(41) 간호사. 그를 15일에 만났다. 병동과 집에만 머물러야 하는 2주간의 격리 조치가 끝난 날이다. 함께 격리됐던 환자 36명과 의료진 123명은 모두 메르스 음성 판정을 받았다.

 

김 간호사는 이날도 중환자실을 지켰다. 근무 교대 뒤 병원 휴게실로 온 그는 편지가 중앙일보에 실린 뒤 과분한 찬사를 많이 받았다. 이번 일을 통해 메르스와의 전쟁 최전선에 서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힘겨운 격리 생활이 끝났다. 소감은.

 

오늘 아침 근무였는데 어젯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해제 시간(150)을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리자마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집 밖으로 나갔다. 하필 쓰레기가 제일 먼저 생각나 첫 외출이 그렇게 됐다.”

 

-병동과 집만 오가는 격리 생활은 어떠했나.

 

소독제로 병실 바닥은 물론 컴퓨터·전화기·모니터를 매일 박박 닦았다. N95 마스크를 쓰고 방호복을 입고 있는 게 가장 힘들었다. 숨 쉬기가 힘들었다. 화장실 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격리 초기가 특히 힘들었을 것 같다.

 

간호사 부모님이 병원에 와 딸을 데리고 간 일도 있었다. 메르스가 옆에 잠깐 있어도 걸리는 병으로 인식돼서 그랬다. ‘이 건물 안에 떠다니는 균은 어떻게 할 거냐고 소리치는 환자 보호자도 있었다. 어린 간호사들이 무서워서 근처에도 못 가겠다고 했다.”

   

간호사의 편지를 실은 중앙일보 612일자 1. 

 

-국내 첫 메르스 사망자(25번 확진자)를 직접 돌봤는데, 지금 심정은.

 

지난 1일에 돌아가신 직후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감염 우려 때문에 확진 판정이 나올 때까지 7시간 정도 격리실에 홀로 모셨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죄송했다.”

 

-메르스에 감염될까봐 걱정하지 않았나.

 

돌아가신 환자 곁에 계속 붙어 있었기 때문에 메르스 바이러스가 분명히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두려워했으면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동료 간호사들과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평소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면서 얼마나 나쁜 바이러스가 몸에 많이 들어왔겠느냐.”

 

-중환자들은 메르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나.

 

사실 대부분의 중환자는 말을 못하거나 의식이 없다. 그런데 한 여성 환자는 노트북을 통해 메르스 소식을 다 알고 있었다. 그 환자에게 나가면 다른 사람에게 전파시킬 수 있어 여기 있어야 한다고 설명하니 이해해줬다. 참 고마웠다.”

 

-계속 중환자실에서 근무해왔나.

 

“1996년 간호사 일을 시작한 뒤 거의 중환자실에만 있었다. 처음 간호사가 될 때 중환자실로 가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다른 병원의 화상 중환자실에도 있었다. 일반 병동 근무는 1년 반 정도 했다. 사람의 생과 사를 가르는 곳에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이 길로 이끌었다.”

 

-중환자실 근무가 고된 일일 텐데.

 

제 방 침대에는 베개가 6개 있다. 서서 일하는 직업이다 보니 다리가 많이 부어서 그 위에 올려놓고 잔다. 그러면서 내가 환자라면 어떤 자세가 편할지를 실험해 본다. ”

 

-평소 환자들을 대하는 원칙은.

 

중환자실 신입 간호사들이 오면 이런 얘기를 해준다. 아줌마 환자가 오면 엄마 얼굴을, 노인 환자가 오면 할머니 얼굴을 떠올리라고. 중환자실에서 환자가 의지할 건 간호사밖에 없다. 간호사가 바빠야 환자가 편하다.”

 

-편지가 보도된 뒤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의료진을 꺼리는 듯한 사람들의 태도에 서운함을 느껴왔는데 많은 이들이 제 편지에 공감하는 것을 보고 세상은 아직 따듯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동료 간호사들이 잊고 있던 초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글을 매우 잘 쓴다. 글을 많이 써왔나.

 

작가를 꿈꾼 적이 있다. 시나리오도 써봤고 일간지에 칼럼을 쓰기도 했다.”

 

-지금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곧 어머니를 모시러 갈 생각이다. 혹여나 메르스가 전파될까봐 멀리 대구의 이모댁에 가셨는데 빨리 보고 싶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보다 더 메르스 전문가가 됐다.”

 

[중앙일보] 입력 2015.06.16 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