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우리음악

봄날은 간다 / 조용필,장사익,주현미

풍월 사선암 2015. 5. 15. 23:50

백설희, 장사익, 조용필22가지 스타일의 노래 '봄날은 간다'

 

낭랑한 목소리가 구성지게 꺾여지는 백설희, 심장에서 슬픔이 끓으며 솟구치는 듯한 장사익, 입을 오므리며 실을 뽑듯 소리를 뽑아올리는 조용필,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가 날리듯 온 몸을 감싸는 주현미, 거친 보컬 만으로도 고달픈 여인의 투박한 삶이 느껴지는 한영애, 전자 바이올린으로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조아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최근 새정치연합 최고위원 회의에서 유승희 최고위원이 난데없이 불러 화제가 된 노래 '봄날은 간다'. 이 노래가 이토록 다양한 버전으로 불리고 있다는게 놀랍다. 22명의 가수와 연주자의 개성이 잘 녹아있는 '봄날은 간다'를 한데 모아봤다. 오태진 수석 논설위원의 명문(名文) 만물상을 읽고 감상해보시길.

 

'봄날은 간다'를 부른 가수들

 

대중음악 노랫말은 때로 시(). 가슴 깊숙이 들어와 가슴을 뭉텅 베어 가는 노래라면 그건 시다. 계간지 '시인세계'2004년 시인 100명에게 '좋아하고 흥얼거리는 노랫말'을 물었다. 2~5위에 '킬리만자로의 표범'(작사 양인자) '북한강에서'(정태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양희은) '한계령'(하덕규)이 올랐다. 단연 1위는 1953년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손로원)였다. 열여섯 명이 꼽아 2위를 여섯 표 앞섰다.

 

작사가 손로원은 원래 화가였다. 광복 후 '비 내리는 호남선'을 비롯한 여러 가사를 썼다. 그는 6.25 전쟁 때 피란살이 하던 부산 용두산 판잣집에 어머니 사진을 걸어뒀다. 연분홍 치마에 흰 저고리 입고 수줍게 웃는 사진이었다. 사진은 판자촌에 불이 나면서 타버렸다. 그가 황망한 마음으로 써 내려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요즘 차에 두고 노상 듣는 노래가 '봄날은 간다'. 백설희부터 박은경과 래퍼까지 60년에 걸친 가수 스물셋이 각기 불렀다. 최백호·장사익은 감정을 간수하지 않고 뜨겁게 내지른다. 절절하게 토해낸다. 조용필·김도향·최헌은 덤덤하도록 절제한다. 들을수록 깊은맛이 우러난다. 한영애는 신들린 듯 주절대는 스캣이 오래 남는다. 나훈아·이동원·심수봉도 저마다 저답게 불렀다.

 

듣다 보니 봄날이 다 갔다. 거리엔 어느새 반팔 차림이다. 좋은 시절은 금세 간다. 봄도 문득 왔다 속절없이 떠난다. 그래서 화사할수록 심란하다. '봄날은 간다'는 그립고 슬프다. '그때가 봄날이었지' 되뇐다. 다시 못 올 젊음의 회한(悔恨)을 삼킨다. 나이 든 이는 이제 봄을 몇 번이나 더 맞겠는가 싶다. 그 애틋함에 끌려 수없이 많은 가수가 불렀다. 가는 봄 서러워 목이 멘다.

 

'봄날은 간다'를 듣다 듣다 별스러운 곳에서 듣는다. 며칠 전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의에서 유승희 의원이 첫 소절을 불렀다. 막말 소동으로 회의장에 흐르던 침묵을 깨뜨렸다. 야당 앞날을 탄식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어버이날 경로당에서 불러 드리고 왔다"고 했다. 노인 위로에 적절한 노래도 아니다. 그는 이튿날 "분위기 바꿔보려다 심려 끼쳐 죄송하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공적연금에 대한 알뜰한 맹세가 실없는 기약으로 얄궂은 노래가 됐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참 궁색하게 들린다. 정치인은 좋은 노래마저 지저분한 정치로 오염시킨다.

 

봄날은 간다 - 조용필
봄날은간다 - 장사익
봄날은 간다 - 주현미


[Why] 연분홍 치마가 흩날릴 때꿈처럼 인생처럼 봄날은 간다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1973년 출시된 백설희의 골든 히트 앨범.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백설희 '봄날은 간다'

 

소리 없이 꽃이 지고 있다. 만나자 이별이다. 목련이 지더니 벚꽃이 진다. 고고하고 눈부신 순백의 목련은 어느 청춘의 자손이었을까. 그늘 하나 없는 그 맑은 빛은 세상의 비루함을 잊게 했다. 벚꽃은 모든 것을 각오한 생인 듯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미련 없이 진다. 무심한 바람에 꽃잎 분분히 날릴 때, 사람들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고 마음을 쓰다듬었으리라.

 

꿈같이 흘러온 봄은 곧 뒷모습을 보일 것이다. 봄은 소문처럼 왔다 소문처럼 떠난다. 그러니 봄에 새긴 약속은 부질없다. 봄 밤에 띄워 보낸 연서(戀書) 한 장, 아침이면 아지랑이처럼 흩어질 것이다.

 

누구였을까, 봄의 슬픔을 가장 먼저 노래한 이는. 흘러간 가요 '봄날은 간다'를 듣는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갔나. 둘러보니 봄볕만 외롭다. "알뜰한 그 맹세", 허망할 줄 진작에 알았다. 꽃이 지니, 그 맹세 찾을 길이 없다.

 

화사해서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덧없이 휘날릴 때, 어느 누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지극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다치면, 불치다. 이 눈부신 봄날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다음에, 우리 생은 무엇에 기대야 하는가.

 

연분홍 치마를 입은 여인이 "성황당 길"을 걸어간다. 연분홍의 시간은 반짝이고, 성황당의 시간은 고여 있거나 세상 외곽으로 밀려나 있다. 이 두 이미지가 부딪쳐, 환한 봄 속에 숨은 퇴락과 소멸의 진경을 그려낸다. 성황당에 새긴 약속대로 여인은 "옷고름 씹어가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하지만 사람은 오지 않을 것이다. 봄은 언제나 "실없는 기약"처럼 오기 때문이다. 봄꽃이 지천으로 붉게 물드는 것도 기다림에 지쳐서다.

 

노래가 보여주는 가장 처연한 봄의 비극성은 2절 처음에 온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이 구절에 이를 때마다, 속절없이 목이 멘다. 바람에 꺾인 어리고 여린 풀잎이 물에 몸을 맡기고 흘러간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에, 새파란 죽음이라니. 봄의 한 철을 전 생애로 살아버린 어린 풀잎의 비극적 순간을 선명한 그림처럼 보여주며, 노래는 봄의 허무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봄날은 간다' 이 한 곡 안에는 봄과 인생의 비밀이 다 들어있다. 가사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 수많은 풍경이 겹쳐져 있다. 그러니 이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서야 가수라 할 수 없다. 조용필, 장사익, 배호, 한영애, 김정호 등 내로라하는 세상의 명창이 한 번씩 다 노래했다. 백설희의 원곡부터, 이후의 모든 리메이크 버전마다 가수들 제각각 설움이 다르다.

 

조용필은 슬픔을 단단하게 끌어들이고, 장사익은 토해낸다. 배호는 정제된 슬픔을, 한영애는 끈적하고 퇴폐미 넘치는 슬픔을 보여준다. 김정호는 처절하다. 이토록 수없이 다시 부른 노래가 또 있을까. 한국 가요사가 얻은 최고의 절창이다. '봄날은 간다'는 시 전문지 조사에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 1위에 뽑혔다. 시인들의 선망과 질투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봄은 다시 오지만 이 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와 나 사이에 바람 불고 꽃이 질 때,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이 세월이 그저 아득하고 망연했으리라.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당신, 이 봄의 한가운데에서 아직도 못다 한 마음이 남아 있나. 그대의 여리고 물기 어린 마음 위로 꿈처럼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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