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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美시인 마종기, 명륜동 집서 아버지 마해송을 추억하다

풍월 사선암 2015. 5. 6. 20:19

[최홍렬 기자의 진심] 50년 만의 옛집 툇마루의사詩人 눈물이 그렁그렁

 

在美시인 마종기, 명륜동 집서 아버지 마해송을 추억하다

 

가난이 싫어 미국

아동문학가였던 아버지 / 꼿꼿하셨지만 늘 쪼들려 / 병원이 돈 많이 준대서 / 도망치듯 미국으로 갔다

 

오랜 不孝 씻는 날

비행기표 값이 없어서 / 아버지 부고 듣고도 못 와 / 마해송 전집 10권 곧 완간 / 先親 문학비 앞에 바칠 것

 

"서 혹독한 의사 수련 견디게 해준 건 해부학과 는 닮았다"

 

의사와 시인의 공통점

둘 다 고통을 치유하는 일 / 수 많은 죽음을 지켜보며 / 견디기 어려웠던 순간마다 / 는 생명수이자 위로였다

 

꾸준히 시집 내는 비결

황동규·김영태 등 文靑들 / "보내라" 재촉해준 덕분 / 8편은 발표하겠다는 / 스스로의 다짐도 평생 지켜

 

시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50년 만에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본 옛집은 그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정겨운 툇마루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었다.

 

지난 28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31433번지. 일제강점기 지은 오래된 단층 한옥집이 3~4층 빌라들에 둘러싸여 마치 섬처럼 남아 있다. 1966년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 집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던 시인은 "한국에 올 때마다 남몰래 이 집을 찾았지만 집 안에 들어와본 것은 처음"이라며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대문 앞에 서서 오랫동안 빛바랜 기와지붕과 벽돌담, 녹슨 창살을 바라보던 그를 우연히 발견한 집주인이 사연을 듣고는 흔쾌히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권한 덕분이다.

 

쓰다듬듯 기둥과 마루를 어루만지며 회고하듯 집 안을 둘러보던 그는 선글라스를 자주 꺼내 들었다. "봄햇살이 하도 밝아서"라고 했지만, 꼭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았다. 

 

지난 28일 시인 마종기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살았던 서울 명륜동 집을 근 50년 만에 다시 찾아 옛 모습 그대로인 집 안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어 있다. 이 집은 우리나라 아동문학 개척자인 아버지 마해송과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시인이 앉아 있는 툇마루는 대학생 시절 아버지와 함께 밝은 달빛 아래 건넛집 지붕에 피어 있는 흰 박꽃을 바라보던 곳이었다.

 

50년 만에 옛집 구경

 

마종기(76)는 의사이면서 시인이다. 그는 낮에는 미국 사람, 밤에는 한국 사람으로 평생을 살았다. 주중에는 의사로 일했지만 주말이 되면 골방에서 한국어로 시를 썼다. 미국으로 이민한 이후에도 고국에서 꾸준히 시를 발표해 쉽고 평이한 언어로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통찰을 담은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고된 삶을 추동한 것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개척자 마해송(1905~1966)이다. 아들이 거의 반세기 만에 방문한 이 집은 부자(父子) 간 추억이 곳곳에 짙게 서려 있다. 아버지는 건넌방 작은 소반에 무릎을 꿇고 글을 썼다.

 

"한번은 의대생 시절 시험 준비 하느라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화장실에 가려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마당에서 대여섯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아버지 방문이 열려 있었고, 아버지는 건넛집 지붕에 피어 있는 흰 박꽃을 망연히 보고 계셨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 방 옆 툇마루로 다가갔는데, 아버지가 황급히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와 나는 환한 달밤에 청초하게 피어 있는 박꽃을 바라보며 꿈꾸듯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박꽃을 본 적이 없었다."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그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박꽃' )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거주하며 매년 봄 한국을 방문하는 그는 올해 아버지에게 진 큰 빚을 갚는다. 이달 초 '마해송 전집'(문학과지성사)을 모두 10권으로 완간하는 것. 마해송이 세상을 떠난 지 49년 만이다. 1923년 발표돼 한국 최초의 창작동화로 알려진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비롯, 어린이극 대본, 노래가사, 수필 등 마해송 문학의 모든 것을 담았다. 그는 책이 나오는 대로 경기도 파주출판단지 내 마해송 아동문학비 옆에 수목장으로 모신 부모님을 찾아 아버지 전집을 바친다.

 

"진작 전집으로 묶었어야 했는데, 내가 외국에 있으니 챙기는 사람이 없어 늦어졌다. 아버지에게 큰 불효를 한 셈이다. 맏아들로서 평생 죄책감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아버지처럼 가난하게 살기 싫었다"

 

1965년 마종기(오른쪽)가 공군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당시, 서울 명륜동 집 근처에서 아버지 마해송과 찍은 사진.

 

마해송은 아들이 미국으로 떠난 지 4개월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나는 연세대 의대 시절 시인으로 등단해 문인들과 어울리곤 했는데, 당시 공군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1965년 재경 문인 105인 한·일회담 반대 선언 명단에 내 이름이 포함되어 군 방첩대에 끌려가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군인으로 정치를 했으니 2년 정도 감옥살이를 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지만 다행히 열흘 만에 영창에서 간신히 풀려났다. 하지만 공군본부에서 근무하다 수원에 있는 기지 병원으로 좌천되어 스트레스를 받으며 군의관 생활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내가 군의관으로 제대하기는커녕 앞으로 의사로 활동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지자 매일 한됫병짜리 소주를 드셨는데 그게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미국에 가서 자리도 잡기도 전에 큰일을 당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들었지만 귀국할 비행기 표를 살 돈이 없었다. 돈을 빌릴 친구도 없었다. 미국 올 때 가져온 건 아버지가 마련해준 50달러에 불과했다. 맏아들인데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물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 죄송스러운 마음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5년 만에 산소를 찾아 절을 올렸다."

 

마종기가 낯선 땅인 미 오하이오주에 있는 한 병원에서 혹독한 의사 수업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면서 살아왔다. 아버지는 '가난하지만 의연하게 살라'고 늘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항상 쪼들리는 생활 형편에 불평을 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다. 아버지는 선비로 살았는데, 나는 그분의 곧은 정신을 계승할 자신이 없었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그분이 왜 가난하지만 떳떳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싶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버지의 그 말은 낯선 미국 땅에서 고생할 때 삶의 받침목이 되었다. 아버지의 길은 못 쫓아가겠다고 해서 도망쳤는데, 이제 내가 그 길을 평생 따라다니고 있다."

 

아버지를 존경한다면, 뒤를 이어 글을 쓸 생각을 하진 않았나.

 

"아버지는 직장도 없이 원고 쓰고 술 드시며 평생을 살았다. 대학이나 신문사 같은 데 자리를 알아봐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와도 당신에게 적합한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시인으로 등단도 했지만 가난한 글쟁이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가난이 싫어서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왜 미국행을 택했나.

 

"의대를 졸업해도 인턴 생활을 더 해야 하는데, 당시 월급이 담배 열 갑 정도 살 돈에 불과했다. 의사 수련을 마칠 때까지 아버지의 쥐꼬리만 한 원고료에 기대고 손 벌리는 게 싫어서 미국 병원이 보내준 비행기표로, 월급을 많이 주겠다는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마종기는 미국에선 의사이지만 한국에선 시인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외롭고 힘든 외국 생활을 견디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시에 매달렸다.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예술 감상을 강조했다는데."아버지는 의사가 되든 다른 어떤 직업을 갖든 문학·음악·미술·연극·무용 등 예술 전반에 대한 취미를 골고루 갖추라고 했다.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의사 생활을 하면서 술이나 마약에 빠지지 않은 데는 음악회나 미술 전시회를 다니며 예술적 친화력을 키운 게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 대구 약전골의 작은 한옥에 세들어 살던 시절이었다. 부모님과 두 동생까지 다섯 식구가 함께 누우면 꽉 차는 방 한칸에서 살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원고료를 많이 받았다면서 나에게 한턱 내겠다고 했다. 나는 짜장면이 먹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데리고 간 곳은 어른들이 드나드는 '르네상스'라는 다방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사주신 따뜻한 우유를 조금씩 마셔가며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쇼팽의 피아노곡을 듣고 혼자 울기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의 어머니는 무용가인 박외선(1915~2011)이다. 박외선은 한국 현대무용의 선구자로 이화여대 무용과를 만들고 20여년 동안 가르쳤다. 그는 "어머니는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다가도 영감이 떠오르면 갑자기 일어나 무용 포즈를 취해 보며 식사를 포기하고 그 과정을 글이나 그림으로 남겼다"고 했다.

 

"부검, 시 쓰기 자극"

 

서울중·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활동을 하던 마종기는 의사의 길을 가기로 하고 연세대 의대에 진학했지만, 문과대학의 박두진 선생을 주축으로 한 연세문학회에 얼굴을 내밀며 시를 쓰고 문인들과 교류했다. 의과대학 본과 1학년 재학 중 시인으로 정식 등단한 그는 이듬해 내놓은 첫 번째 시집 '조용한 개선'을 비롯, 지금까지 모두 12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27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마종기는 2002년 미 오하이오대 의과대학 소아병원 부원장 및 방사선과장에서 은퇴할 때까지 36년간 의사로 일했다.

 

평생을 의사이자 시인으로 살았다. 두 분야는 접점을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둘 다 고통에서 출발한다. 의학은 육체를 치유하고, 문학은 정신과 영혼을 치유한다. 인간을 치유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둘의 만남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인과 의사는 다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내 것으로 앓아야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부검하는 장면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 끔찍한 장면이 어떻게 문학이 될 수 있나.

 

"의과대학 시절 시체를 찢고 자르던 해부학 시간은 충격적인 경험이자 시를 쓰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음을 던졌다."

 

시 쓰기가 즐거운 게 아니라 괴로운 과정이 될 것 같다.

 

"나는 울면서 시를 썼다. 처음 미국 병원에서 1년 동안 인턴 생활을 하면서 환자 100여명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삶에 대한 절절한 희망을 놓지 않는 그들이 숨을 거두면서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보았다. 가끔은 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된 환자가 시름시름 앓다 죽게 되면 부검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며칠 전까지 자기 애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환자 친구의 머리뼈를 전기톱으로 잘라내 뇌를 끄집어내고, 몸을 열어 폐와 심장, 간을 잘라내어 사인을 조사했다. 나같이 허약한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이자 슬픔이었다."

 

보통 사람으론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 같다.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시간만 있으면 시를 쓰려고 골방에 처박혔다. 뭉크의 그림처럼 절망 속에서 외침처럼 시가 터져 나왔다. 미국에 가면서 다시 문학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1년도 안 돼 시를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시가 나를 살려주었다. 몇 해 동안의 이런 혹독한 인턴 생활은 엉뚱하게도 내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시는 생명수이자 등대였다. 나에게 살 용기를 주었다. 낯선 이국 땅에서 유일한 위로였다."

 

의사로서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마지막 순간, 그들의 얼굴에 무엇이 나타나던가.

 

"금방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거의 대부분 살아있을 때보다 평온하다. 그런데 그 평화로운 표정의 죽은 이를 다시 자세히 보면 거의 언제나 한 줄기 눈물이 뺨을 적시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는 병리학자에게 물어보니 죽은 후 눈물샘이 기능을 잃게 되어 생기는 현상이라고 했다."

 

마종기는 "환자의 고통과 함께 살아야 하는 극도의 긴장과 정서적 불안으로 술이나 마약에 빠져 가정 파탄을 일으키거나 의료사고 등에 대한 죄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의사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의사들도 문학과 예술,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인문학 공부는 병을 고치는 과학자로서의 의사에 머무르지 않고 환자라는 인간을 대하는 전인격적인 의사로 만든다. 의사는 생명 앞에서 결정권을 갖는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인문학·예술체험은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의사로서 좌절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 이를 이겨낼 힘을 주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의과대학의 3분의 2 정도가 학생들에게 인문학 교육을 하고 있다."

 

"고국은 보이지 않으니 되레 희망할 수 있어"

 

마종기는 인터뷰 내내 우리나라를 '고국(故國)'이라고 했다. 일상생활에서는 많이 쓰이지 않는 그 말에 어린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졌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어떻게 해소했나.

 

"고국은 평생 내 사고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그 고국은 내 것이면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니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은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아무 데나 갈 수 있다. 이 생각이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숨통을 터주었다."

 

꾸준히 시집을 내고 있다. 외국에서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텐데.

 

"고국에 있는 문청(文靑) 친구들이 도와준 덕분이다. 미국에서 의사 생활에 쫓기고 있으면, '왜 시 안 보내느냐'고 재촉한다. 황동규, 정현종, 김병익, 김현, 김주연 등이 평생 나를 챙겨주었다. 김영태는 잡지·신문에 다리를 놓아주며 시 쓰기를 권했다. 서울중학교에서 만나 평생 친구가 된 황동규, 김영태와 3인 공동시집 '평균율'을 내기도 했다.

 

일상에서는 영어를 쓰면서 한국어로 시를 썼다. 시를 쓸 때의 감각은 어떻게 유지했나.

 

"나는 1년에 무슨 일이 있어도 8편의 시를 고국에 발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평생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천하고 있다. 내가 시를 써서 발표하지 않으면 고국과 연결되어 있는 탯줄 같은 끈이 끊어져 한순간에 미아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 와 같이 살던 동생이 강도 사고로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신문기자였던 남동생은 1972년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회담을 취재하던 중 개성이 고향인 큰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큰댁의 가족 소식을 묻는 메모를 북쪽 기자에게 건네다가 발각되어 정보부에 불려가 곤욕을 치르고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더 이상 한국에 살기 어려워 미국으로 건너와 잡화점을 운영하며 20년을 같이 살았는데, 1994년 가게에서 흑인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지금도 거의 매일 동생을 위해 짧은 기도를 드린다."

 

맑고 깨끗한 눈물

 

마종기는 2009년 가수 루시드폴(본명 조윤석)과 주고받은 이메일 편지를 묶어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며 시를 써온 70대 시인과 스위스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한 뒤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30대 가수가 한 출판사의 주선으로 36년이라는 시간의 벽을 극복하고 2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젊은 세대의 정서를 이해하는 게 힘들지 않나.

 

"고전음악에 익숙해져서인지 처음에는 루시드폴의 음악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악 감상에 대한 내 기준을 버리고 그의 음악과 가사 그 자체에 집중하니까 조금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대 간 소통도 이런 식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2010년에는 후배 문인들이 소극장을 빌려 마종기 등단 50주년 기념 낭독회를 열어준 적이 있다. 이 낭독회에서 '마사지'(마종기를 사랑하는 지하조직)가 만들어졌다. 이병률·이희중·정끝별·권혁웅 시인과 소설가 신경숙, 문학평론가 남진우·김수이 등이 주요 '조직원'이다. 정끝별 시인은 "1970~80년대 사회비판적 작품들이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을 때, 섬세하고 맑은 서정을 가진 마종기의 시를 남들 앞에 드러내지 않고 좋아한다고 해서 '지하조직'이란 말을 붙였다"고 했다.

 

그는 "내 시의 따뜻함이나 진정성, 평화, 겸손 같은 것은 좋은 의사에게 가장 필요한 요건이다. 나 역시 늘 갖추고 싶어 하던 것들이다. 의사 수업 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것을 배웠고, 그 배려의 정신이 나도 모르게 내 시에 스며든 것 아닐까. 훌륭한 의사가 되는 법을 배우면서 따뜻한 시를 쓰는 법을 배운 셈이다"라고 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무엇보다 진실해야 한다. 문학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거짓 없는 표현이어야 한다. 그런 시는 단순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의사와 시인으로 살았다. 당신에게 인생은 무엇인가.

 

"의사와 문인, 내게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 때로 허둥대기도 했지만, 나중에 보니 서로 돕는 관계였다. 나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힘들다는 의사 생활을 잘 견뎌냈고, 내가 의사였기에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도 계속 시를 써올 수 있었다. 인생은 여행과 같다. 가고 싶어 길을 떠나기도 하지만, 가기 싫어도 할 수 없이 떠밀려가는 경우도 있다. 자기 뜻대로 떠난 여행이 아니더라도 값어치가 없는 건 아니다."

 

시인은 눈물이 많았다. 명륜동 옛집을 구경하거나 먼저 간 동생 이야기를 할 때,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에 잠길 무렵이면 어김없이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 눈물은 그의 작품처럼 맑고 깨끗했다.

 

조선일보 입력 : 2015.05.02 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