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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國父’ 리콴유 타계

풍월 사선암 2015. 3. 24. 18:29

國父 잠들다눈물에 잠긴 싱가포르

 

싱가포르 國父리콴유 타계

지금의 싱가포르 있게 해준 당신거리-공관-병원앞 추모인파 가득

 

한 싱가포르 여성이 23일 싱가포르종합병원 앞에서 리콴유 전 총리의 대형 얼굴 사진과 그의 타계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쪽지들로 빼곡한 벽면을 촬영하고 있다. 23일 모든 공공건물에는 그를 애도하는 조기가 내걸렸고 서울의 1.4배 크기의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슬픔에 잠겼다.

 

지금의 싱가포르를 있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가 지난달 5일부터 폐렴으로 입원해 머물렀던 싱가포르종합병원 앞에 수북이 쌓인 추모 카드에 적힌 글귀다.

 

나라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의 기틀을 세워 국부(國父)’로 존경받는 리 전 총리가 향년 92세로 타계하자 국민들은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며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 싱가포르종합병원과 가족 장례식이 치러질 총리 공관, 정부가 마련한 분향소 앞에는 시민들이 가져온 꽃이 차곡차곡 쌓였다. 거리 곳곳엔 늦은 밤까지 추모 발길이 이어지고 관공서마다 조기(弔旗)가 내걸려 도시 전체에서 장례식 분위기가 배어 나왔다.

 

싱가포르 총리실은 23일 오전 성명을 내고 리 전 총리가 오늘 오전 318(한국 시간 오전 418) 세상을 떠났다. 평화롭게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리셴룽(李顯龍) 총리가 슬픈 마음으로 전 국민에게 알려드린다고 발표했다. 리 총리는 리 전 총리의 장남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23297일간을 애도 기간으로 정했다.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장례식은 29일 오후 2시 싱가포르국립대 문화센터에서 열리며 이후 시신은 화장된다.  

 

재임때 공관 비운채 소박한 삶고인돼서야 오셨네요

 

눈물에 잠긴 싱가포르

 

추모 촛불 23일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촛불로 ‘R I P’라는 영어 글자를 만들며 추모하고 있다. 이 글자는 평안하게 잠드시라(rest in peace)’라는 영문의 약자이다.

 

23일부터 이틀간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의 가족 장례식이 치러지는 이스타나 대통령궁 내 총리 공관인 스리 타마섹앞에는 이날 오전부터 수백 명의 시민이 몰려들었다. 새벽에 발표된 리 전 총리의 타계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고인의 시신이 운구되는 모습이라도 보겠다며 궁 바깥으로 몰려들었다. 아들인 리셴룽(李顯龍) 총리와 며느리이자 총리 부인인 호칭 여사도 오전에 궁에 도착했다. 호 여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스타나 궁 정원 잔디 위 안개도 이별을 고하는 것 같다고 적었다.

 

작별 인사 23일 리콴유 전 총리 시신을 실은 운구차가 총리 관저가 있는 대통령궁으로 들어서자 새벽부터 길가에 늘어섰던 수백 명의 시민들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있다.

 

리 전 총리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가 다가오자 기다리고 있던 시민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거나 고마워요. 리콴유를 외쳤다. 운구 행렬이 공관 안으로 들어가자 길에 죽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정문 앞에 다시 모여 정부가 비치한 방명록과 추모 카드에 애도 메시지를 쓰고 꽃다발을 놓았다. 이날 오후 8시까지 정문 앞에서만 11000여 개의 추모 카드가 만들어졌다.

 

밤이 되자 추모객들은 더욱 늘어났다. 오후부터 공관 앞에 모여든 시민들은 일렬로 줄을 지어 리 전 총리를 조문했다. 대부분 검은 양복과 검은 원피스를 입었고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리 전 총리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부 노인들은 조문소 앞에서 아버지(Father)”라 부르며 울기도 했다. 이곳을 찾은 오잉후아 씨(68)리 전 총리는 생전에 이곳 총리 공관에서 살지 않았다. 죽어서야 왔다며 눈물을 훔쳤다.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로 선출된 1959내 아이들을 집사와 청소부가 있는 특별한 환경에서 키우지 않겠다며 공관 사용을 거절했다. 이후에도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독립할 때 안전 문제로 잠깐 머무른 것 외에는 주로 외국 귀빈을 접대할 때만 이용했다.

 

리셴룽 총리도 현재 공관에 살지 않는다. 그는 이날 오전 8(현지 시간) 부친의 타계를 공식 발표하는 TV 연설을 통해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 국민에게 자랑스러운 국가 정체 의식을 불어넣었다우리는 앞으로 그와 같은 인물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싱가포르 자체였다고 말했다. 그는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등 3개 언어로 연설을 하면서 슬픔이 북받치는 듯 수차례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러면서 건국 총리 리콴유 선생, 편안히 쉬십시오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날 공관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토니 탄 싱가포르 대통령과 고촉통 전 싱가포르 총리,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 등이 다녀갔다. 공관 내부에 안치된 리 전 총리의 관은 하얀 꽃들로 장식됐다. 상주인 리 총리는 검은색 바지와 흰색 티셔츠 차림으로 직접 조문객을 맞았다.

 

리 전 총리가 마지막으로 머무른 싱가포르종합병원 앞에도 추모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싱가포르 당국은 25일까지 탄종파가르, 앙모키오 등 시내 중심가 18곳에 분향소를 추가로 설치할 예정이다. 택시 기사인 존 폴림 씨(53)싱가포르의 엄청난 변화와 리 전 총리의 리더십을 직접 겪은 우리 세대나 부모 세대는 너무 상심이 크다고 말했다.

 

리 전 총리의 타계와 동시에 싱가포르 정부가 만든 추모 홈페이지(www.rememberingleekuanyew.sg)는 이날 오전 접속자가 크게 몰린 탓인지 한때 작동이 중지되기도 했다. 여기에는 고인이 부인 콰걱추 여사와 젊은 시절 데이트하면서 찍은 사진, 현지 시찰을 하며 찍은 사진 등 생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올라 있다.

 

많은 싱가포르 시민들은 추모 홈페이지와 리 전 총리 트위터, 싱가포르 총리실 페이스북 등을 오가며 추모 메시지를 남겼다. 한 시민은 그의 죽음이 발표된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의 사진을 올려두고 이 시간을 그에게 바친다. 그는 위대한 인간이었다라고 적기도 했다.

 

외국인들도 현대사의 거인이 쓰러졌다며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공관 앞 분향소를 찾은 일본인 교사 모리야마 씨(46)한 국가의 정치를 자신만의 철학으로 그만큼 밀어붙인 이가 없다는 점에서 리 전 총리는 대단한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발표된 직후부터 이날 오후 11시까지 리 전 총리를 언급한 전 세계 트윗과 리트윗은 19만 건을 넘어섰다.

 

이념보다 실용단호한 리더십으로 强小國 이뤄낸 거인

 

싱가포르 國父리콴유 타계

 

31인당 국민소득이 400달러에 불과했던 가난한 어촌마을을 5만 달러가 넘는 부강한 나라로 탈바꿈시킨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박정희(한국) 장제스(대만) 덩샤오핑(중국)과 함께 아시아의 도약을 이끈 아시아 1세대 창업형 지도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리콴유 전 총리가 2011914일 자신의 이름을 딴 싱가포르국립대 리콴유정책대학원 설립 7주년 기념식장에서 연설하는 모습.

 

지난해 싱가포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56113달러로 세계 8, 아시아 1위이며 세계경제포럼(WEF) 조사 국가경쟁력은 세계 2, 국제투명성기구 조사 국가청렴도는 세계 5위다. 이런 싱가포르를 있게 한 주인공이 리콴유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1923년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리콴유는 어릴 적부터 수재 소리를 들으며 싱가포르 명문 래플스학교를 수석 입학하고 수석 졸업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일본군이 고향을 점령하면서 일본군 선전 정보부에서 번역 일을 하거나 고무풀 장사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야 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일본군 치하를 겪으며 권력을 차지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정치의 속성을 몸으로 익혔다. 정부가 왜 필요한지 깨달은 시기이기도 했다고 적었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 유학을 떠나 런던정경대, 케임브리지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리콴유는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1950년 고국에 돌아와 노동전문 변호사로 일하다 서른한 살 때 정치에 뛰어들어 1954년 창당한 인민행동당사무총장직을 맡았다.

 

리콴유 전 총리가 19647월 유세 차량에서 연설하는 모습. 당시 말레이시아연방 일원이었던 싱가포르는 연방의 맹주 말레이시아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리 전 총리는 이듬해 마침내 싱가포르가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자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5년 뒤인 1959년 싱가포르가 자치권을 얻어낸 뒤 실시한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이 51석 중 43석을 휩쓸며 압승하자 서른여섯의 나이에 총리가 된다. 이후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독립하자 초대 총리로 취임해 1990년 퇴임할 때까지 26년간 일했다. 자치정부 시절까지 합하면 무려 31년을 총리로 재직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한 총리로 기록됐다. 독립 당시 400달러 수준이던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그가 퇴직한 1990년에 12750달러를 달성했다.

 

리콴유는 자원도 인구도 부족한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963년 국민투표를 통해 말레이연방에 가입하지만 연방의 맹주 말레이시아와 충돌을 빚다 2년 만에 탈퇴한다. 그가 정치노선의 핵심 키워드로 실용주의를 갖게 된 배경이 되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특정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반식민주의-온건 사회주의-강경 반공주의를 넘나들면서 싱가포르를 통치했다. 2007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의 이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우리는 이념에서 자유롭다. 잘 작동한다면 시도해라. 좋다면 계속해라. 작동하지 않는다면 던져 버리고 다른 것을 시도해라. 이게 이념이라고 답했다.

 

그는 국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는 권위적 통치가 불가피하다는 정치관을 가졌다.

 

여론이나 지지율 등락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도자의 일이 아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신문기사가 아니라 집 의료 직장과 교육이라면서 언론 자유를 경시하는 태도도 가감 없이 드러내곤 했다. 국민이 사랑하는 지도자가 될지, 두려워하는 지도자가 될지 사이에서 나는 늘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믿는다면서 마키아벨리즘 신봉자라는 것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히는 정적(政敵)들에 대해서도 말썽꾼들을 정치적으로 파괴하는 게 나의 일이다. 내 가방 안에는 매우 날카로운 손도끼가 있다. 만약 말썽꾼과 겨루게 된다면 손도끼를 사용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리 전 총리는 질서를 넘어선 자유는 용납되지 않는다며 태형(笞刑)을 도입하는 등 강력한 법률로 나라를 다스렸다. 국민이 거리에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일까지 간섭해 유모 국가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자신을 향해 독재라는 비난이 일자 아시아가 서구를 따라잡으려면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해 당시 아시아에 만연했던 독재를 옹호하는 논리를 편다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개발 과정에서 무력을 동원하거나 착취, 인권 침해 논란을 초래하지 않았고 측근도 봐주는 법이 없는 청렴함을 보여 온건한 독재자로 불렸다. 1995년 부동산 가격의 급등으로 자신의 일가에 대한 투기 의혹이 일자 조사를 자청했고, 무혐의 결론이 난 뒤에는 차익을 모두 기부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입력 201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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