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MBC사우회

손관승 "막막한가…괴테처럼 떠나라"

풍월 사선암 2015. 2. 12. 10:50

손관승 "막막한가괴테처럼 떠나라"

 

작년 여름, 7월이었던가. 회사에서 주주총회가 열렸다. 그날 저녁 나는 직원 몇 명과 미팅 중이었다. 갑자기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그룹 인사 내용 보셨어요?” 표정이 어두웠다.

 

책상 위 컴퓨터의 창을 열었다. 인사 명단에 내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끝이라는 얘긴가. 당혹스러웠다. 임기는 종료 시점이었지만 이미 연임이 공표되지 않았던가. 순간 앞이 흐릿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송별회. 직원들이 신발과 가방을 선물로 내밀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고 지치셨지요. 여행이라도 충분히 해보시면 어떻겠어요.” 그랬다. “2의 인생은 그 다음에 천천히 생각하셔도 좋지 않을까요.” 그런 말도 했던 것 같다. 참 고마웠다. 눈 앞의 신발도, 가방도 그냥 물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크디큰 마음의 징표로 무겁게 다가왔다. 그간의 정이 가득 담긴. 거기에 나는 이제 새로운 꿈을 담아야 한다. 어디로 갈까.

 

맨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있었다. 예전부터 그려온 버킷리스트. 그 첫 항목이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지난 18일 서울 남산 괴테 인스티튜트. 그곳에서 손관승(55)씨는 저간의 사정을 그렇게 설명했다. 신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기’(새녘)를 내게 된 경위이기도 했다. 기자와는 초면이었다. “건넬 명함이 없다며 멋쩍어했다. 1년여 전만 해도 iMBC 대표가 직함이었던 그다. 하지만 지금은 새 책을 낸 뒤, 반응에 마음을 졸이고 있는 저자다.

 

책을 재밌게 읽었다며 인터뷰를 청했더니, 이곳을 제안했다. 대학 시절 독일어 공부를 한답시고 드나들던 곳, 그의 청춘이 자신도 모르는 싹을 피워 올렸던 자리다. 오전 시간, 구내 도서관은 한적했다. 직원의 양해를 얻어 그 자리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인상만큼이나 푸근했다.

 

-오랜 방송 기자 생활을 거쳐 회사 대표까지 지냈다. 어떻게 괴테 여행기로 책을 쓰게 됐나?

 

나도 경영을 했지만, 괴테도 경영을 했다. 그는 국가 경영을 했다. 이른 나이에 바이마르공국 군주의 자문으로 초빙받아 일했다. 그러다 일종의 번아웃(burnout) 증후군에 걸려 훌쩍 나선 게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나도 장기 격무 후에 갑작스레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순간이 되고 보니 괴테의 여행이 떠올랐다. 다른 대안도 없진 않았지만, 그땐 그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을 나설 때만 해도 책 쓸 생각까지는 안 했다. 그저 괴테 루트를 따라 갔다오려는 생각이었다.”

 

-괴테는 서른여섯 살에 여행을 떠나 18개월을 돌았다. 왜 그랬나?

 

괴테는 그때 이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세계 최초 베스트셀러 작가가 돼 있었다. 그 유명세에 힘입어 곧바로 바이마르 공국에 특채돼, 총리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혼자 몰래 훌쩍 떠났다. 여행기의 핵심은 자기 인생의 로드맵을 찾는 것이었다. 그 책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너무나 가슴이 뛰었다. 첫 문장이 특히 멋있다. (그의 입에서 독일어가 슈베르트 가곡처럼 흘러나왔다. 그가 베를린 특파원을 지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곧이어 우리말로 뜻을 풀어줬다.) ‘새벽 3, 아무도 모르게 칼스바트를 빠져나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까.’

 

여기서 말하는 새벽 3시라는 게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두려움이다. 동트기 전 어둠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여명이 밝아온다는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다. 어디에도 그렇게 괴테가 설명한 건 없지만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새벽 3시는 사람들이 잠들어 눈치채지 못할 시간이기도 하지만, 두려움과 희망이 맞서는 시간이기도 하다.”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여행 경로를 간략히 소개해 달라.

 

1년 전이었다. 작년 116~7일경에 짐을 싸서 나섰다. 괴테는 여행을 나설 때 두 가지를 마차에 싣고 출발했다. 여행 가방과 오소리 가죽 배낭 하나였다. 나는 직원들이 준 배낭과 여행 트렁크 하나를 챙겨 갔다. 먼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내렸다. 항공편 도착지가 그렇기도 했지만, 그곳이 괴테의 고향이다. 거기 미술관에 유명한 괴테 그림(티슈바인의 로마 캄파뉴에 앉아 있는 괴테’)이 있다. 그 그림을 먼저 본 후 바이마르로 갔다. 자동차로 두 시간 걸렸다. 거기서 다시 두 시간을 가면 칼스바트다. 체코어로는 카롤리비발이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나도 그렇게 출발했다. 도중에 보헤미아숲을 비롯한 많은 곳을 다녔다. 도시간 이동은 렌터카로 움직였지만, 내려서는 구석구석 걸어서 답사했다.”

 

-나이 오십에 그런 여행이 쉽지 않았을 텐데, 집에서는 반응이 어땠나?

 

사실 집사람도 동행했다. 평소 내가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번에도 여행 중의 내가 나오는 사진은 집사람이 찍어준 거다.”

 

-독일이나 괴테와의 인연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

 

내가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를 나왔다. 솔직히 가고 싶어 간 과는 아니었다. 우리 입시 때만 해도 전후기로 나뉘어 있었는데 엉겹결에 들어가게 됐다. 솔직히 후회한 적도 있다. 그 뒤에 독어 전공이 내게 두고두고 복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덕에 방송사 가서 독일 연수도 가고 베를린 특파원도 했다. 더구나 외국어를 하나 안다는 것은 하나의 또다른 세계를 아는 관문이지 않나. 특히 독일은 위대한 인물에 문화도 풍성하고 국내에서도 관심이 많은 나라다. 이번 책이 나로서는 다섯번째인데, 다른 책도 독일이 배경이거나 독일을 모티프로 한 것이 많다.

 

대학 다닐 때 괴테를 알긴 했어도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 이곳 남산 괴테 인스티튜트와 독일 괴테 인스티튜트로 어학 연수 갔을 때 조금씩 눈을 뜨게 됐다. 특히 독일에서는 말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을 가르쳤다. 오전에 수업이 끝난 다음 오후에는 독일 문화 전반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방송사 입사 후 10년 차 되던 1994년에 특파원 연수를 가면서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특파원은 사무실도 있고 자료 협조 받기도 수월해서 좋았다.”

 

-자료나 책은 얼마나 봤는지?

 

괴테를 포함해서 독일에 관한 자료가 바인더로 열 개가 넘는다. 책은 물론, 신문이나 잡지, 학술저널, 행사 자료 같은 것이 꽤 많이 모였다. 이 지도만 해도 ADAC(독일자동차연맹)에서 발간한 건데 설명이 아주 잘 돼있다. 심지어 괴테가 지나간 길을 표시한 상세 지도도 따로 나와 있다. 컴퓨터에 저장해둔 사진 파일도 많고.”

 

-괴테 루트를 표시한 지도가 따로 있다니 재밌다.

 

내가 그 뒤에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연행길도 따라갔다 왔는데, 대조가 됐다. 연암은 기록도 잘 해서 훌륭한 책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경로나 유적지에 대한 별다른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반면 독일은 후대가 관련 자료를 차례로 남겨서 정확히 복원이 돼있다. 어디에서 묵고 잤는지도 다 나온다. 두 나라 문화 인프라의 차이다.”

 

-지리적인 길을 문화 인물과 연결지은 시도가 흥미롭다. 말 그대로 인문지리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염두에 둔 게 첫째, 인문 여행, 둘째, 인물 여행이었다. 인문은 당연히 기본으로 깔리는 것이고, 어떤 작가나 관심 있는 인물을 따라 여행하는 개념이다. 또다른 면에서 투 트랙이었다. 하나는 괴테의 인생 길을 따라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내 인생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여정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독일의 괴테라면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이름이다. 하지만 대문호라는 사실 외에 인생 편력의 세부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독일에도 유명한 말이 있다. ‘아직도 괴테를 읽으십니까?’라고. 20년 전 내가 베를린 특파원 할 때, 독일 최고 신문인 프랑크알게마이네차이퉁이 제목을 그렇게 뽑은 적이 있다. 독일 저명 인사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질문이었다. 상당수가 챙피하지만 파우스트를 안 읽었다고 답했다. 그만큼 독일에서도 괴테는 유명하지만 정작 작품을 읽지는 않는 작가다. 다만, 이탈리아 기행은 논픽션이어서 읽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그래서 많은 독일인들이 어렸을 때부터 읽고 안다. 국내에도 독문학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문학 작품들은 많이 번역돼 있지만, 대중이 보기 쉬운 책은 드문 것 같다.”

 

-대표적인 평전이 있나?

 

독일에는 평전이 많다. 괴테가 말년에 젊은 시인과 대화한 기록인 에커만과의 대화1차 자료로 가장 유명하다. 괴테는 정치인, 문인, 식물학자, 광물학자, 여행가로 팔방미인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여행가이자 경영자 괴테였다.”

 

-괴테가 어떤 사람인지 좀더 얘기해줄 수 있나?

 

첫째는 독일의 상징이자 국가적 자부심이다. 그래서 독일문화원 이름이 괴테 인스티튜트다. 이걸 본따서 중국도 공자학원이라고 이름 붙인 거다. 괴테는 이미 20대 중반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세계 최초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다. 워낙 똑똑했다. 독일에서 흔히 천재라고 하면 두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냥 천재(게니·Genie)’라면 괴테고, ‘신동’(분더킨트·Wunderkind)이라면 모짜르트다. 이건 고유명사다. 괴테는 유복했다.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났고 아버지가 직접 가르쳤다. 법학박사도 받아서 원래 변호사인데, 바이마르공국 군주가 스카우트해 갔다. 20대 중반에 가서 죽을 때까지 거기 있었는데, 그 중간에 이탈리아 여행 외도를 한 거다. 군주 밑에 10년 동안 있다 보니까 번아웃된 거다. 이탈리아 여행을 갔다온 후에는 바이마르를 천재들의 도시로 만들었다. 84세 나이에 숨을 거두기까지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린 천재이자 축복받은 인물이었다.”

 

-그런 괴테가 지금 한국에선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인문학의 위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공급자들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괴테만 해도 요즘 사람들한테 여전히 옛날식으로 어필하니까 어렵게 여겨지는 거다. 대표작인 파우스트만 해도 제목은 유명하지만 읽은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괴테라는 사람은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여행기를 읽어보면 곧바로 알 수 있다. 대단히 정직하다. 갈증이 난다든가 설렌다든가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다 얘기한다. 그게 공감을 낳는다. 무엇이든 공감을 낳는 첫째 비결은 정직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의 근원적인 질문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다. 괴테는 이 여행기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뒤로 하고 다시 한번 도약하기 위해 낯선 길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열정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이왕 한번 사는 인생,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드러내 보여주고 싶어했고 가장 치열하게 산 사람이다. 괴테는 젊을 때 상처가 많았다. 그의 인생은 여행을 분기점으로 로마 이전로마 이후로 나뉜다. 로마를 다녀온 뒤 아주 과감해진다. 여성과의 관계도 그랬다.

 

그것이 요즘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위기가 오거나 좌절에 직면해서도 어설프게 힐링에 의탁하지 말고 그 한가운데로 뚫고 가보라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참 힘들다. 직장인들도 인생 행로로 고민한다. 모두가 방향성이 문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방향 찾기다. 나도 경영을 해봤지만, CEO 역할 중에 중요한 것이 방향 설정이다.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물적, 인적 자원과 아이디어, 시간, 에너지를 어느 방향으로 모아주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여행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괴테는 여행 전과 후의 변화한 모습을 퍼포먼스로 보여줬다. 돌아와서 위대한 괴테로 거듭났고, 위대한 바이마르 공국을 만들었다. 그전까지 독일은 힘은 세도 문화가 없는 나라였는데, 과장해서 말하면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 이후 독일이 오늘날 자랑하는 문화국가로 설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됐다고도 볼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 실제로 어떤 소득이 있었나?

 

우선 떠나기 전에는 두려움이 많았다. 회사를 나온 후에, 나이 50이 넘어서 주책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2의 인생을 살려면 다른 구체적인 직장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도 싶었다. 사실 이번 여행 때문에 두 가지 일을 놓쳤다. 수도권 대학 교수로 오라는 제의도 있었고, 대기업 임원 얘기도 있었다. 이 여행과 겹치면서 포기했다. 후회도 왜 안 했겠나. 나도 아직 고3 자식이 있고, 내 나이도 있다. 이번 기회 아니면 영원히 직장을 놓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씩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것이라면 요즘 젊은이들 말로 쫄지않게 됐다. 그냥 안정적인 길만 찾았으면 이번 책도 못 썼을 것이다. 여행을 하고 책을 쓰는 동안 나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자기 내면의 이야기처럼 읽어주셔선지 반응이 괜찮다. 여기저기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오고. 물론 또다른 일자리 제의가 들어오면 그것대로 검토해 봐야겠지. 누구나 제2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영원한 직장은 없다. 다 예상하는 것이긴 한데, 막상 닥쳤을 때는 너무나 다르다. 이 여행 덕분에 어떤 길을 가든 마음의 준비를 더 강하게 할 수 있게 됐다. 더 단단해졌다고나 할까.

 

또 얻은 게 있다. 이전에는, 특히 방송 일이 그런데, 뭐든 빨리빨리 처리했다. 하지만 괴테의 여행 자체가 결국 인생을 길게 보자는 얘기다. 긴 호흡으로 보자는 거다. 그게 제일 큰 소득이다. 주변도 돌아보면서 감사하는 여유를 갖게 됐다. 그동안 내 능력에 과분한 대접을 많이 받았다. 기자로도 그랬고, 특파원도 그랬고, 동기 중에 가장 먼저 임원도 됐다. 이제 생각해 보면 내가 잘나서라기보다 우연히 운이 좋았던 건데. 그러고 보면 이렇게 먼저 나왔다. 하지만 또 좋게 생각하면, 내게 제2의 인생을 생각할 시간을 벌어준 것도 같다. 누구나 언젠가는 닥칠 일인데. 나중에 가서는 아마 더 쉽지 않았을 것이다.”

 

-2의 인생 설계에는 도움이 됐나?

 

그전에도 책은 몇 권 썼지만 작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방송계나 콘텐츠 쪽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지만 저자로서는 신참이나 다름없다. 처음으로 를 주어로 쓴 책이다. 앞으로도 제일 하고 싶은 일은 책 쓰고 강연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전에 했던 분야에서도 크고작은 제안이 없지 않다. 다만 이제는 타이틀이나 연봉 같은 것에는 연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책을 쓰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한테서 배운 게 있다. 그의 명상록을 다시 읽어보니, 인생을 연극에 비유했더라. 항상 주인공 할 생각을 마라는 것이다. 주연을 했더라도 연출가가 조연을 하라 하면 하는 거고, 원래 5막을 3막에서 끝내라고 하면 그걸 받아들이는 거다. 체념과는 다르다. 역할이 바뀌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거다. 다만, 정치권이나 공직은 안 갈 생각이다. 다른 훌륭한 분들 많을 테니까.”

 

-대표로 있는 동안 퇴임 후를 미리 생각해 보진 않았나?

 

꺼내기 조심스러운 얘기이긴 한데, 사실 대표직 연임이 공고됐었다. 내 얘기라서 쑥스럽지만, 경영 실적도 아주 좋았다. iMBC가 계열사 중에 유일한 상장회사인데, 주가가 3배까지 올랐다. 매출, 수익도 크게 올랐다. 경영인으로서 평가도 좋았고. 중간중간에 스카웃 제의도 있었다. 연임 통보를 받은 후에, 아시다시피, MBC를 둘러싼 환경이 갑자기 변하면서 새 판을 짜게 됐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은 아니고. 그러다 보니 제2의 인생에 대해 준비할 생각도 못 했다. 막상 예기치 않던 시기에 퇴임하게 되니 당혹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마음의 독이 빠져나가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누굴 원망하고 말고 할 게 아니라, 세상이 그런 걸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것은 자기만의 문제다.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에 대해 더 기회를 못 줬다고 투덜거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기회를 누렸으면 그만큼 자력갱생해서 자기 길을 찾아가야지. 그게 여행하고 똑같다. 자기 길을 찾아가는 거다. 괴테가 그랬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찾아가라고 아무도 얘기를 못한다. 다만 방향성이나 큰 인사이트 같이 것은 배울 수가 있다.”

 

-사실 괴테는 당대에 잘 나가는, 요즘 말로 하자면 엄친아였다. 저자도 유력 회사 대표까지 지냈다. 요즘처럼 양극화가 심한 시대에 일반 직장인으로서는 2의 출발을 위한 여행조차 여유나 호사로 비칠 수도 있는데.

 

좋은 지적이다. 사실 이번에 책 쓰면서 제일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다만 나는 30년 기자 생활을 했고 CEO도 했다. 언론직에 있어 봤거나 경영을 해본 분들은 다 절감하겠지만 에너지 소모가 굉장히 크다. 특히 CEO 경우 법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그 정도로 정신적 소모가 심하다. 퇴직 후에도 아직은 직장을 구해야 할 나이다.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이런 여행 자체가 모험이었다. 나도 사실 경제적으로 그리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다. 구직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경비도 적잖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했다. 30년 정도 줄곧 달려오다가, 이제 평생 버킷리스트로 꿈꿔온 이런 여행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놀러 가는 게 아니었다. 휴양이 아니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돌아올 때는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여행 전에는 넥타이 맨 사람만 봐도 지겨웠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일하고 싶다는 의욕이 솟구친다. 그것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소득이다. 그 결과물을 다른 사람과도 공유하고 싶었다. 재산의 공유도 있지만 재능이나 지식, 경험, 네트워크 공유도 있지 않나. 내가 지금 나눌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 괴테다. 반드시 이탈리아 여행을 권하는 게 아니다. 각자 처한 상황에서 길을 모색하는 시도를 얘기한 것이다. 내 경우도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아무 쉼표 없이 허겁지겁 달려가지 말고 재정비를 해보라는 거다. 매듭을 짓고 나이테를 만들고 싶었다. 그게 여행이었고 책이었다.”

 

-본문 곳곳에 회사와 조직 생활에 대한 반추가 나온다. 30년을 겪은 사람으로서 어떤 조언을 하고 싶나?

 

방송은 특히 시간과의 싸움이다. 많이들 지친다. 심지어 유명 앵커들도 겉보기엔 번듯하지만 늘 바쁘고 피곤하다. 조명이 꺼지면서 기계는 다 꺼지지만 사람의 정신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밤에 잠을 못 든다. 마감 뉴스 앵커는 아침이 돼서야 잠이 든다. 요즘은 다른 직장에도 못지 않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그런 사람들 생각을 많이 했다. 여행 중에도 과거 동료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많이 격려도 해줬고, 여행 후에는 모임도 있었는데 후배들이 이런저런 고민들을 털어놓더라. 이제는 직장 상사가 아니라 인생 선배로서 듣고 이야기하고 했다. 어느날 사장님, 그러지 마시고 그동안 해주신 얘기를 여행 얘기에 녹여 쓰면 어떨까요라는 말을 들었다. 요즘 직장 생활하는 동년배와 젊은 세대들의 고민을 함께 언급했다. 상당 부분은 내가 전에 실수했거나 뒤늦게 깨달은 얘기들이다.

 

요즘 멘토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솔직히 나는 그럴 자격은 못 된다. 멘토 입장에서 책을 쓴 건 아니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료나 친구 입장에서 같이 한번 생각해 보자는 정도였다. 이 책에도 답 같은 것은 거의 없다. 화두만 던진 셈이다. 나는 기자 직업이 너무 좋았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고민을 최전선에서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미디어 환경이 안 좋고 경쟁이 치열해져서 힘든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매력있는 직업이다. 나는 우연히도 첫 직장을 출판사에서 시작해서, 신문, 방송, 뉴미디어 같은 다양한 매체를 차례로 겪고 보니 느끼는 게 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고집할 수는 없다는 거다. 시청자나 독자 혹은 시장과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양방향으로 가야 한다. 방송 할 때는 시청률 때문에 다큐 만들면서도 겁이 많이 났다. 이번 책도 그렇고. 그건 숙명이다. 그러니 겁을 내면 안된다. 요즘 환경이 안 좋아서 겁도 더 많이 나게 돼있지만 그래도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괴테 여행의 메시지도 정면 돌파다. 어설픈 힐링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잠시 좋아도 나중엔 갈증이 더 난다. 사람마다 직업마다 여건이 다르니까 구체적으로 일일이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힘들어도 자기가 안고 있는 문제를 폭풍의 한가운데를 걸어가 보는 게 좋다. 그때는 괴롭지만 지나고 나면 자신이 훌쩍 커져있음을 느낄 것이다. 비행기가 이륙하려면 엄청난 가속을 해야 한다. 이륙해서 일정 고도에 진입하면 기류를 타고 간다. 사회 생활도 직업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당장에는 힘들더라도 야근이든 휴일 근무든 예상치 못한 업무든, 그 한가운데로 가보는게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무형 자산이 된다. 지나고 나면, 그걸 한번 해봤다, 이겨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것처럼 좋은 자산이 없다.”

 

-바쁜 직장 생활 중에 자기 관리는 어떻게 했나?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자기 위로와 공부 삼아서 한 게 책을 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겁도 났다. 하지만 이런 말도 있지 않나. 미국의 어떤 노벨상 수상자가 한 말로 기억하는데, 자신은 무엇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알고 싶은 것이 생기면 책을 쓸 결심을 한다고 했다. 맞다. 적극성이 중요하다. 다 알고 난 후에 쓰겠다고 하면 영원히 못 쓴다. , 모든 사람으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겠다고 하면 책을 못 쓴다. 창피함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책을 쓰다 보니 지친 생활 중에 어떤 매듭도 지어지고 공부도 됐다. 두번째는, 내놓고 얘기하기는 좀 그런데. 내가 예전에 과감하게 휴직을 해 본 적이 있다. 중견 정치부 기자 시절이었다.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했다. ‘출마하려고 하는구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나했다. 아니었다. 내가 내 돈을 들여 독일로 갔다. 그런 과정이 없었으면 책도 못 쓰고 베를린 특파원도 못 됐을 꺼다. 갔다 와서 쓴 것이 세계 정보기관 스파이들에 대한 책이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 설명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책이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런가, 그걸 취재하기가 제일 좋은 공간이 베를린이었다. 지금 내가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자신에게 과감히 투자한 것이다.”

 

-처음 독일 갔을 때도 번아웃상태였나?

 

그랬던 것 같다. 그때 내 나이가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때와 비슷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초상화

 

-CEO가 된 후에는 어땠나?

 

“CEO가 된 후에도 직원들과 색다른 걸 많이 했다. 가령, 펀치라는 게 있다. 재미를 뜻하는 (fun)’브런치를 조합한 말인데, 매달 한 번씩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외부 인사도 불러서 함께 시간을 갖곤 했다. ‘CCC’라고 해서 ‘Creative Coffee Cafe’ 약자인데, 이름은 장난삼아 붙였고 아침에 커피마시는 시간이다. 의외로 사람들이 좋아했다. ‘CEO 2.0 파티라고 해서 집에서도 모였다. 오늘 저녁에도 내가 책을 냈다고 해서 옛 직원들과 모이는 자리가 있는데, 이름이 맥북이다. ‘맥주와 북(book)’의 만남이라는 뜻이다. 청출어람이라고, 이제는 직원들이 그런 이름을 더 잘 붙인다. 그런 자리에서는 내가 떠들기보다 직원들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 평소에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입을 닫으면 그게 답인 것 같다. 나는 자리를 마련하고 바텐더를 하거나 사진을 찍고 하는 역할밖에 안한다.”

 

-글쓰기에 일찍부터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기자가 된 사람은 대개들 어릴 적부터 글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일찍부터 책 쓸 생각을 많이 한 건 아닌데, 기자를 지망하다가 첫 직장으로 들어간 게 샘터사였다. 거기서 당대와 그 후에 글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해진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첫 부장이 유명한 김형영 시인이었고, 주간이 정채봉 동화작가에, 한겨레 편집국장과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고영재 선배 같은 분들이 있었다. 거기에 최인호, 이해인, 김승옥 같은 유명 필자가 많았다. 이분들을 어깨너머로 보거나, 한마디씩 툭툭 해주시는 말이 큰 공부가 되고 격려가 됐다. 가끔 글을 보여주고 원포인트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 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항상 짧게, 쉽게 쓰는 것을 훈련 받았다. 또 독자와 시청자를 의식하는 것, 빨리 쓰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책을 내는 데는 러닝 바이 두잉(learning by doing)’만 한 게 없다. 책은 호흡이 긴 글인데 이건 써보는 수밖에 없다. 첫 책은 나로서도 너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있어야 두번째 세번째 책이 나온다. 그건 책이나 책상머리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해보면서 배우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글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한데, 그건 호흡이 길지 않다. 독자나 시장과 교류한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 자기만의 정체성을 기른다는 점에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샘터사 문인들한테서 배운 것 중에 기억나는 게 있나?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최인호 선생이 기억난다. 내가 그때 가장 궁금했던 게 어떻게 취직 한 번 안하고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가였다. 그분이 이렇게 답했다. 글에 관한 한 남들과 똑같은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이를테면 글의 구성을 1-2-3-4 순으로 배웠다면, 때로는 1-4-3-2 혹은 4-3-2-1 순으로도 시도해 보라고 했다. 늘 끊임없이 남과 다르게 가보라는 얘기다. 두번째, 이분은 책 한 권을 쓰고 난 후에는 늘 답사를 다녔다. 그분 말씀이, 책을 내고 나면 여자들의 산후 우울증 비슷한 걸 겪는다면서, 그걸 잊는 최고의 방법은 다른 뭔가에 몰입하는 거라고 했다. 연애 같은 것도 방법이겠지만 나는 그럴 순 없고, 새로운 세계에 빠져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종교, 역사도 깊이 탐구했다. 그분이 가톨릭 신자였는데, 불교 여행도 그렇게 많이 했다. 고구려, 백제 역사도 전문가 수준으로 많이 알았다. 그게 또 작품에 투입된다. 나도 이 책 쓰고 나니 허탈한 느낌이 있다. 더 잘 쓸 걸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요즘 빨리 딴 데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독일의 작가인 그림(Grimm) 형제. 왼쪽부터 동생 빌헬름(Wilhelm Carl Grimm·1786~1859), 형 야콥(Jacob Ludwig Carl Grimm·1785~1863).

 

-새로운 관심거리는 뭔가?

 

독일의 또다른 고전인 그림(Grimm) 동화를 쓴 그림 형제의 길이다. 이 책 끝나자마자 그림 형제에 관한 두꺼운 독일어 전기를 다 읽었다. 일어로 나온 책도 장인이 번역해줘서 다 읽었다. ‘그림 형제의 길이 우리한테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림동화 자체가 나온 시기가 독일의 태평 성대가 아니라 가장 힘들 때였다. 나폴레옹의 말발굽에 짓밟혔을 때였다. 그림 형제도 일찍 아버지가 죽고 집안이 몰락했다. 두 형제는 굴하지 않고, 기자도 하고 교수도 했고, 최초의 독일어 사전도 만들고 정치에도 나서고 다양한 역할을 했다. 그 시대의 고통 한가운데를 걸어갔다. 나한테도 지칠 때마다 힘들 때마다 등불이 된 인물들이다. 또다른 한편으로, 그림동화는 여러가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콘텐츠여서 헐리우드에서도 다양하게 각색됐다. 우리도 한류라고 해서 케이팝이 떴지만 일회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다양한 콘텐츠에 눈을 떠야 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책으로 소개하고 싶다.”

 

-한 달 동안 칩거해서 책을 썼다고 했는데, 평소 독서나 메모가 꽤 누적돼 있었던 것 같다.

 

연암과 괴테한테서 배운 게 있다. 적자생존이다. 원 뜻은 적응을 잘 하는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거지만, 내 뜻은 메모를 잘해야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특히 글로 승부하거나 책이나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틈틈이 메모를 잘해야 한다. 그 다음 그게 자료로 분류가 잘돼 있어야 한다. 첫 번째는 남이 하지 않은 분야를 하되, 자신이 절실한 분야를 테마로 잡는 것이지만, 두번째는 자료를 많이 온축해 둬야 한다. 이 책만 해도 특파원 때 쓸 생각을 했던 거니까, 자료는 10년 이상 모은 셈이다. 내가 독일인한테서 배운 게 있다. 분류법이다. 그 사람들은 중학교만 나와도 나보다 자료 정리를 더 잘 한다. 독일 말 중에 제일 중요한 단어가 질서(Ordnung)’이다. 인사말 중에 ‘Alles in Ordnung!’이란 표현이 있다. 영어로 ‘Everything is O.K.’란 뜻이다. 직역하면 모든 게 질서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질서를 중시한다. 세계적인 문구류가 독일 브랜드 아닌가. 분류의 천재들이다. 자료는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분류를 잘 해놔야 한다. 그래야 책 쓸 때나 프로그램 만들때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다. 정리 안된 자료는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

 

-특히 글 중간중간에 적절한 고전 인용이 돋보인다.

 

책을 몇 권 쓰면서 배운 것이다. ‘러닝 바이 두잉으로. 글을 쓰다가 필요한 구절이 그때그때 떠올라야 하는데, 절실하면 떠오르더라. 어떤 날은 안 떠올라서 밤새 못 쓰기도 한다. 적절한 표현을 고민하다가 자다가 깨기도 하고, 메모를 해두고 다시 자기도 한다. 생각 날 때마다 스마트폰에 녹음도 하고 찍어두고 한다. 책 같은 경우에는 형광펜으로 키워드를 표시하거나 색인을 붙여놓기도 한다. 오히려 분류하기 어려운 것은 신문이나 브로셔 같은 일반 자료들이다.”

 

-본문에 사진도 많이 넣었다. 직접 찍은 건가?

 

이 책에 나오는 사진도 전부 스마트폰으로 찍은 거다. 일부러 그랬다. 모바일 시대이기도 하고, 무거운 장비를 들고 촬영에 신경 쓰다 보면 핵심을 놓칠 수 있으니까. 이것도 모험적인 시도였는데, 요즘 기술이 좋아 다행히 잘 나왔다. 그때그때 페북에도 올렸는데 나중에 책에도 상당히 도움이 됐다. 저자가 독자와 너무 타협해도 안되겠지만, 요즘은 독자들 니즈가 뭔지 소셜미디어를 통해 파악할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특히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이 비슷한 시기였다는 것은 페북 친구를 통해 알게 됐다. 찾아봤더니 둘 다 북위 40도에서 글을 썼다. 6년 정도 차이가 있지만 동시대 최고의 문장가가 교차한 셈이다.”

 

-요즘 독일이 주목을 많이 받는다. 제조업 강국에, 월드컵 우승까지. 저자들 중에도 독일 유학파(‘피로사회의 한병철, ‘에디톨로지의 김정운 등)가 인기다. 왜 그럴까?

 

첫째, 베를린이 심심한 곳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생각할 시간이 많다. 다른 놀거리가 별로 없다. 유행이라는 것도 별 게 없다. 유학생이나 주재원들도 집에 모여 이런저런 잡담(소위 구라’)을 하는 게 낙이다. 대화 내용이 서로 자극이 된다. 독일 문화가 근본적으로 담소 혹은 수다가 핵심이다. 그런 걸 좋아한다. 고급말로는 담론이라고 한다. 그곳 저녁 시간이 우리 기준으로는 따분하지만 지식 관점에서는 재밌는 게 많다. 저녁 실내 행사가 참 다양하다. 양질의 공연부터 온갖 행사가 싸다. 무료도 많다. 그런 데서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 또하나, 최고의 공부는 신문이다. 특히 문예란이 아주 고급이어서 거기에 나오는 테마나 질문만 제대로 읽어도 상당히 공부가 된다. 내가 모은 파일의 상당수도 독일 신문과 저널에서 얻은 것이다. 독일은 깊이도 있지만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 그래야 저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다.”

 

-독일의 책 읽기나 쓰기 문화에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게 있나?

 

그쪽에는 깊이가 있으면서도 대중적으로 잘 쓰는 사람이 많다. 가령, 국내에도 잘 알려진 책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베른하르트 슐링크)만 해도 원래 훔볼트대 헌법학 교수다. 그런 사람이 나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대중과 소통한다. 학자들도 진지하지만 엄숙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캐주얼할 때는 한없이 캐주얼하다. 저자도 어떤 자격이나 간판에 연연하지 않는다. 작품의 내용과 콘텐츠의 질로 승부를 겨루는 장이 마련돼 있다. 요즘은 다행히 우리도 재야의 몇몇 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인정도 받는 것 같다. 둘째, 독일의 경우 책을 비롯한 양질의 문화 상품의 경우 값을 내고 누리는 것이 에티켓으로 정착돼 있다. 책은 물론, 공연도 전시회도 저자나 예술가에 대한 최고의 격려는 책을 사고 표를 사주는 것이다. 우리는 거꾸로 작품은 공짜로 누리고, 축하의 표시로 밥을 사고 술을 사준다. 결과적으로는 밥집과 커피집은 매일 늘어나는데 책방과 출판사는 문을 닫는다. 이걸 일반인은 잘 의식을 못 한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또다른 양질의 콘텐츠를 누리기 위해서는 선순환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좋아지고 있다.”

 

-끝으로,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해보겠다. 지금 수중에 1000만원, 10억원이 생긴다면 뭘 하고 싶은가?

 

허허, 글쎄. 우선 천만원이 있으면 재투자하겠다. 그림형제의 길을 따라 여행을 떠나겠다. 관련 자료는 웬만큼 있으니 현장에 가서 피부로 느껴보고 싶다. 그게 책의 첫 문장이 될 것이다. 차별화된 콘텐츠로 독자에게 서비스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10억원이 있으면, 다른 직업을 생각하지 않고 양질의 콘텐츠 개발에 평생을 걸 것이다. 책도 쓰고 강연도 하고. 특히 요즘 도농 격차가 큰데 시골이나 벽지로 가서 무료 강연도 하고 문화 함양에 도움이 되고 싶다. 특히 젊은 세대, 초중고대학생들이나 선생님들과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 꿈을 심어주고 싶다. 나는 학벌도 공부도 남보다 특별히 잘한 것도 아니다. 운이 좋아 기자도 되고 CEO까지 했다. 꿈을 이루는 첫째 조건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끝까지 붙잡고 있으면 한 번은 기회가 온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른다. 이번 책도 페북에서 알게 된 분을 통해 출판사를 소개받았다. 꿈을 붙들기 위한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는 데 미력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 조선Biz 전병근 기자 / 2014.11.29 -